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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on Aug 02. 2022

10년 단골손님을 응대하는 방법

  “성인 1인 1잔씩 주문하시면 무한리필로 드실 수 있습니다.”

  평소처럼 생맥주도 한 잔 주세요, 했더니 전에 없던 안내가 뒤따른다. 종전까지는 아니었다. 어른 머릿수대로 주문하지 않아도 알아서 계속 갖다 마실 수 있었다. 아내는 나처럼 맥주를 선호하지 않는다. 내 것만 한 잔 주문하면 중간 몇 모금 갈증만 가시게 하는 정도다. 무한리필로 두 사람 몫 시키는 건 아까웠다. 대신에 초밥 많이 팔아주면 되니까 괜찮겠지 싶었다. 실제로 오랜 세월 그렇게 주문했어도 아무도 문제 삼지 않았다.


  불경기 탓인가. 그렇게 해서는 남는 게 없다고 판단한 건가. 거품을 소담스럽게 올린 이슬 맺힌 생맥주 잔을 물끄러미 본다. 아내에게 첫 모금을 권한다. 그러고는 잔을 가져와서 시원하게 들이켠다. 이 잔 다 마시면 이젠 무한리필 안 되는 건가. 머릿수대로 시키지 않았으니까. 종지 세 개를 모아 간장을 따른다. 아내와 아이 앞으로 하나씩 민다. 테이블 구석 동그란 찬합 뚜껑을 연다. 사각 조그만 접시에 초생강과 락교를 먹을 만큼 옮겨 담는다. 아이가 좋아하는 연어초밥과 날치알 군함 말이 초밥을 회전 선반에서 내린다.


  나는 계란초밥부터 시작이다. 동그란 접시에 초밥이 두 개씩 올랐다. 겨우 한 접시 비우는데 한 잔 주문한 생맥주가 바닥을 보인다. 아, 이제 시작인데. 자연스럽게 맥주 디스펜서로 향하려다 멈칫한다. 머릿수대로.. 왠지 잔에 반쯤 따랐을 때 누군가 제동을 걸어올 것 같다. 손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그런 상황까지 만들고 싶지 않았다. 저기요, 파트타임 알바로 보이는 종업원을 부른다. 저희 여기 생맥주 한 잔 더 주세요. 아내를 보며 눈짓과 손짓으로 디스펜서를 가리킨다. 아내가 말없이 끄떡한다.


  까짓 거 한 잔 값 더 내면 되지. 빈 맥주잔을 들고 당당하게 일어난다. 디스펜서 앞에 서서 능숙한 솜씨로 맥주를 받아낸다. 레버를 아래쪽으로 해서 잔 높이의 8할 정도 받다가 잠깐 멈추고 위쪽으로 올리면 그때부터는 거품만. 시뮬레이션 한 대로 반쯤 채우는데 느닷없이 노즐이 퍽퍽 소리를 내면서 거품을 뿜는다. 기껏 받아놓은 맥주가 넘쳐서 손등으로 흐른다. 일단 손을 대강 털고 방금 전 동작을 다시 취한다. 이번에는 거품도 없이 쉭쉭 빈 바람만 나온다. “사장님, 여기 생맥주 다 된 것 같은데요!” 나 좀 보세요 하며 고개를 두리번거린다.


  가까운 회전 선반 앞에 있는 조리사가 종업원을 호출한다. 안면이 있는 조리사다. 이 식당에서 사장님 다음으로 연차가 있는 분이다. 가슴팍 명찰에 ‘실장’이라고 쓰여 있는 걸 얼핏 본 기억이 있다. 그분도 분명 우리 식구를 안다. 아빠 욕심으로 아이가 초밥 맛이 뭔지도 모르는 시절부터 데리고 다녔다. 그 세월이 십 년이다. 가만히 보니 사장님이 안 뵌다. 오늘은 실장님이 책임자 시구나. 잠시 테이블로 돌아와서 조치를 기다린다.


  종업원 둘이 디스펜서를 만진다. 서로 끄떡하는 걸 보니까 내 추측이 맞는 것 같다. 기계 아래 문짝을 열어 빈 맥주 드럼통을 꺼낸다. 계산대 뒤쪽이 물품 창고인가 보다. 육중한 새 맥주 드럼을 가져오려나 싶었는데 빈손으로 나온다. 열어둔 것들을 정리하더니 테이블로 온다. “손님, 죄송하지만 맥주가 다 떨어졌습니다. 남은 건 병맥주뿐입니다.” 원하지 않은 결과다. 무한리필이라고 해서 나머지 한 사람 몫까지 마저 주문한 건데 그러면 어찌해야 되느냐 물었다. 갓 스무 살이나 됐을까 싶은 여자 종업원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잠시만요, 하더니 잰걸음으로 실장님에게 향한다.


