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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on Oct 06. 2022

비즈니스맨의 자세

  모교 동기 여럿이 모인 톡방이 오랜만에 분주하다. 심드렁하게 훑었는데 아무래도 나에 대한 호출 같다. 내가 일하는 방송사에서 금명간 일반 시민이 참가하는 큰 스포츠 행사를 주최한다. 친구 하나가 거기 신청서를 접수한 모양이다. 행사 말미에 초대 가수 공연도 으레 있어 왔다. 친구는 이번에는 어떤 가수가 오는지 궁금하단다. 동기의 의리를 명분으로 오지랖이 작동한다. 저기 손 뻗치는데 잡아주지 못할쏘냐.


  막상 알아보려니 실마리가 단번에 잡히지 않는다. 이런 건 누구한테 물어봐야 하더라. 딱 떠오르는 사람이 없다. 지금 내 업무와 큰 연관성이 있지도 않다. 한두 다리 걸쳐서라도 물어보면 좋겠는데 그럴 인물도 짐작 가지 않는다. 회사 오래 다니면 뭐하냐. 인맥이 이리 성긴데. 사소한 일에 목숨 거는 게 나란 인간이다. 오기가 발동한다. 내가 이거 알아내고야 만다.


  사람이 찾아지지 않으면 그것보다 큰 그림으로 일의 얼개를 추적한다. 부대사업에 관련한 것이므로 콘텐츠 생산에 직접 관계된 부서는 아니다. 높은 확률로 사업본부 내의 어떤 팀일 것이다. 한데 행사 영업 분야로도 취급할 수 있으므로 마케팅 본부일 가능성도 있다. 회사 전산망에 조직도를 살핀다. 사업본부를 두 번 클릭하니 상세 부서가 잔가지처럼 펼쳐진다. 마침 스포츠 이벤트 기획팀이 있다. 가만 생각하니 아주 오래전, 어림잡아도 오륙 년 전에 이쪽 부서와 함께 일한 기억이 있다. 그래, 그 팀에 일처리 매끄럽고 성격 아싸리한 과장이 한 분 계셨는데.


  부서원 명단 중에 낯익은 이름이 있고 귀퉁이에 첨부된 작은 사진으로 구면임을 확신한다. 엇, 이 분 아직 계시는구나. 직급 란에 차장이라고 쓰였다. 하긴 지나온 세월이 얼마인데 승진한 것도 당연하지. 유능한 조직원이니 시점도 늦지 않았을 것이다. 이 양반이라면 어쩌면 알 것도 같은데 어떻게 말을 꺼낸담. 22년 현재 유관부서에서 협업하는 사이도 아닌 것을. 일단 오래전 친분으로 시간의 장벽을 허물어야 할 것 같은데 누구신지.. 이러면 어쩌지. 그런 것과 상관없이 전화를 받아줬다고 쳐도 이상하고 사소한 거 물어본다고 의아해하면 나는 또 얼마나 민망할까. 누군지 모르겠다고 하든 모르는 내용이라고 하든, 아니면 알려줄 수 없다고 하든, 그 어떤 대답에도 나는 얼른 숨고 싶어 질지 모른다.


  연락처로 등록해놓은 휴대전화 번호를 누른다. 오, 내 전화기에 이미 저장한 번호다. 같은 이름에 직급만 옛날 과장으로 뜬다. 대단한 내부 정보랄 것도 없으니까. 입술을 앙 다물고 송신 버튼을 누른다. 뚜루루루, 뚜루루루. 신호가 간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아이고, 피디님 오랜만이네요. 안녕하세요?” 내가 누군지 안다고? 날 기억한다고? 그의 휴대전화에도 내 번호가 들어있던 건 확실하다. “예, 과장님, 아니 차장님 안녕하세요, 저 예전에 어떤 대회였더라, 스포츠 중계방송 때문에 연락도 드리고 며칠 출장지에서도 뵀었던 Hoon입니다. 기억하실는지요?” 지체 없는 응답이 돌아온다. “아휴, 물론이죠. 알다마다요. 무탈하게 지내시죠?” 나도 얼른 말을 는다. “예, 그럭저럭 회사 잘 다니고 있습니다. 차장님도 그러실 줄로 믿고, 다름이 아니오라 업무 중에 바쁘실 텐데 뜬금없이 사소한 것 하나 여쭤보려고요. 차장님께서는 아실만 한 내용일 것 같아서요.”


