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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on Aug 04. 2022

만화방 오너 2세 참교육

  ‘프로 불편러’가 세상을 바꾼다. 좋은 게 좋은 거지. 절대로 아니다. 대강 어벌쩡 넘어가다 다리가 끊어지고 건물이 무너진다. 좋은 게, 결코 좋은 게 아니다. 프로 불편러는 만화방에서도 활약한다. 더욱이 그곳은 그가 가장 신성시하는 공간 중 하나다. 도적떼 같은 시간을 교살하기 위해 들르지 않는다. 그곳은 그에게 유년 시절의 우상들을 모셔둔 신전이며 인류의 찬란한 서사, 끝없는 상상력을 망라한 장엄한 박물관이다.


  아내가 친구들과 점심 약속이 있다며 나갔다. 딸아이와 나 둘이 남았다. 우린 이따 점심에 뭐 먹을까. 아이는 먹는 것보다 황금 같은 여름방학 뭘 하고 놀아야 소문이 날까가 더 관심사다. 식사와 유희를 원스톱으로 해결할 수 있으면서 쾌적하기까지 한 곳? 피시방? 땡! 거긴 너무 시끄럽고 정신없다. 정답은 만화방. 아이도 무척 좋아한다. 이런 대물림은 대단히 환영한다.


  만화방에 들어선다. 만화방이라고는 하나 내가 한창때 다니던 데와 사뭇 다르다. 우리 땐 시커먼 동네 아저씨들이 뻐끔뻐끔 담배도 피우던 곳이라면 여긴 세련된 카페 같다. 나 같은 열독자를 위한 배려인지 조용한 슬리퍼로 갈아 신어야 입장이 가능하다. 신발 갈아 신고 계산대 앞에 선다. 머릿수대로 출입카드를 받고 자리를 배치받는 게 순서다.


  어서 오세요, 기척이 없다. 계산대 앞에 장정 한 사람이 서있다. 안녕하세요, 내 쪽에서 말을 붙인다. 답인사 없이 “몇 사람이요?” 한다. 어른 하나, 어린이 하나요, 답한다. “어느 자리요?” 묻는다. 아이에게 어디가 좋겠느냐 묻고 의견대로 답한다. 무표정한 얼굴로 단말기에 무언가 삑삑 입력한다. 명함 크기의 출입 카드 두 장을 선반 위에 툭 내려놓는다. 인사 없는 건 그렇다 치고 말이 왜 이렇게 짧아. 손으로 안 주는 건 또 뭐고. 즐거운 시간 되세요, 보통 이 정도는 말하지 않나. 즐거운 시간 망치지 말아야지, 새기며 자리로 향한다.


  아이가 라면과 김치볶음밥, 복숭아 아이스티가 먹고 싶단다. 계산대로 향한다. 이번에도 내가 불러야 고개를 돌린다. 음식 좀 주문하려고요, 이거 하나 저거 하나 주세요. 역시 대꾸 없이 신용카드만 받는다. 단말기 입력을 마치더니 진동 벨을 또 툭 내려놓는다. 진동 벨이 두 개다. 음식 따로 음료 따로 그런 건가. 고맙습니다, 하며 돌아선다. 이럴 때도 대개는 “진동 벨로 알려드릴게요.” 이러지 않나.


  서가로 가서 아이와 만화책을 고른다. 손에 들고 있는 진동 벨 두 개가 거추장스러웠다. 책 고르다가 두 번씩이나 왕복하기가 싫었다. 계산대로 가서 직원을 부른다. “저 죄송한데 이거 진동 벨이 두 개인데요, 따로 안 주셔도 되고 음료랑 음식 다 준비되면 한 번에 호출해주실 수 있을까요?” 딴에는 의사를 최대한 간결하게 표현했다. 직원은 그게 뭔 소리냐, 하는 반응이다. 눈썹을 찡그리는 걸 보고 알아챈다. “아, 아니고요, 그럼 지금 저희 음료 만드시는 것 같은데 그것부터 주시면 받아갈게요.” 직원이 웬일로 입을 뗀다. “아직 안 됐다고요.”


