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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on Aug 09. 2022

내게만 일어나는 일

  시커먼 물줄기가 쏟아져 내린다. 만화책의 한 장면이었다면 네모 칸 귀퉁이에 ‘촤아악!’이라고 의성어를 붙일 만하다. 영화라면 초고속 카메라로 촬영한 느린 그림으로 연출하는 게 적당하겠다. 다음 순간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켜 간발의 차이로 피한다. 물줄기가 등받이 의자를 때리고 바닥으로 넓게 펼쳐지는 순간 영상이 제 속도를 찾는다.


  여성 팀원과 식당을 찾았다. 팀원은 최근 수고가 많았다. 동료 팀원들 여럿이 뒤늦게 코로나 확진이 되었다. 줄줄이 자가 격리에 들어가는 동안 그들 몫까지 공백을 메웠다. 격려와 치하의 뜻에서 밥 한 끼 산다. 전권이 있다면 긴 유급휴가와 상여금을 주고 싶다. 권한 밖이니 급한 대로 밥으로 때운다. 뭐 먹고 싶으냐 물었다. 무난하게 이탈리안 어떠시냔다. 좋지, 믿어지지 않겠지만 아저씨도 그런 거 좋아한단다.


  잠시 대기 끝에 빈자리로 안내를 받는다. 벽에 붙은 테이블이다. 젠틀맨으로서 에티켓을 발휘한다. 네가 편하게 안쪽에 앉으렴. 아니에요, 팀장님이 앉으셔야죠. 이제까지 열이면 열 번 다 여성 팀원을 푹신한 내측 의자에 앉혔다. 한사코 나더러 앉으란다. 그래, 여성이 안쪽에 앉는 것도 정치적 올바름에서 벗어나는 일일지 몰라. 마지못해 안으로 들어간다. 종업원을 불러 음식과 음료를 주문한다.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일어난 일이다. 종업원이 음료수 잔을 빼곡하게 올린 쟁반을 들고 주방에서 나온다. 저 중에 두 잔이 우리 것이겠거니. 딱 봐도 무리이겠다 싶다. 아니나 다를까, 음료 나왔습니다, 하며 쟁반을 기울이는데 와장창! 커피며 과일주스, 탄산음료를 담은 컵과 잔이 급정차한 만원버스마냥 고꾸라진다. 빨강, 파랑, 노랑을 섞으면 알록달록 무지개가 아니라 흙탕물이 된다는 것을 나는 국민학교 미술시간에 알았다. 시커먼 쓰나미가 내 옆구리와 등으로 덮쳐왔다.


  괜찮으세요!? 팀원과 종업원 음성이 겹친다. 응, 괜찮아. 나한테 이런 일 자주 일어나. 별 일 아니라는 듯 말한다. 빈말이 아니다. 팀원에게는 너 입사하기 전에 지금은 없어진 회사 옆 커피점이 있었는데, 거기 종업원은 내 한쪽 어깨에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원하게 쏟았다고 얘기했다. 고개를 등 쪽으로 끝까지 돌린다. 음료 튄 자국이 점점이 보인다. 흠뻑 젖은 건 아니어서 길에서 큰 창피를 당할 것 같진 않다. 종업원이 사고 현장을 수습한다.


  책임자 나와라, 하며 분위기를 험악하게 만드는 손님도 있을 것이다. 날렵한 몸놀림으로 대처를 잘해서 그렇지 사고의 규모만 보면 가벼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또한 초심자가 아니다. 봉변을 하도 많이 당해서 어지간하면 흥분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팀원과의 귀중한 식사 시간을 망치기 싫었다. 잿빛이 된 종업원의 안색도 안쓰럽다. 재빨리 사태를 되감기해서 일상으로 되돌리길 원한다.


  가만, 너 예지력 있는 거 아니니? 이제껏 이성에게 안쪽 자리 양보 안 한 적이 없었거든. 팀원에게 정말 그런 초능력이 있다면 미리 귀띔해 달라 일렀다. 물론 농담으로. 저기 주방에서 다른 종업원이 나온다. 쟁반 위에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육중한 그릇이 보인다. 팀원과 내가 주문한 해물 뚝배기 파스타가 틀림없다. 승부차기 상황, 상대 팀 키커의 시선과 몸의 방향, 다리의 각도를 읽어내는 골키퍼가 된다. 들고 오는 모양새가 위태롭다. 팔뚝 가녀린 여성 종업원에게 뚝배기 두 그릇은 버거워 보인다.