  뜻밖에 장애물이랄 게 전혀 없는 통화가 되었다. 번지수를 제대로 찾았다. 가수가 혹시 오느냐, 온다면 누구인지 여쭤 봐도 되느냐 물었다. 무슨 연유로 묻는 것일지 궁금할 것 같았다. 업무와 관계된 것은 아니고 사적 친분 때문에 구태여 알아보던 참이라고 미리 덧붙였다. 한가한 사람이라고 여겨도 하는 수 없었다. 한데 전혀 그런 내색 없이 너무나 상냥했다. 아, 그러시냐, 이번에는 가수 아무개를 섭외했노라 알려주었다. 말씀 감사하다, 몇 년 만에 맥락 없이 전화한, 겨우 일 때문에 잠깐 관계 맺은 직원한테도 반갑게 기척해주셔서 정말 고맙다, 언젠가 직접 얼굴 뵙고 인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로 통화를 마쳤다. 아주 빈말이나 인사치레는 아니었다.


  와, 그는 고수다. 윗길로 다니는 사람이다. 통화 전 내 걱정이 무색하게 너무나 반갑고 상냥하게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혹은 아무개입니다, 하며 관등성명을 밝히는 것도 아니고 오, 당신이군요, 당신인 줄 진즉에 알고 있었지요, 반색한다. 그러고는 별일 없이 잘 지냈느냐 묻는다. 음성만 들어서는 마치 바로 엊그제 거하게 술자리 나눴던 이에게 해장은 했느냐 살피는 느낌이다. 상냥하고 친근하기가 이를 데 없다. 천일의 절연을 단번에 무력하게 하는 말씨다. 갑자기 전화를 걸어와서는 영양가도 없는 걸 물었는데 일절 성가셔하는 내색이 없다. 마침 자기가 도움을 줄 수 있어서 다행이라며 나온다. 고맙고 미안한 사람은 나인 것을 나보다 더 허리를 숙인다. 무엇보다 기분 좋았던 것은 그것들이 요만큼의 마음도 없이 기술적으로만 시도되어서 기계 장치의 서늘한 느낌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내 마음을 겨우 일이 분만에 훈훈하게 덥혀 놓았다.


  준비된 비즈니스맨과의 통화는 의미 있는 여운을 남겼다. 심지어 나는 그의 생업과 직접 닿아있지도 않은, 그러니까 비즈니스의 대상도 아니다. 그 정도인 사람과의 소통도 이럴진대 진심으로 임하는 자리에서 그가 얼마나 빛날지는 어려운 상상이 필요 없었다. 감히 말하자면, 안 그래도 훌륭했던 비즈니스 자원이 한층 업그레이드됐다. 모르는 사이 더 깊은 맛이 생겼다고나 할까. 반면 한심한 하수인 나는 그동안 일터에서 어떠했는가. 툭하면 날 세우고 꺼칠하게 굴고. 누가 공격이라도 해올까 잔뜩 가드부터 올리고. 사람의 마음을 얻기는커녕 몇 없는 조력자도 몰아낸 건 아닌지 지난날이 빠르게 감기로 지나갔다.


  동기 대화방에 어렵게 알아낸 것을 답으로 달았다. 네 친구가 사소한 정보의 파편을 얻기 위해 어떤 용기를 무릅썼는지, 그 여정에서 누구와 오랜만에 음성으로 해후하게 됐는지 녀석은 아는지 모르는지. 덕분에 유쾌한 일과를 보낼 수 있었다. 나도 따뜻하고 상냥한 능력자를 닮아 아주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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