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oon Sep 02. 2022

추억 여행은 스크래치 그림

  아내와 아이는 워터파크에 갔다. 사면이 바다인 제주에 와서. 바다 수영과는 또 다른 매력이 있다나. 나는 개인 일정을 보낸다. 지금이 오전 열 시 반, 이따 오후 다섯 시까지 데리러 오면 된다. 어디로 갈까. 무엇을 할까. 부르릉, 렌터카 시동을 다시 건다. 공회전 사이 내비게이션을 만진다. 까마득한 옛날 대학생 시절, 배낭여행 코스나 다시 돌아볼까. 이호 해수욕장까지 올라갔다가 곽지 해수욕장을 거쳐 애월, 협재와 금능 해변으로 훑어 내려오면 되겠다.


  그동안 제주를 몇 번이나 왔었지만 이렇게 혼자 여행 기분 내는 건 처음이다. 그것 자체로 괜스레 들뜬다. 삼사십 분이나 달렸을까. 큰 도로에서 좁은 이면도로로 파고든다. 해변까지 이렇게 구불구불한 길이었나. 스티어링 휠을 고깃배 키처럼 이리저리 돌리는데 이 길 저 담벼락이 왠지 설지 않다. 조금씩 인지의 안개가 걷힌다.


  차를 이면도로 귀퉁이로 세운다. 잠시 내려 골목을 여기저기 기웃댄다. 옛날에는 이 골목 일대가 모두 민박집이었는데. 반쯤 열린 문으로 쭈뼛거리며 들어가면 할머니 빈 방 있을까요, 묻는다. 그러면 어르신이 생전 처음 들어보는 외계의 언어로 답을 주신다. 진짜배기 제주 방언을 들어본 게 그때가 처음이었지 아마. 이제는 최신식 양옥 건물이 더 많이 보인다.



  어색한 노란색 페인트를 덧입힌 집이 시선을 붙잡는다. 깨금발로 담장 너머를 본다. 고개를 돌려 집 앞 길 방향으로도 본다. 좌에서 우, 우에서 좌, 파노라마로도 눈에 담는다. 어느 각도쯤에서 확신한다. 그래, 여기야, 이 집이 분명해. 이십몇 년 전 동기 선후배 여럿과 며칠 머물다 갔던 곳. 서울서 온 대학생들이거든요, 하니까 너그럽게 숙박비를 깎아주신 맘씨 좋은 할머님이 맞아주신 민박집. 용케도 허물어지지 않고 여기 남아있었구나. 훤칠한 새 건물들 틈에서.


  담장 안쪽을 다시 살핀다. 수상한 행동, 다행히 지나가는 이 없는 한산한 골목길이다. 이런 행동을 머리 위 어떤 방향에서 CCTV가 훔쳐보고 있을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나중에라도 문제가 되면 잃어버린 어떤 걸 한참 찾고 있던 중이었다고 답하면 될 일이다. 잃어버린 게 무엇이냐 다시 물어오면 청춘이요, 당당하게 밝힐 셈이다. 각오하고 본 마당 풍경에는 젊은 나와 벗들이 빨래를 하고 옷을 말리고 서툰 냄비 밥을 짓고 어설픈 찌개를 끓이는 중이다. 흔들 다리처럼 늘어진 빨랫줄에는 옷가지에서 물방울이 똑똑 떨어진다. 왁자지껄한 서울 말씨의 웃음소리가 담장을 넘는다.


