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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on Oct 11. 2022

그녀는 미스터리 쇼퍼

  아내의 직장은 식료품 유통회사다. 기업이나 학교, 단체 등에 식자재를 공급하고 큰 마트를 운영한다. 아내는 본사의 마케팅 부서에서 일한다. 부부가 여러 해를 같이 살면 배우자가 다니는 직장의 명예 사원쯤이 된다. 아내는 방송사에서 일하는 사정을 어지간한 초급 피디나 작가 수준 이상으로 이해한다. 반대로 나는 식품 유통업계의 형편에 대해 그렇다. 직장의 그늘에 대해 얘기할 때 영원히 뒷말 나는 것을 염려하지 않아도 되는 동료를 적어도 한 명씩 가진 셈이다.


  아내 회사에서 자사 마트를 대상으로 사내 ‘미스터리 쇼퍼’ 제도를 개시했다. 공지의 사실이지만 미스터리 쇼퍼는 신분을 숨긴 채 식당이나 점포를 돌며 서비스와 품질을 평가하는 사람을 말한다. 아내 회사의 마트가 경쟁사에 비해 부족한 부분을 진단하고 개선하자는 취지에서 도입했다. 직원 중에서 지원 신청을 받았고 아내도 선발되었다.


  주말, 덕분에 나도 아내의 암행에 동행하게 됐다. 오빠도 뭐 눈에 보이는 것 있으면 귀띔해줘. 어, 그러지 뭐. 어물쩍 대답은 했다만 잘 모르겠다. 말하자면 흠결을 잡아내라는 건데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 우리 식구 생계의 소중한 한 축이 되는 아내 회사에서 운영하는 곳이다. 애정 어린 눈으로 보면 이해가 가지 않을 게 없을 것 같다. 한데 고통 없는 성장은 없다. 맹목적 추종자보다 비판적 지지자가 조직의 성과를 이끈다. 아내만큼, 어쩌면 아내보다 아내의 직장을 아끼는 마음으로 눈에 띄는 오류를 찾아내 보기로 한다.


  그런 마음으로 카트를 밀려니 자못 비장한 자세가 된다. 공연히 손잡이에 힘이 들어가고 눈매가 매서워진다. 미래에서 온 터미네이터가 인간 지도자를 찾아내듯, 회전 버튼을 누른 선풍기 머리처럼 고개와 시야가 작동한다. 앗, 이러면 더 눈에 띄려나. 도드라지지 않은 행색이 모름지기 암행어사의 덕목. 애써 마음을 진정하고 최대한 전과 다름없이 행동한다.


  입장이 달라지니 눈에 들어오는 것도 다르다. 자세한 건 마트를 빠져나간 다음 아내와 논의하면 된다. 일단 머릿속에 순번을 매겨 저장한다. 바닥과 벽에 홍보 전단지를 붙였다 미처 못 지운 스티커 자국이 남았군. 지저분하게 보이게스리. 저기 상자를 나르는 남자 직원은 유니폼 조끼를 벗었고. 손님인 건지 스태프인 건지 프로페셔널하지 못하잖아. 어라, 저 직원 아주머니는 구석에서 몰래 휴대전화를 받으시네, 개인적인 용무는 휴식 시간에 하셔야죠. 정육 코너에 양념 돼지갈비 담아놓은 용기에는 뚜껑이 없군. 저러다 파리라도 앉으면 어쩌려고. 계산대에서도 주차 등록 안내가 없으면 쓰나. 모르는 손님이면 나갈 때 차단기 앞에서 우왕좌왕하지.


  단발성 이벤트가 아니어서 기간마다 그곳 마트를 찾는다. 다시 왔을 때 아내가 회사에 개선 요망사항으로 적어 냈던 것들이 얼마나 달라져 있을지 궁금했다. 오, 웬걸. 확실히 조치가 됐다. 직원들 모두 정갈하게 유니폼을 갖추어 입었다. 시야 밖에서 개인행동을 하는 사람도 없다. 바닥과 벽도 말끔해졌다. 양념 돼지갈비 용기에 드디어 어설픈 비닐이 아니라 제대로 여닫을 수 있는 뚜껑이 생겼다. 매장 곳곳에 주차 등록에 관한 안내문이 붙었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이 복잡하고 어지러웠던 매장 입구가 깔끔하게 정리되었다. 모먼트 오브 트루스(Moment of truth), 마트에 입장하는 순간이 바로 그것이고 이른바 고객과 서비스가 처음 만나는 지점이다. 한데 종전까지는 입구에 쌓인 재고품, 정돈되지 않은 카트가 너저분한 인상을 주었다. 지나가다가도 매장에 들어가 보고 싶은 충동을 일으켜야 할진대 초입이 저러니 저 안쪽은 안 봐도 빤하겠네, 손님이 마구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았다. 바로 그것이 개선됐다. 고객의 동선까지 정돈돼서 오늘따라 손님들이 매장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다. 과장하면 마트 인상 자체가 달라졌다.


