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이브 마이 카>라는 제목의 영화를 보았다. 봉준호 감독이 극찬한 일본 영화계의 신예,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이 각본, 연출한 영화다.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집 「여자 없는 남자들」에 수록된 여러 단편을 하나의 이야기로 조합하여 각색했다. 아내의 외도를 목격한 중년 연극배우가 갑작스럽게 맞닥뜨린 그녀의 죽음을 뒤로하고 히로시마로 낙향한다. 그가 지역 연극제를 준비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일들과 인물의 심리 변화를 담았다.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연극배우의 자가용 승용차와 그의 출퇴근길을 맡게 된 여성 운전기사, 그녀와 그 두 사람의 관계가 이야기의 줄기가 된다. 롤러코스터 같은 요란한 재미가 아니라 잔잔한 물결로 깊은 감동을 준다.
난 이제 죽었다. 죽음을 각오하거나 딱 죽기 전까지의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아내가 싫어하는 나의 행위가 적잖다. 그중에서 전철 끊길 때까지 술자리에 남았다가 비싼 택시 잡아타고 귀가하는 걸 가장 싫어한다. 오늘이 그 역린을 거스르는 날, 아니 밤이다. 팬데믹 이후 오랜만에 처음으로 동기 동창들과 모임을 가졌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라면 거짓말이겠고 시간 가는 것 빤히 알면서도 엉덩이를 떼지 못했다. 에라 모르겠다, 저지르고 보자는 심정으로 동지들과 우애를 다졌다.
손을 크게 흔들어 작별 인사를 나눈다. 택시 호출 어플을 켤까. 그럴 필요가 없는 것이 워낙 늦은 시간이라 노변에 택시 정차 행렬이 길다. 한 줄로 길 것 같으면 생각할 것 없이 맨 앞에 택시에 오르면 된다. 그런 모양이 아니라 여러 연석 경계에 드문드문 점점이 섰다. 순서에 상관없이 가까운 아무 택시나 잡아타고 출발하는 승객이 여럿이다. 어느 택시를 탈까. 기왕이면 집으로 가는 방향 앞쪽에 있는 차에 타야지. 취한 걸음으로 앞으로, 앞으로 걷는데 “OO시 가시게요?” 낮고 부드러운 음성이 돌출한다.
은발의 노신사가 내게 묻는 말이다. 저만치 차를 세워두고 잠깐 밖으로 나와 담배 한 대 태우던 중이셨나 보다. 손가락으로 담배를 톡톡 털어 끄며 차로 돌아온다. “예, OO시 △△동 가려고요. 타도 될까요?” 내 얼굴에 어디 사는지 쓰여 있기라도 한 걸까. 아니면 오랜 세월이 만든 직관일까. 그러시죠, 하며 노신사가 운전석에 오른다.
“기사님, △△동 □□ 아파트 아실까요?” 그에게 묻는다. 혹 고개를 가로저으면 내비게이션으로 목적지 검색하셔도 된다고 말하려던 참이었다. 서울 어디 아파트도 아니므로 잘 모르는 기사님들이 많다. “주민센터 맞은편에 있는 아파트지요? 길 건너에는 **아파트랑 @@아파트도 있고요. OO도로 타고 가다가 OO사거리에서 좌회전하면 되겠네요.” 0.8배속 느린 음성이지만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답해온다. 아이고, 어쩜 그렇게 잘 아시느냐, 화답하니 엷은 미소를 머금으신다. 부드러운 말씨만큼이나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차가 출발한다.
“약주하시고 귀가하시는 길인가 봐요.” 이번에는 기사님이 내게 묻는다. “예, 오랜만에 동무들이랑 한 잔 했습니다. 늦었으니 마누라한테 잔소리 꾀나 듣겠네요.” 묻지 않은 것까지 답한다. 이것도 오랜만이니 새롭고 정겹다. 요사이는 택시에 타도 기사님과 두런두런 시시콜콜한 얘기 나누는 일이 없지 싶다. 그런 것도 옛 유행이 되나 보다. 일체의 소통 없이 A지점에서 B지점으로의 위치 이동, 그것에만 오롯이 집중하는 게 요즘 택시 이용의 흔한 양태다.
