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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on Jan 04. 2023

네가 왜 거기서 나와

  세상엔 물리적 인과로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있다. 나는 미신을 믿거나 신점을 보지 않는다. 그러나 절대자의 존재를 믿는다. 아무 때 아무 데가 아닐 뿐, 초자연의 힘은 스스로 마음먹은 순간 둔중하게 기척한다. 어쩌면 인간의 인지 영역 밖에서 지금도 분주히 움직이고 있는지 모른다.


  가족들과 베트남 여행을 다녀왔다. 이틀째 점심, 식당을 수배한다. 인터넷으로 검색한 맛집은 대기 줄이 벌써부터 길다. 이것도 시차 적응의 과정일까. 현지 시간 열두 시 반, 한국이었으면 두시가 넘었다. 끼니때가 한참 지났다. 줄 서서 기다릴 여유가 없다. 차라리 적당히 다른 데로 기다리지 말고 들어가자, 마침 저 집 괜찮겠네, 그림으로 된 메뉴판도 있고.


  유명 식당도 좋지만 내가 찾아낸 맛집도 큰 기쁨이다. 며칠 있으면 그새 한국 음식이 그립겠지만 아직은 현지 식단이 이채롭다. 베트남식 부침개 ‘반쎄오’와 매운 해산물 비빔국수, 영어로 ‘모닝글로리’라고 부르는 공심채 볶음 따위를 주문했다. 맛나고 저렴했다. 고국에선 보잘것없는 월급일지언정 여기서 살면 나름 호의호식할 수 있겠다, 허튼 공상을 하며 계산을 치렀다.


  씬 깜언! 겨우 외워둔 베트남어 감사 인사로 식당을 나선다. 그때 척 봐도 한국인인 가족 관광객이 어깨를 스치며 들어간다. 초등생쯤 되는 사내아이 둘이 우당탕탕 뛰어 들어간다. 그 뒤로 애들 어머니가 “뛰지 마!” 외치며 뒤따른다. 아비로 보이는 내 또래 사내가 휴대전화를 만지며 마지막으로 입장한다. 여기도 나름 맛집인가 싶은 찰나, 그 집 아빠 뒤통수가 왠지 낯익다. 에이, 아니겠지, 아닐 거야. 여기가 어디라고 그 친구를 여기서 만나. 사고는 그렇게 흐르는데 시선은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지금 요 몇 초 잠깐의 상황이 지나면 영영 기회가 없을 것이다. 결심을 굳혀 이름을 부른다. 다른 사람이면 뭐 대꾸하지 않겠지. “D야!”


  “엇, Hoon 병장님, Hoon이 형! 여기 어쩐 일이세요, 어떻게 여기서 만나네요!” 맞았다. 맞는 사람이었다. 내 눈썰미는 쌩쌩한 현역이다. D가 누구냐면, 그러니까 방금 들어간 단란한 네 식구의 가장인 중년 사내는 바로 내 군대 후임병이다. 아니지, 이십 년도 더 된 일이니까 후임병이었다, 라고 말하는 게 정확한 시제 표현이다. “이야, 정말 너랑 나랑 뭔가 신기한 인연이 있나 보다. 여긴 언제 들어왔어?” 말하며 둘이 와락 안았다. D가 방금 뛰어 들어가 막 의자에 앉은 사내아이들과 아내를 부른다. 나도 딸아이와 아이 엄마를 불러 세워 두 가족이 급하게 인사를 주고받았다. 우리 세 식구보다 하루 먼저 왔단다. 며칠 더 머무를 텐데, 이렇게 된 거 있는 동안 어느 저녁에 만나서 식사라도 하잔다. 그래, 좋지, 메신저로 연락할 테니까 우선 들어가서 식사해라, 제수씨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우리 아들들 다음에 또 보자, 딸 너도 아저씨한테 인사해야지, 뜻밖의 해후를 마무리했다.