  음식 나왔습니다, 종업원이 뚝배기 하나를 내리는데 쟁반이 균형을 잃는다. 이번 장면은 슬로 모션이 아니라 점프 컷이다. 기울어진 쟁반에 시선을 뺏긴 종업원이 다른 손의 파스타를 놓친다. 테이블 위에 불시착한 뚝배기가 앞으로 구른다. 내용물이 울컥 쏟아져 테이블 위에 펼쳐진다. 뜨겁고 붉은 것이 내 하복부를 지나 허벅다리로 자유 낙하한다. 이번에는 미처 손 쓸 새가 없다. 먼저 것이 해일이었다면 지금은 별안간 폭발한 용암이다.


  평정심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한 번은 참아도 두 번은 힘들다. 인내력 테스트인가. 유명인도 아닐진대 ‘몰래카메라’ 같은 건가. 다음 장면은 어떻게 흘러갔는지도 기억에 또렷하지 않다. 으악, 하며 자리에서 엉거주춤 일어났다. 다른 손님들 이목이 단번에 쏠렸다. 누군가 가져다준 물수건으로 옷가지며 신발을 닦아냈다. 여성 팀원이 안절부절못하고 섰다. 점장이라며 신분을 밝힌 이가 나를 직원용 화장실로 이끌었다.


  수도꼭지를 틀어놓은 채 세면대 거울을 본다. 내게만 일어나는 일. 도대체 왜 나한테는 남들 잘 안 겪는 험한 일이 거짓말처럼 자주 일어나는 것이냐. 전생의 업보인 것인가, 현생의 죄업인 것인가. 나 아까 식당에서 점심 먹는데 거기서 나한테 음료도 엎고 음식도 쏟았어, 두 번이나. 믿어지지도 않는 얘기다.


  내 사정을 아는 친구가 말했다. 슈퍼 히어로 나오는 만화나 영화 보면 악당이 악당 되기 전에 그렇게 다치더라. 녀석의 말대로라면 난 슈퍼 빌런이 되기 위한 조건과 경력을 거의 다 채웠는지도 모르겠다. 남은 건 절대악으로서의 정체성 확인뿐이다. 나가서 확 식당을 뒤엎어버려?! 조심성 없이 뭐 하는 거냐고! 내가 그렇게 우습게 보이냐고!


  테이블로 돌아온다. 신체의 삼분지 일쯤이 붉은색이 돼서는. 슈퍼 빌런도 히어로처럼 별명을 쓴다. 내 경우 ‘레드 토마토’라고 지으면 독자들 귀에 쏙 박힐까. 바지춤을 닦아낼 때마다 토마토 베이스의 파스타 소스 국물이 묻어 나온다. 팀장님, 괜찮으세요? 어.. 어, 두 번째는 타격이 좀 있는 걸. 가만, 너 이것도 미리 본 건 아니지??


  악의 현신은 다음으로 미룬다. 너무 시장하다. 음식이 다시 나왔다. 점장이 거듭 사과하며 모든 정신적, 물질적 손해에 대해 충실히 배상하겠단다. 예, 알겠습니다. 팀원과의 귀중한 식사, 이제는 지키고 싶었다. 나를 힘들게 하는 것도, 내가 그들에게 앙갚음하는 것도 귀찮고 성가시다. 생각해보면, 악당도 먹을 거 다 못 먹고 잘 거 다 못 자가면서 하는 일이다. 나는 그러기 싫다. 그럴 주제도 못 된다.


  회사로 돌아가면서 팀원에게 넋두리한다. 봐, 나한테 이런 일 자주 일어난다고 했던 말 진짜지? 너희들 팀장이 세상 얼마나 험하게 사는지 봤잖아. 다른 팀원들한테 그 인간 진즉에 악당이 됐어도 됐어야 하는데 그 정도만 하는 거 다행이라고, 알고 보면 불쌍한 사람 우리가 좀 봐주자고 공감대 형성 좀 해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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