코너링이 예술이다. 영화 <기생충> 초반부, 이선균 배우가 배역을 맡은 중견기업 CEO 동익이 송강호 배우가 연기한 아빠 기택을 운전기사로 채용하기에 앞서 이른바 테스트 드라이브를 가진다. 그 장면에서 읊조리는 대사다. 그만큼 기택의 운전 솜씨가 탁월하다는 얘기다. 자식의 병역 특혜로 문제가 된 어느 정치인의 논란을 재치 있게 패러디한 거라고 영화평론가는 말했다. 나를 집으로 이끄는 老기사님의 드라이빙 스킬이 아마 그쯤 될 것이다. 그야말로 코너링, 회전이 부드럽고 감미롭다. 몸이 한쪽으로 기우뚱 쏠리는 것 없이 유려하게 차 머리가 돌아 나간다. 그것만 예술의 경지일쏘냐. 어지간한 요철 구간을 지나도 덜컹 엉덩이가 들썩이지 않는다. 내가 탄 차가 분명 흔한 국산 중형 세단일진대 독일 프리미엄 3사에서 만든 차 마냥 현가장치의 동작이 놀랍다. 아니지, 이건 기계의 몫이 아니라 장비를 가리지 않는 장인의 능력이다.
차가 막 고속도로에 오른 시점에는 조금 답답하다고 느낀 게 사실이었다. 어르신 안전하게 운전해주시는 건 너무 감사한데, 이러다간 귀가 시간이 더 늦어지겠는걸, 그것도 그렇고 택시비도 여느 때보다 더 나오겠고, 조심스럽게 말씀을 드려봐야 하나, 저 기사님 죄송하지만.. 하려던 걸 좀 더 있어보자며 참았다. 그러기를 잘했다. 주변에 차량 통행이 드물어지고 본격적으로 속도가 붙으려니 차가 무겁게 바닥으로 깔리며 쾌속 순항한다. 언젠가 비슷한 사정으로 탑승했던 노란 머리 젊은 기사가 운전하는 총알택시, 그 뒷좌석에서 느꼈던 공포감과는 완전히 다르다. 그때는 이러다 죽겠는데 싶어 나도 모르게 차창 위에 붙은 손잡이를 꼭 쥐었다. 지금은 외려 안락하고 편안하다. 창문을 손 뼘만큼만 내린다. 얼굴로 달려드는 밤바람으로 술기운을 씻는다.
“다 왔습니다. 카드로 결제하실 건가요.” 평소보다 요금도 일이 천 원 덜 나왔다. 그만큼 시간도 조금 덜 걸렸을 것이다. 안전한 귀가로 인한 안도감에 작은 기쁨이 보태진다. 신용카드를 받아 들며 안전벨트를 푼다. 차 밖으로 몸을 꺼내기 전에 마음을 담아 한 말씀드린다. “기사님, 덕분에 안전하고 빠르게 집에 잘 왔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그리고 기사님 운전 솜씨 정말이지 예술적이십니다. 타고 오는 내내 뒷자리에서 감탄했습니다. 멀리 돌아가셔야 할 텐데, 늦은 시간까지 안전 운전하십시오. 고맙습니다.” 환갑도 훨씬 지나서 내 아버지 나이쯤 칠순 즈음이실 듯 하얗게 머리에 눈이 내린 노신사께서 인사를 받는다. “예, 조심해서 귀가하세요.” 내려준 자리에서 천천히 출발하는 택시 뒤 궁둥이를 가만히 본다. 뜻도 모르게 가슴이 먹먹해온다. 아휴, 취한다. 집에 들어가자. 한 소리 또 듣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