  알겠습니다, 하고 돌아서는데 단전에서 뭔가 훅 올라온다. ‘ O끼 X나 불친절하네.’ 두뇌 연산 기능을 최고 속도로 올린다. 들어올 때부터 지금까지 상황을 되감기로 재생한다. 계산대 앞에 모자를 눌러쓴 청년 하나가 서있다. 중년 남자와 여자 어린이가 프레임 안으로 들어온다. 벽장에 신발을 넣고 슬리퍼로 갈아 신는다. 그때까지도 청년은 반응이 없다. 중년 남자가 직원을 부른다. 청년에게 무언가 얘기한다. 고개 인사를 하는 건 한쪽뿐이다. 남자가 잠시 사라졌다가 다시 계산대로 온다. 조금 전과 비슷한 전개다. 역시 꾸벅 고개를 숙이는 건 계산대 밖에 있는 남자다. 남자가 다시 나타나서 청년에게 무언가 말한다. 청년이 짧게 입을 떼고 남자가 돌아선다. 남자는 자리에 서서 한숨을 푹 쉬더니 고개를 갸웃거린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상대의 표정과 제스처를 살핀다. 처음 만나는 사람에겐 더 그렇다. 상대의 표정이 안 좋으면 ‘내가 이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고 있나’ 생각한다. 그러면 더 조심한다. 언뜻 이십 대 청년쯤으로 보이는 직원에게 방금 전까지 내가 그랬다. 세 번씩이나 거푸. 나는 서비스를 이용하고 기꺼이 대가를 지불하려고 왔다. 머릿속 영상을 보니 불친절한 직원 비위 건드릴까 봐 조심하고 있네. 내 안에 느슨했던 인내의 끈이 당겨지다 마침내 끊어지는 소리를 듣는다. 팅!


  한 마디 해야겠다, 돌아보는데 직원이 없다. 그새 주방으로 들어간 모양이다. 그쪽에서 중년 여성 한 분이 나온다. 여기 여사장이다. 그녀에게 묻는다. 좀 전에 들어간 남자 직원 알바냐 가족이냐. 가족인데 왜 그러시느냐 여사장이 답한다. “아까 들어온 손님인데요. 계산대 앞에 서서 인상만 팍팍 쓰고, 적절한 안내도 없이 하는 말이라곤 다 짧고. 뭘 물어보거나 요구하면 제대로 된 반응도 없고. 가족이시라고 해도 잘 타이르셔야 되겠네요.” 여사장 대답이 기막히다. “자다 깬 지 얼마 안 돼서 그럴 거예요. 손님이 좀 이해를..” 내가 이해하라고? 게다가 지금 오후 두 시인데?


  아이가 아빠 무슨 얘기했냐고 묻는다. 직원 있잖아, 너무 불친절해서 말이지. 그랬더니 아이가 알 만하다는 반응이다. 듣자 하니 불친절한 걸로 명성이 대단하단다. 포털 사이트 후기에 보면 알바생 불친절하다는 댓글이 페이지를 넘긴단다. 전에 친구들이랑만 온 적이 있는데 그때는 오늘 같지도 않았단다. 야, 거기 카드 받아 가라고! 반말도 서슴지 않는단다. 네가 아주 상습범이구나, 아직 제대로 된 임자를 못 만났구나. 어디 손님 알기를 우습게 알고.


  진동 벨이 울린다. 음식을 받으러 간다. 여사장이 내 심상찮은 분위기를 감지했나 보다. 진동 벨을 받으면서 옆에 직원을 쿡 찌른다. 어서 사과드려. 쭈뼛쭈뼛 머리를 긁적이며 “손님 아까는 제가 죄송했습니다..” 하는 걸 다른 말로 받는다. 여사장에게 혹시 아드님이시냐 물었다. 그렇단다. 나이가 어떻게 되느냐, 열여덟 살이란다. 오 마이 갓, 너 너무 겉늙었다, 난 무슨 군대 막 제대하고 알바 뛰는 청년인 줄. 속으로만 생각했다.