  보람이 있다. 뜻밖에 성취감이 든다. 물론 이 모든 사소하거나 중대한 변화가 램프의 요정이 들어준 소원처럼 ‘펑’ 하고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안다. 본사로부터 미스터리 쇼퍼 제도와 관련한 피드백을 받는다. 예상은 했지만 싫은 소리가 잔뜩 쓰여 있다. 점장은 휘하에 중간 관리자를 불러 지적사항에 대한 조치를 당부한다. 관리자는 일선 직원들을 소집해 작업을 촉구한다. 귀찮고 성가시고 도무지 내키지 않지만 일단 하라면 한다. 그것이 남의 돈 버는 모든 직장인의 속성. 비지땀 흘려가며 하나하나 바꾸었더니 전보다 보기에 좋고 체계도 잡힌 것 같네, 작은 성취감이라도 마트 직원님들이 먼저 느끼셨기를 바란다. 노고에 감사드린다.


  심리적 보상은 행동을 강화한다. 이번에는 매장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안쪽 벽에 신경이 쓰인다. 마트 이름이 인쇄된 간단한 양식의 용지가 옆으로 길게 붙었다. 시선을 끌지 않는 것에 부러 천착한다. 사진이나 그림은 없이 검은색 글씨만 쓰여 있다. 뭔가 하고 보니 ‘전단지 할인 상품’이라는 제목으로 각종 식재료 품목이 늘비하다. 문제는 한눈에 들어오지 않고 가독성이 떨어진다는 점이다. 손님들 보라고 붙인 건데 애먼 엘리베이터만 어지럽다. 정보 제공의 기능은 취약하다. 기왕에 할 것이라면 글자 말고 사진이나 그림으로 시선을 단번에 붙잡아야 맞다.


  부인, 이것도 적어서 내면 어때? 아내가 곤란한 표정을 짓는다. “이게 전 지점이 같이 하는 거면 본사 디자이너가 맡아서 해주면 좋은데 개별 매장에서 하는 거면 인력이 없을 수도 있거든.” 그렇지, 그럴 수도 있지. 업무 현실을 너무 모르는 소리일 수도 있겠지, 얼른 말을 바꿔 맞장구친다. “근데, 그래도 쓰는 게 맞겠다. 엄연히 개선의 여지가 있는 것이면 일단 회사가 알고는 있어야지. 해법도 회사가 찾으면 되니까 내가 미리 걸러낼 필요는 없지 뭐.” 지당한 말씀이다. 당장에 못하는 일이라고 외면하거나 덮어두기만 하면 안 된다. 일단 꼼꼼하게 모은 다음 그중에서 당장 처리해야 하는 것과 시간을 두고 해결해야 할 것을 구분하면 될 일이다. 우선순위에 따른 자원의 안배, 그것이 본사의 몫이다.


  아내 회사에는 비전이 있다. 고객 만족을 위한 의미 있는 제도를 도입하고 그것을 충실히 실행한다. 사람이 빵으로만 살 수 없듯 직장인도 월급으로만 회사에 다니지 않는다. 당장 내 손에 쥐어주는 게 내 생활을 대단히 넉넉하게 만들어 주지 않지만 내가 하는 일이 무의미한 것이 아님을 일깨워주기만 해도 회사원은 그런 낙으로 회사엘 다닌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각자의 당분간은. 이제 내가 지켜볼 것은 아내와 같은 충성적인 미스터리 쇼퍼들과 그 무람없는 지적을 더 충성심 있게 보완해 낸 일선 매장 직원들에게 마땅한 보상이 돌아가느냐다. 제도의 도입과 확산, 실행과 관리, 피드백과 보상까지 온전한 선순환 구조를 구축하리라 믿는다. 그곳 마트에 손님이 차고 넘쳐서 팔 물건이 동나는 날이 언제고 꼭 닥쳐오면 좋겠다. 아내 회사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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