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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on Sep 13. 2022

도대체 여기가 어느 전철역이냐고요?!

  일 잔 부딪치다 시간이 늦었다. 오늘도 택시비 써서 귀가하면 아내가 벼락같이 화를 낼 것이다. 뛰지 않으면 전철이 끊긴다. 막차 시간이 아슬아슬하다. 개찰구를 깨부술 듯 통과한다. 승강장으로 우당탕 뛰어 내려간다. 마침 열차 문이 닫히려는 찰나다. 교각 사이를 통과하는 전투기처럼 세로로 몸을 틀어 탑승한다. 터치다운!


  모교 선배 일터 근처로 온 탓에 평소와 다른 전철 노선이다. 중간 어디쯤에서 갈아타야 하겠다. 같은 나라 사람일진대 왠지 함께 탄 승객들이 낯설다. 그것만큼이나 차창 밖 풍경도 생경하다. 환승역이 멀지 않다. 곧 내려야 한다. 그러려면 먼저 지금 어느 역으로 들어가는 건지 아는 게 순서다. 잘못 내리면 차가 끊긴다. 재도전의 기회는 없다.


  고개를 들어 객실 천정에 붙은 전광판을 찾는다. 지금 탄 열차는 그런 게 없는 기종인 것 같다. 출입문 위에 나란히 스크린 두 개가 보인다. 한쪽에선 광고 영상이 반복 재생 중이다. 다른 쪽이 전철 운행과 관련한 정보를 표기하는 용도일 테다. 노선도와 현재 위치를 알려주는 것 같긴 한데 글씨며 그림이 몹시 작다. 게다가 너무 삽시간에 지나간다. 객차 사이 문 위에도 작은 전광판이 있다. 한데 운행 정보와 무관한 내용만 하염없이 보여준다.


  이쑤시개 통 같은 전철 안에서 이리저리 움직이기가 버겁다. 승강장 벽면이나 철로 기둥 가운데 있는 역명 표지판은 멈춰야 비로소 보인다. 이러면 눈치작전이다. 승강장 전경의 인상으로 어느 역인지 가늠한다. 양방향으로 열차가 멈추는 곳인지 아닌지, 계단이나 에스컬레이터, 엘리베이터 위치 따위를 추리에 활용한다. 매일 오가는 길이 아니어서 이 역이 저 역 같다. 만원 승객들 목소리에 안내 방송이 묻힌다. 어디가 어딘지 도통 모르겠다.


  북새통에도 사람들은 잘만 타고 내린다. 표정에 여유가 넘친다. 척 보면 어느 역인지 모두 아는 사람들이구나. 공연한 소외감이 엄습한다. 초행길인 사람도 알 수 있게 해 줘야지. 내가 탄 열차가 어디로 향하는지, 지금 어디쯤 지나고 있는지 직관적으로 말이다. 객실이 붐비든 아니든, 스크린이 멀든 가깝든 잘 보이는 데에서 항시 보여줘야 할 것 아닌가. 서울 토박이인 내가 이럴진대 다른 지역 출신 같으면 얼마나 당혹스럽겠나. 외국인?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비슷한 경험이 드물지 않다. 열차 밖에서도 상황은 유효하다. 아까는 일단 올라타고 본 거다. 촌각을 다투는데 승강장으로 열차가 들어온다. 아뿔싸, 안내 음성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종착역이 어디냐가 관건이다. 전광판은 ‘열차가 곧 도착합니다’, ‘열차가 곧 출발합니다’ 따위의 하나마나한 내용만 보여준다. 열차 옆구리에 조그맣게 행선지가 쓰여 있다. 암만 보려고 해도 내 동체시력이 권투 선수의 그것일 순 없다. 위치부터가 절묘해서 스크린 도어 위 문틀이 딱 가린다. 에라 모르겠다, 하고 타면 방금 그 지경이 되기 일쑤다.


  전철이 끊기면 최후의 수단으로 심야 광역버스를 이용한다. 경험이 없던 나로서는 처음엔 정차 위치도 찾지 못했다. 길게 늘어선 대기 줄이 굽이굽이 몇 가닥이다. 그중 어느 끝에 서야 우리 집 가는 버스를 탈 수 있는지, 정류장 어둑한 표지판은 친절히 알려주지 않았다. 자기들끼리만 여유로운 전철 승객들, 그들은 표정인 이들이 거기에도 많았다.


  초심자에게 무관대한 세상이 아니길 원한다. 뭐든 아는 사람만, 해본 사람만, 가본 사람에게만 유리한 것은 온당치 않다. 그들만의 리그가 전철 안, 버스 정류장에있는 것도 아니다. 어느 희극인이 콩트 대사로 얘기했듯 “아니, X발 경력직만 뽑으면 나 같은 신입은 어디에서 경력을 쌓나.”가 기업 면접장에서만 엿보는 부조리일까. 사회에 크고 작은, 넓거나 좁은 곳곳에서 다시 살펴보자. 초심자에게 인색해지지 말자. 초행길 나선 사람의 시선에서 사유하고 대비하자. 능력과 권한 있는 분들께서 살펴 주시라. 우리가 어디로 가는 건지, 지금 어디쯤 와 있는 것인지 한눈에 알 수 있게 해 달라.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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