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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on Aug 30. 2022

제주도 사는 엄마 고양이의 모성애

  여름휴가를 작정하고 다녀왔다. 제주도로. 최대한 아껴서 지출했는데도 동남아 어느 나라쯤 다녀올 법한 경비가 들었다. 성수기 막바지에 해외로 나가지 못한 관광객이 몰렸다. 우리 집 식구들은 어지간해서 사람 붐빌 때 놀러 다니지 않는다. 한데 딸아이 짧은 여름방학 기간 안에 다녀와야 하니 어쩔 수 없었다. 돈이 제법 들 것 같은데, 까짓 거 십 년에 한 번 회사 장기근속 휴가 받은 것 기념해서 지른다. 에라 플렉스다!


  중문 관광단지 일대에서 사나흘 지내고 협재 해수욕장 근처로 이동했다. 제주도 남쪽에 있다 서쪽 시계방향으로 옮긴 셈이다. 해변 바로 앞 숙소는 피한다. 밤새 들려올 청춘들의 불야성에 잠을 설칠까 두렵다. 차로 몇 분 거리 수영장 딸린 리조트를 예약했다. 연식이 좀 된 곳이어서 숙박비도 비싸지 않다. 오래됐어도 관리가 잘 됐다. 손때가 탔지만 낡은 느낌은 아니다. 곳곳에 작은 것들이 여전히 쓰임새를 유지하고 있다. 그래, 이게 더 내 취향이지. 아니나 다를까, 리조트 안 수영장 정취가 천구백구십몇 년쯤에서 멈춘 듯하다.


  수영장 한쪽 구석에선 저녁이 되면 바비큐를 판다. 역시나 가격이 좀 되지만 망설이지 않기로 한다. 물놀이라면 입술이 파래지도록 마다하지 않는 따님 노는 것 옆에서 이국적인 야자수 그늘 밑에 앉아 숯불에 고기 구워 먹고 너울거리는 제주 서쪽 바다 지켜보면서 술 한 잔 부딪칠 수 있는 신선놀음의 대가. 그렇게 생각하면 터무니없지 않은 계산이다. 저희도 주세요!


  석양이 제주 바다 밑으로 내려가고 전등 조명이 들어온다. 우리 식구 앉은 테이블 옆에 새끼 고양이 몇 마리가 기웃거린다. 흰색에 옅은 갈색 얼룩무늬가 예쁘다. 같은 빛깔의 어른 고양이가 저만치 뒤에 배를 깔고 앉았다. 네가 얘들 엄마구나. 딸아이는 이다음에 커서 캣맘이 되려나 보다. 캠핑장에서도 고양이 밥 챙겨주기를 자처한다. 나름대로 고양이를 배려한 원칙도 있다. 언젠가 내가 남은 음식을 캠핑장에 사는 고양이 앞에 던져주니 그러면 안 된단다. 반드시 접시에 담아서 줘야 한단다. 땅바닥에 주면 이물질도 같이 먹게 돼서 배탈이 난단다.


  아이가 남은 고기를 가위로 잘게 자른다. 본인 앞 접시로 썼던 것을 바닥에 내려놓는다. 새끼 고양이들도 사람 먹는 걸 많이 얻어먹어 본 눈치다. 피하지 않고 이리 와, 부르기도 전에 달려든다. 배가 많이 고팠구나. 게 눈 감추듯 먹어 치운다. 아이가 한 번 더 먹을 걸 준비한다. 너 우리 먹을 거 다 고양이 줄 거야? 엄마 핀잔에 아이가 입술만 샐쭉거린다. 주게 둬, 우리 먹을 건 또 시킵시다. 신이 나서 접시를 고양이들 앞에 갖다 놓는다. 그 모습을 아내가 사진으로 남긴다. 그 모습을 엄마 고양이가 모로 눕고 고개만 들어서 본다.