  나이부터 거들먹거리는 것만큼 꼴불견인 게 없다. 오늘은 비아냥을 감수한다. “아저씨가 들어오면서부터 봤는데 너 무지 불친절하더라. 손님이 들어왔는데 기척도 없고 말이야. 게다가 말은 왜 또 그렇게 짧아? 너 뭐 기분 나쁜 거 있냐? 있어도 손님한테 그러면 안 되지. 너 패밀리 레스토랑 가봤지? 거기 가면 종업원들이 테이블 옆에서 무릎 꿇고 주문받아. 너한테 그런 거 바라지도 않아. 최소한 손님한테 인상 쓰고 싫은 티 팍팍 내면 안 될 거 아냐. 네○버 댓글 보면 여기 뭐라고 돼있는지 알아? 직원 겁나 불친절하대. 그거 다 네 얘기야. 부모님 힘들게 일하시는 거 나와서 도와드리는 거면 기왕에 하는 거 잘해야지. 네가 없는 손님 더 끌어오진 못해도 너 때문에 오던 손님 끊겨서야 되겠냐? 너 고등학교 2학년이면 아저씨 하는 얘기 알아듣지? 그리고 아저씨 딸이 그러는데 애들끼리 오면 너 아주 쥐 잡듯이 한다며. 걔들 엄마 아빠도 만만하냐?”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알아듣는 건지 아닌 건지 고개만 조아린다. 왐마 나 오랜만에 탄력 받네. 이번에는 엄마를 조준한다. “사장님도 아셔야 할 게요, 저야 이렇게 조곤조곤 말로 합니다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어요. 여기 학원가라 10대, 20대 젊은 친구들도 많이 오잖아요. 그중에 아주 불량한 무리들 같으면 저처럼 안 한다고요. 아드님이 아무리 체격 좋아도 떼로 덤비는 데 배겨요? 어디 구석진 데로 데려가서 무슨 험한 짓을 할지 어떻게 알아요? 그런 일 생기기 전에 사장님이 잡아 주셔야죠.”


  개운하지 못한 마음으로 자리로 돌아온다. 사태의 원인을 추적한다. 그러고 보니 아들 이목구비가 그 아비랑 많이 닮았다. 오늘은 없다만 아들의 아빠, 그러니까 남자 사장도 종종 가게로 나온다. 그 양반이 딱 그렇다. 무표정이 기본이고 상냥한 내색이 없다. 엄마라고 많이 다르냐. 그것도 아니다. 아빠보다 겨우 조금 낫다. 엄마의 문제는 아량 없는 장삿속이다. 매상에만 관심이 가 있다. 손님들 마음 얻는 데는 뜻이 없다. 일전에 음식 시키며 앞 접시가 있는지 물었다. 어지간하면 정말 그런 거 없어도 비슷한 뭐라도 쓰시겠느냐 한다. 여사장은 없는데요, 간단하게 얘기한다. 자식은 부모의 거울이다. 그냥 상을 맺지 않고 부모를 합쳐서 더 선명하게 보여주는 확대경이다. 열여덟 살 만화방 주인장 2세의 불친절은 엄마와 아빠로부터 학습한 결과다.


  여름방학인데 친구들이랑 놀러 못 가고 가게 끌려와 있는 아들도 안 됐다. 그건 그거고, 말하자면 네 사정, 너희 가족 사정이겠고 손님한테 그러면 안 되지. 기분 같으면 발걸음 딱 끊고 싶지만 딸 봐서라도 세컨드 찬스를 주기로 한다. 아저씨가 다음에 와서 너, 그리고 너희 엄마 아빠 또 그러나 지켜본다. 아저씨 아마추어 아니거든. 대단히 프로페쇼날한 불편러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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