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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on Feb 01. 2023

로다주 형이요? 제가 얘기해 볼 게요

  CP. 치프 프로듀서(Chief producer), 책임 피디. 그러니까 팀장급 피디들과 팀장급 카메라 감독, 영상과 음향 등 방송기술 엔지니어, 종합편집 감독에 조명 감독까지. 방송 프로그램 제작 현업과 직접 관계된 여러 부서의 구성원들이 대회의실에 모였다. 이 정도면 어벤저스 어셈블이다. 우리 방송사의 전반적인 방송 서비스 품질에 대해 진단하고 조금씩이라도 개선해 보자는 게 모임의 취지다. 외계 행성에서 온 덩지 큰 보라색 민머리 악당을 물리치는 것만큼이나 거대한 의제다.


  두 시간이 넘는 마라톤 회의다. 통창을 활짝 열어 환기하고 싶다. 십여 명의 어른들이 뿜어내는 이산화탄소가 정신을 아득케 한다. 이제나 끝나려나, 아니면 저제나. 장시간 회의는 영 내 취향과 멀다. 내가 좌장이었다면, 그래서 전권이 있었다면 길어야 삼십 분을 넘기지 않을 테다. 각자 소임 분야의 안건을 콤팩트하게 공유하고 신속하게 의사를 결정한다. 이 자리에서 결론 낼 수 없는 것은 따로 정리해서 다음 기회를 기약한다. 방법은 간단한데 실행은 요원하다.


  걸러내도 될 말은 한 귀로 들어 흘린다. 혹여 내가 발언해야 할 수도 있는 주제만 흐름을 잡고 따라간다. 엇, 한 마디 거들 타이밍이다. 긴 시간 방청객처럼 앉아만 있다 갈 순 없다. 이건 내가 짚고 넘어가야 한다. 어디 팀인지 그 팀장 회의에 와서는 흐리멍덩하게 말 한마디 안 하고 가더라, 그런 인상을 줄 순 없다. 고생하고 수고하는 팀원 여럿을 욕보이는 일이다. 팀장이 똘똘해야 팀원들이 기죽지 않는다.


  다 좋다. 참을 수 있다. 그런데 저기 저 책임 피디 말이 방지턱처럼 자꾸 거슬린다. 자기가 연출하는 예능 프로그램 출연자를 거론하며 “지난 녹화 때 OO이가 그러더군요, @@이 형은 화면에 이렇게 나오던데요, $$ 선배한테는 제가 얘기하면 되고요.” 이런 식이다. 그냥 아무개 씨나 아무개 배우, 아무개 개그우먼이라고 하지 않는다. 성씨 없이 이름만 부르거나 형, 누나, 조금 격식을 갖춰도 선배 정도를 이름 뒤에 붙인다.


  과시하는 거다. 그가 의식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난 그렇게 느낀다. 여기 모인 많은 사람들 중에 연예인 아무개를 나처럼 편하게 이름만 부르거나 형, 누나, 동생으로 부를 수 있는 사람 없지? 원로 배우나 유명 전문직 종사자를 선배, 선생님이라고 일컬어도 되는 사람도 나뿐이잖아, 나 이런 사람이야, 내가 이 정도 되는 인물이야, 은근히 내세운다. 의식해서든 무의식 중이든 자신의 지위와 영향력, 친소 관계를 뽐내는 것이라는 생각을 회의 내내 지우지 못했다. 까끌거리는 혓바늘처럼 한 번 의식하니까 계속 마음을 어지럽혔다.


  전 직장인 방송사에는 그런 선배가 있었다. 스포츠 경기 중계 연출을 위해 그와 출장지 현장에서 중계차에 탑승하던 시절 얘기다. 그가 선임, 이른바 메인 피디이고 내가 서브, 조연출이다. 외부 관계자들과 이런저런 사안으로 방송 전에 협의할 것들이 많았다. 그는 꼭 방송을 업으로 삼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덜컥 덜컥 전문 용어를 사용했다. “말씀하신 건 스폿으로 내보낼 거고요, 온에어 중에 슈퍼 슬로모에 잡히려면 에이 보드 근처에 두셔야 해요. 중계차 스위처에는 그런 기능은 없으니까 현장에서 대마이 걸어서 찍을 거예요. 트랜지션은 저희 미술실에서 어련히 잘 만들었어요. 아, 그런 상황 생기면 스탠더드 말고 이에프피 카메라가 가면 되죠.” 이게 무슨 말이야, 진땀을 빼는 외부인들을 볼 때마다 공연히 내가 미안해졌다. 아까 메인 피디님 말씀은 이런 뜻이었습니다, 한국어를 한국어로 통역하는 것이 자연스레 내 몫이 됐다.


  배려가 없다. 연예인들과 친한 그 피디도 전 직장 메인 피디 선배도 청자를 두루 살피지 않았다. 으스대려는 의도가 없더라도 그렇게 느낄 공산이 다분하다. 듣는 이의 마음 상태를 헤아려 얘기하는 게 그렇게 어려울까. 연예인 아무개 형, 누나 할 것이 아니라 객관과 중간의 입장에서 건조하게 아무개 씨로 칭하는 게 자리의 성격에도 맞다. 나야 친분이 있지만 이 자리에 모인 여러분께서 다 그런 것은 아니니까, 자칫 젠체하는 것처럼 들릴지도 모르니까, 말 전에 감안했어야 옳다. 선배의 경우, 저희가 방송 일하면서 쓰는 용어 중에 이런 게 있습니다만 그런 건 모르셔도 되고요, 필요한 게 이것이고 계획은 저것이니까 미리 챙겨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청자의 충격을 헤아렸어야 맞다. 내가 아는 것을 세상 모두가 알지 못한다. 서로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주고받는 것, 그게 제대로 된 의사의 소통 아니겠는가.


  지구 지키는 어벤저스의 멤버로 더 이상 볼 수 없게 된 아이언맨 토니 스타크. 그를 연기한 배우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연예인 중에 단 한 사람 친분을 쌓을 수 있다면 나는 그이기를 망설이지 않겠다. 로다주 형님, 좀 더 친해지면 그냥 형. 편하게 너나들이하며 형 동생 사이로 지내는 공상을 잠시 입 안에 굴린다. 그럼에도 불구, 나는 함부로 타인 앞에서 로다주 형이라고 부르지 않겠다. 외계어 같은 방송 용어를 남발하지도 않을 것이다, 까지 사유하는데 마침내 회의가 끝난다. 아, 시원한 생맥주 당기는 오후다. 그 선배는 아직 그 방송사에서 여전한지, 전 직장 후배를 불러 술안주 삼아 물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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