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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on Sep 07. 2022

라운지 음악이 처연하게 들리는 것은

  라운지 음악이라는 대중음악의 갈래가 있다. 말 그대로 호텔 라운지나 로비에서 들릴 듯 말 듯 잔잔하게 흐르는 음악을 말한다. 편안하게 감상할 수 있다는 뜻에서 음악계에선 ‘이지 리스닝(Easy listening)’ 성향의 음악으로 분류한다. 1950년대와 60년대 유행한 재즈나 라틴음악을 오늘날 서양 호텔이나 카지노에 있는 휴게실에서 많이 쓰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단다. 사실상 특별한 장르를 지칭하는 낱말은 아니다. 지금에 와선 라운지에서 자주 트는 다양한 음악을 망라하는 개념이 됐다.


  라운지 음악의 미덕은 분명하다. 자칫 썰렁할 수 있는 텅 빈 공간을 채운다. 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대도 상관없다. 연주는 계속된다. 끊기면 안 된다. 사람이 있는 때에는 더욱 엄격한 규율을 따른다. 대화를 방해해선 안 된다. 말 사이의 여백을 도드라지지 않을 정도로만 메운다. 소리가 너무 커도 연주가 지나치게 현란해서도 곤란하다. 공연히 존재감을 드러내 이목을 끄는 것은 금기다. 있는 듯 없는 듯 공기처럼만 있어야 한다. 무지한 누군가는 백색 소음과 동일시한다.


  나는 라운지 음악이 처연하다. 존재의 은닉이라는 필생의 임무는 나에게는 실패다. 나는 그것이 선명하게 들린다. 이따금 애달파 처량하고 슬프게 말이다. 말씀들 편안하게 나누세요, 저기 겸손하게 흐르는 선율도 다름 아닌 사람이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단 한 사람, 겨우 몇 사람도 아니게 여러 사람의 노고가 수반된 결과다. 잘은 모르겠지만 저 피아노, 트럼펫, 색소폰 연주자는 일생을 바쳐 기량을 연마했을 것이다. 아마추어의 흥미를 넘어 본격적으로 음악을 공부한 이들일 테다. 어디 연주자만 그러한가. 그들의 연주를 티끌만 한 잡음 없이 현장 그대로 음반에 담아낸 엔지니어들은 또 얼마나 대단한가. 라운지 음악을 들으면 나는 일생을 건 이들의 생생한 녹음 현장이 보인다.


  그러나 그것이 주제넘은 동정이나 연민이냐면 단연코 아니다. 모든 생업의 현장은 위대하다. 연주자들은 그날의 녹음 말고도 여러 상황과 공간에서 연주하며 벌이 할 것이다. 큰 단체나 작은 그룹에 소속된 이도 있겠고 프리랜서로서 자유롭게 활동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다. 꽉 찬 객석 앞 무대에서, 특별한 어떤 날을 기념하고 축하하는 자리에서, 사랑하는 이들이 모인 날 한 귀퉁이에서, 음악이 필요한 곳은 얼마든지 있다. 이 날은 연기처럼 흩어질 소리를 영원히 붙잡아두기 위해 여러 음악인들이 모였다. 그것이 호텔이나 레스토랑에서 쓰일 용도가 처음부터 있었는지는 나로서는 알 수 없다. 어찌 됐든 먹고살기 위해 애쓰는 현장은 그것 자체로 숭고하다.


  ‘이지 리스닝’이란 말은 잔혹하다. 듣기에 쉬워도 연주하기에 간단한 음악은 세상에 없다. 뭇사람들의 편안한 청취를 위해 연주자는 더 없는 불편을 감내한다. 그가 한 번의 까다로운 음계를 막힘없이 소리로 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자신과 겨루었을지 나는 짐작조차 포기하련다. 마부작침과 수적천석의 지난한 과정이었을 것이 틀림없어서 나는 그것을 ‘편하게’ 듣지 못한다. 이지 리스닝의 속말은 ‘하드 투 플레이(Hard to play)’가 돼야 마땅하다.


  오랜 벗들이 오랜만에 모인 자리에 라운지 음악이 흐른다. 그것을 의식하는 사람은 오늘도 내가 유일하다. 두런두런 이야기 나누면서 한쪽 귀는 선율의 진원을 좇는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까딱거린다. 아무도 몰래 마음속으로 박수갈채를 보낸다. 브라보! 오늘 연주도 완벽했어요, 이름 모를 음악가님. 당신은 오늘 또 어떤 곳에서 부단한 정진의 결과를 들려주고 있나요. 당신의 풍요로운 음악 인생을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당신이 짐작도 못할 어떤 곳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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