  미취학 아동 시절 누구나 그려봤을 미술 기법이 있다. 준비물은 크레파스다. 48색, 64색씩 되지 않아도 상관없다. 열두 가지 색이면 충분하다. 팔절 스케치북을 넘겨 하얀 바탕에 자유롭게 색칠한다. 어떤 친구는 빨주노초파남보 큼지막한 무지개를 그린다. 다른 친구는 바둑판무늬로 흰 여백을 채운다. 한 번 쓴 색을 또 꺼내 써도 문제 될 게 없다. 중요한 건 빈틈없이 색을 입히는 거다. 이번에는 검은색 크레파스를 손에 쥔다. 한쪽 끄트머리부터 시작해서 총천연색 위에 암흑을 덧입힌다. 자동차 와이퍼 같은 손동작을 무한히 반복하면 스케치북에 온통 어둠이 내린다. 이제 본격적으로 우리의 예술 세계를 실현한다. 나무젓가락이나 이쑤시개, 점토 칼 따위로 검은색 크레파스를 긁어내며 그림을 그린다. 친구 얼굴도 좋고 강아지, 토끼, 사자도 좋다. 어린이날에 꼭 가고 싶은 놀이공원 대관람차나 청룡열차를 그려도 훌륭하다. 무엇이든 신비롭고 환상적인 세계가 펼쳐진다.



  추억 여행은 스크래치 그림이다. 초행길 서툰 여정 위에 기억을 알록달록 새긴다. 지금 이 순간이 아주 나중에도 생각날 것 같아.  또 반드시 그런 것만도 아니어서 어떤 기억은 그때는 별 것 아니었는데 희한하게 인상에 오래 남는 경우도 많다. 희로애락의 모든 감정이 기억의 하얀 여백을 채운다. 그렇게 무심한 시간이 흐른다. 뽕나무 밭이 푸른 바다로 변하는 세월이 까만 크레파스가 된다. 드문 기회에 오래전 지나온 장소와 공간을 다시 찾는다. 기억의 단초를 더듬어 망각의 어둠을 긁어내면 마침내 무지갯빛 추억이 몽환적인 별세계로 조금씩 형태를 갖춘다.


  다시 자동차를 몰아간다. 즉흥과 계획은 이율배반의 언어지만 어찌 됐든 마음먹은 대로 여정을 실행한다. 이호 해변 앞 소나무 숲 그늘에 앉아 제주 바다 북쪽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맞는다. 곽지 해수욕장은 광활한 백사장이 더없이 한가롭고 평화로웠다. 애월 카페거리는 젊은이들로 붐벼서 진정 핫 플레이스임을 실감케 했다. 협재 해수욕장으로 이동해서 좋아하는 해물 뚝배기로 늦은 점심을 때웠다. 마지막에 들른 금능 해변은 가족 단위 여행객이 많아 무척 단란한 분위기였다. 옛날 뚜벅이 배낭여행 같았으면 며칠씩 걸렸을 동선을 한 나절에 주파했다.


  협재 해변에서 뜻밖에 마주한 광경을 곱씹는다. 주차장 빈자리가 없어 빙빙 돌던 참이었다. 장애인 주차구역에 승합차 한 대가 와 선다. 먼저 내린 사람들이 조수석 뒤 미닫이문을 연다. 짐칸에서 내려 펼친 휠체어 위로 중노년의 여성을 조심스럽게 옮긴다. 몸이 많이 편치 않으시구나, 알아차린 이유는 이런 날씨에 목도리를 두툼하게 둘렀기 때문만은 아니다. 복잡한 의료장비로부터 뻗어 나온 줄이 옷 안으로 이어져 있었다. 사람들 많은 해변까지 나아가지 못하고 멀리서 바다를 바라보다 얼마 안 있어 철수하는 것까지 보았다. 쇠약한 그녀에게는 또 어떤 잊지 못할 추억이 이곳 제주 바다에 있던 것일까.


  아내와 아이를 데리러 간다. 늦으면 두 모녀가 잔뜩 싫은 소리를 늘어놓을 것이다. 서둘러 가자. 2022년 여름의 제주는 나와 나의 가족에게 어떤 추억으로 남을까. 이제부터 덧입혀질 세월의 검정 크레파스는 미래 언제 어떤 기회에 긁어서 그림으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바라건대 젊고 어린 날의 우리 세 식구가 각자의 기억 속에 별처럼 반짝이던 시간으로 추억되길.


매거진의 이전글 제주도 사는 엄마 고양이의 모성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