  와 어떻게 여기서 만나냐, 아내와 같은 말을 거푸 주고받았다. 서울 시내 어디도 아니고, 바다 건너 한참 먼 곳에서, 그것도 한국 사람들 많이 찾는 빤한 식당도 아닌 데에서. 신기하고 기묘했다. 더 소름이 끼치는 건 그게 다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송곳과 송곳 끝의 만남인 것 같은 방금 전 상황이 어쩌면 예비된, 예견된 일인 것 같았다.


  그날 아침 조식 뷔페를 먹고 객실로 돌아와 다시 침대로 몸을 던졌었다. 잠든 건 아니고 눈만 감은 채 있는데, 왜 그럴 때 있지 않은가. 밑도 끝도 없이, 맥락 없이 누군가 생각날 때. 군대 후임병 D가 떠올랐다. ‘그래, 연락 닿은 지 오래된 사람 가운데 D도 있었지. 잘 살고 있으려나. 예전에 회사 옳기네 마네 했던 것 같은데. 우리 딸보다 조금 어린, 아들만 둘 있었지 아마. 많이 컸겠네. 제수씨랑 사이는 여전히 좋겠지.’하는 생각이 뜬금없이 꼬리를 물었다. 되짚어 보면 이런 의식의 흐름도 있었던 듯하다. 일상을 벗어나 외떨어진 타국에 왔다, 이런 데서 아는 사람이라도 만나면 얼마나 반가울까, 가만 이렇게 어디 놀러 갔다가 우연히 마주친 사람 중에 D도 있었지, 거기에서 출발한 사고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더라도 엇비슷한 인연 중에 왜 하필 D가 퍼뜩 생각난 건지 현실 세계의 물리 법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일이다. 또 그렇게 떠올려본 사람과 몇 시간 후 전혀 뜻밖에 장소에서 실제 마주칠 확률은 초미시의 세계에 맞닿은 일일 것으로 짐작한다.


  말한 대로 D와는 전에도 오늘 같은 일이 있었다. 그때는 지금처럼 외국은 아니었고 대한민국 어느 유원지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다. 그날도 지금처럼 우연히 조우했고 그때는 두 집 아이들이 지금보다 한참 어렸다. 아이들이 많이 자랐다. 그러고 보니 D도 제법 나이가 보인다. 몇 년 전 그때보다 살이 많이 붙었고 배도 좀 나온 것 같다. 웃는 얼굴에 주름이 선명하다. 그래, 아이들이 자란 만큼 우리는 늙었겠지. 처자식 벌어 먹이느라 세월의 기록이 이곳저곳에 남았구나 너도, 그리고 나도.


  그래서 여행지에서 둘이 만나 베트남 사이공 맥주 따른 술잔이라도 부딪쳤느냐. 그러지 않았다. 마음만 같아서는 밤새 추억 속 군 생활 얘기하며 Hoon 병장, D 상병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퇴근길 서울 어느 선술집 골목에서 만나 간단히 회포 푸는 것이면 몰라도 큰맘 먹고 돈 내고 시간 들여 가족 동반으로 떠나온 자리다. 중년 사내 둘이야 까까머리 군바리 시절 얘기로 즐거울지 모르지만 지체 높으신 어부인들과 생때같은 자식들은 자칫 어색하고 지루할 수 있겠구나 싶었다. 일단은 D도 나도 가정에 충실히. 후일을 도모하는 게 어질고 현명한 처신일 것 같았다.


  나의 초능력은 아닐 테고 믿는 바대로 절대자의 권능일 것으로 안다. 누구에게서 온 것이든 그런 힘이 정말로 있는 것이라면 이제부터 옛 인연들을 더 열심히 추억해보려고 한다. 혹시 또 모르잖은가. 이번에는 백방으로 수소문해도 찾을 수 없었던 국민학교 동창 L, 곤경에 처할 때마다 나타나 내 편이 돼주었던 그 친구를 지구 반대편에서라도 만날 수 있을지. 그러려면 내가 또 이역만리에 가있어야 한단 얘긴데. 틈만 나면 일탈을 꿈꾼다. 그게 나다. 철없고 서투른 내가 벌이하며 처자식 건사할 수 있다는 것, 그것부터가 초자연 현상이다. 신기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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