  얘는 하나도 못 먹었어! 아이가 어미 고양이 앞에 큼직한 고기를 들이민다. 그걸 본 새끼 고양이들이 저 먹겠다고 금세 달려든다. 어미는 냄새 한 번 맡지 않고 새끼들 먹게 둔다. 익힌 고기는 싫어하나? 아니면 여기 살면서 너무 많이 얻어먹어서 싫증난 건가. 새끼들이 정신없이 먹는 틈을 타 어미를 따로 꾀어낸다. 이번에는 사람 주기도 아깝게 빨갛게 잘 익힌 새우를 하나 준다. 이건 구미가 당기나 보네. 입에 물었다 싶었는데 새끼들 있는 데로 유유히 걷는다. 무심히 내려놓고 한 걸음 물러나 먼 데만 본다. 이건 또 웬 떡이래, 새끼 고양이들이 맛있게 먹어 치운다.


  새끼들 배가 제법 찼다. 먹을 것에 꽂혔던 관심을 거두고 자기들끼리 깨물고 뒹군다. 다시 한번 아이가 어미한테 고기를 줘본다. 냄새를 맡더니 앞발로 잡고 살짝 뜯어 오물거린다. 어, 너 고기 싫어하는 거 아니었네. 조심스럽지만 재빠른 동작으로 먹는다. 그래, 너도 배가 무지 고팠구나. 그러고 있는 걸 저들끼리 뒤엉켜서 놀고 있던 새끼 한 마리가 어쩌다 보고 말았다. 엄마, 뭐 먹어! 폴짝 뛰어서 온다. 어미는 얼른 입에 물었던 걸 뱉는다. 다시 먼 산만 본다. 다른 새끼들까지 뛰어 와서 주둥이를 경쟁한다.


  새끼 고양이들이 다시 와서 휩쓸고 간 자리에 어미 고양이가 남았다. 아이가 처음 주었을 때와 다르게 대강 먹고 남긴 부분이 많다. 그제야 어미가 새끼들이 남긴 걸 자기 쪽으로 끌어 온다. 딱딱한 새우 머리까지 남기지 않고 먹는다. 그 모습이 짠했는지 알뜰한 아내가 웬일로 큼지막한 고기 한 점을 어미 고양이 앞에 놓는다. 사람들 먹는 거 싫어하기는커녕 네가 젤 좋아하는구나. 근데 그 좋아하는 거 새끼들 먹이겠다고.


  나는 먹는 것 중에 갑각류를 가장 좋아한다. 그중에서 대게는 늘 선망의 대상이다. 초가을 이맘때쯤 서해에서 나는 꽃게도 없어서 못 먹는다. 언젠가 피부과 의사 함익병 씨가 티브이에 나와 본인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갑각류라고 밝혔다. 동료 의사들과 함께 개원한 병원이 크게 이름을 알리게 됐을 때 귀갓길에 수산물 시장에 들러 꽃게를 넉넉하게 두어 상자 샀더란다. 양손에 무겁게 들고 집에 들어서면서 이거 탕으로 끓여서 국물 내지 말고 전부 쪄서 먹자고 할 때 아, 내가 성공했구나 싶었단다. 나는 해보지 못한 일이니 아직 성공과 요원하다.


  그런 내가 어쩌다 바닷가로 여행 가서 아내를 설득해 드물게 대게를 먹을 일이 생긴다. 금방 쪄 내와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대게 넓적다리를 툭 부러뜨려 뽀얀 살만 쏙 뽑은 다음 딸아이 입을 벌리게 한다. 그러면 나도 모르게 꼭 하게 되는 대사가 있다. “딸이 아니면 이거 아무도 안 준다.” 군침은 넘어가지만 아깝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내 형편이 그런가 하면 아내는 아이가 먹고 꼭 배부르다면서 먼저 일어나고 남긴 밥 한두 숟가락, 대강 살코기만 먹고 남은 닭다리를 하얗게 발라 먹는다. 나처럼 뭐 보태는 말도 없다.


  얼룩무늬 고양이가 늦은 끼니를 때우는 걸 보며 상념에 잠긴다. 마침내 나의 엄마, 아내의 엄마, 세상의 모든 엄마가 떠오를 찰나엔 멋쩍게 시큰하기까지 했다. 저기 철 모르고 물장구치는 아이가 자라서 또 자기 새끼를 먹이겠지. 이 땅의 모든 어미와 아비 앞에 큼지막한 고깃덩이 하나씩 두고 오고 싶은 휴양지의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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