  남자 실장이 우리 식구 테이블 한 면으로 흐르는 회전 선반 앞으로 왔다. “손님, 맥주 두 잔 주문하신 것 일단 한 잔씩은 드셨죠? 저희가 한 잔 값으로 드리는 건데 무한리필은 서비스 같은 겁니다. 그러니까 손해는 아니시고요, 무한리필도 저기 생맥주가 다 떨어지는 때까지만입니다.” 그런 조건이 있었다고? 납득할 수 없는 설명이다. 이런 상황에서 어지간하면 남편에게 맡기는 아내가 한 마디 한다. “실장님, 언제부터 그런 규칙이 있었을까요? 저희가 이 집 처음 오는 것도 아닌데요.” 나도 차분하게 거든다. “아니, 그러면 손님이 주문하기 전에 오늘은 생맥주가 얼마나 남았는지 물어봐야 한단 얘긴가요. 그건 말 그대로 무한리필이 아니잖아요.”


  실장이 말을 잇는다. 조금 전보다는 당혹스러운 눈치다. “실은 요새가 휴가철이어서 맥주 업체에서 물건을 못 채워줬거든요. 그러면 너희들 와봐. 늬들이 미리 말씀 못 드린 거니까 이 분들 맥주 두 잔 값은 계산에서 빼.” 옆에 멀뚱히 서 있던 종업원들이 놀란 토끼 눈이 된다. 일순간 분위기가 얼어붙는다. 덕분에 주말 세 식구 오붓하고 즐거운 외식 자리가 싸늘하게 식는다. 어색한 공기를 깨려고 내 쪽에서 말을 잇는다. “그러면 그건 알겠고요, 병맥주라도 갖다 주세요. 물론 계산할 게요.”


  일부러 아이에게 이런저런 얘기를 물어가며 가족 외식 분위기를 끌어올린다. 아쉬운 생맥주 품절 사태와 무관하게 초밥 맛은 여전히 훌륭하다. 그러고 보니 십 년 새 값이 많이 올랐다. 예전엔 가장 비싼 금색 접시가 팔천 원이었는데 지금은 만 원도 넘는다. 게다가 딸아이 먹성도 늘었다. 고기 좋아하는 아내 입맛을 위해서는 돼지갈비 식당쯤 찾는 게 제격인데 그것보다 훨씬 비싸다. 대신에 곁들이는 술값이 저렴하니까 그 생각으로 자주 다녔다.


  여기 계산 부탁드릴게요. 토끼 눈이 되었던 종업원이 와서 접시 개수를 센다.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꼼꼼하게 확인한다. 저 쪽에서 계산 도와드릴게요, 우리 식구를 계산대로 이끈다. 아내가 신용카드를 내민다. 카드를 받아 들며 종업원이 “아까 미리 알려드리지 못해서 죄송했습니다..” 하는 걸 내가 말 허리를 잘라낸다. “아니요, 직원분이 잘못한 거 하나도 없죠. 직원분이라고 열어보지도 않고 맥주 얼마나 남았는지 어떻게 알아요. 애초에 그런 룰이 있었는지, 그게 맞는지 모르겠지만요.” 부러 남자 실장 들으라고 큰 목소리로 얘기했다. 종업원이 꾸벅 고개를 묻으며 인사한다. 억울했는데 알아줘서 고맙다는 뜻일 테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아내가 말한다. “저 실장님은 십 년 단골손님한테 오늘 너무 잘못 응대했어. 그냥 이렇게 말하면 간단하잖아. ‘죄송하지만 맥주 재고를 미리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두 분 주문하신 건 계산에서 당연히 빼겠습니다. 불편드려서 죄송합니다.’ 이거면 깔끔하지. 서로 얼굴 붉힐 일도 없고. 당신들 손해 본 것 없다는 설명이며 업체가 휴가라느니 손님 입장에서 안 들어도 되는 말이지. 게다가 최악은 애꿎은 어린 알바생들 핑계 댔잖아. 그 친구들은 얼마나 억울해. 이상한 규칙 알바생들도 처음 들어볼 걸? 게다가 그러고 있는 걸 주변에 동료 직원이며 손님들이 다 봤잖아. 사장 밑에 실장, 이인자로서 권위는 물 건너갔고 가게 신뢰도도 떨어뜨린 거지. 실장님 오늘 퇴근해서 자려고 누우면 ‘이불 킥’ 하겠네. 쯧쯧.” 조목조목 맞는 말이다. 근데 오늘 처음 온 손님이래도 그랬어야 하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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