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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on Feb 14. 2023

엄마의 레시피를 보존해 드립니다

  형은 주말에 집에서 음식 자주 해 드세요? 회사 후배가 묻는다. 아니, 그렇게 안 되더라고. 만들어 먹는 재룟값이나 외식비나 그게 그거더라. 아니지, 한 번 해 먹으려고 이것저것 사다 놓으면 왕창 남아서 처치곤란일 때도 많잖. 배보다 배꼽이 더 커. 막상 어디 나가기도 귀찮아서 요즘은 거의 배달시켜서 먹어.


  금요일 저녁부터 일요일 저녁까지 모두 일곱 끼니를 해결한다. 그러다 보면 배달 음식도 마침내 물린다. 어쩔 수 없이 냉장고 안에 든 것으로 이른바 집밥을 만들어 먹는다. 아내가 밥을 안치면 내가 국이며 찌개를 끓인다. 김치찌개 아니면 된장찌개, 어쩌다 콩나물국이나 소고기뭇국 정도다. 그것만으로는 너무 단출하다. 아내가 만들면 계란말이, 내가 하면 계란찜을 추가한다. 아이를 위해 소시지 야채볶음도 만든다. 찬장에서 조미김과 참치 통조림도 꺼낸다.


  이것도 질린다. 명절이 아닌 연휴, 바캉스를 마치고 여남은 여름휴가 때가 특히 고역이다. 설, 추석 같으면 모친과 장모님이 싸주신 차례 음식으로 한두 끼는 의지할 수 있다. 외부 원조 없이 배달 음식과 빤한 레퍼토리의 집밥으로만 사흘 이상을 버티기 어렵다. 애꿎은 휴대폰 배달앱을 놓지 못하고 대한민국 먹거리 문화의 한계를 원망한다. 짜장 짬뽕, 치킨 피자, 돈가스 햄버거, 족발 보쌈, 파스타 떡볶이, 초밥 모둠회 말고 어디 획기적인 거 없습니까?!


  가정식 메뉴를 늘리자. 다양화의 필요성을 절감한다. 입맛의 뿌리, 미식의 원천으로 돌아간다. 엄마 밥이다. 내가 좋아했던 것들을 떠올린다. 도시락 반찬 중에는 진미채볶음 만한 게 없었다. 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았다. 총각 시절 술 먹은 다음날에는 엄마가 잔치국수를 해줬다. 까끌거리는 밥알이 싫을 때 후루룩 넘어가는 면과 국물에 속이 금세 풀어졌다. 지금 같은 겨울, 뽀얀 속살에서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오동통한 고등어조림도 제격이다. 속까지 양념이 배서 혀끝으로도 뭉개지는 달큼한 무는 또 얼마나 맛이 있나.


  엄마한테 배우는 수밖에 없다. 미리미리. 더 늦기 전에. 인간은 필멸의 존재여서 엄마는 언젠가 우리들 곁을 떠난다. 그전에 배워둬야 한다. 물려받는 거다. 누가? 내가 해야 한다. 아내에게 “이보시오 부인, 내 긴히 부탁이 있는데 훗날 만시지탄을 통감키 전에 시어머니로부터 남편이 좋아하는 음식의 요리법을 차근차근 익혀놓는 것이 어떻겠소?”라고 운을 떼 봐야 불꽃 싸다구나 안 맞으면 다행이다. 똑같이 회사 나가는 사람한테 너무 큰 거 바라는 거 아냐? 핀잔만 살 일이다. 목마른 사슴이 우물을 찾는다. 이건 내 몫의 과제다.


  아버지의 고향은 평안북도에서도 맨 위쪽 끄트머리다. 갓난아기 때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중에 가족들과 남쪽으로 피난 왔다. 어릴 적 친할머니가 아버지에게 만들어준 음식들 중 상당수가 말하자면 이북 음식이었을 게다. 엄마는 나와 동생을 낳고 직장을 그만두었다. 요리법을 전수받자면 아주 못할 것도 없었을 터였다. 하나 고부지간이 완만하지 못했다. 엄마는 남편을 위해 숱한 시행착오를 거쳐 시어머니의 음식을 재현해 냈다. 으깬 두부를, 반달 모양으로 얇게 썬 오이절임이나 잘게 다진 김치, 깨소금에 버무린다. 북한에서 온 탓인지 암만 인터넷을 뒤져도 검색되지 않는다. 우리 집엔 그렇게 정확한 이름을 알 수 없는, 아마도 엄마가 유일한 조리 기능 보유자인 음식이 몇 가지 있다. 반려자를 향한 애정과 애증의 소산이다.


  막상 날 잡아서 모친께 배우자니 엄두가 나지 않는다. 대공사이자 장기 프로젝트가 될 견적이다. 허튼 공상이 움튼다. 이런 서비스가 있다면 얼마나 편리할까. 전화를 걸면 상담원을 연결해 준다. 촌스럽게 전화 상담이 웬 말이냐. 기왕에 있을 거 모바일 커머스와 오투오(O2O) 서비스 시대에 맞춰 애플리케이션으로 개발한다. 간판부터 올리자. 이름하여 ‘엄마의 레시피’다.


  엄마의 요리법을 영구 보존해 주는 서비스다. 애플리케이션에 접속해서 서비스를 신청한다. 멤버십 가입과 더불어 보존을 원하는 엄마 요리의 대략적인 가짓수를 입력한다. 대체로 한식일 테지만 양식과 중식, 일식, 퓨전 요리도 선택 가능하다. 정확한 요리 이름을 알면 좋고 우리 집의 경우처럼 아니어도 문제없다. 재료 이름을 나열하기만 해도 된다. 의뢰 견적을 파악하는 용도다. 여기까지 입력하면 예상 비용이 자동 계산된다. 그러면서 다음 단계에 착수할 것인지 묻는다.


  예스! 이번엔 애플리케이션의 녹음 기능을 활용한다. 스마트폰 마이크 부위를 엄마에게 들이댄다. 엄마, 내가 좋아하는 그거 있잖아, 어떻게 만드는 건지 생각나는 대로 말해 줘. 음식에 맞춰 차례대로 녹음 기능을 켰다가 끈다. 한 번에 성공하지 못해도 상관없다. 몇 번이고 다시 녹음할 수 있고 중간에 틀린 걸 지울 수도 있다. 짧은 녹음 내용을 여러 번 등록하는 것도 가능하다. 서비스 측에서 어련히 알아서 정리하고 참고할 것이다.


  카메라도 쓴다. 평소 찍어둔 사진이 있으면 바로 등록한다. 이참에 구실 삼아 엄마한테 한 번 만들어 달라 해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예쁘게 찍으려고 애쓰지 마시라. 밝은 곳에서 잘만 보이게 찍는다. 그릇에 담긴 음식 전체, 재료를 가깝게 찍은 부분 사진이 모두 있으면 더 좋다. 요리법을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된다. 오디오와 비디오를 갖추었으면 간단한 메모를 남긴다. 음식을 먹어본 사람의 관점에서 “저희 엄마 음식은 시중에 흔한 것보다 더 맵고요, 재료가 큼직해요.” 같은 설명을 덧붙인다.


  얼마간 기다리면 드디어 엄마의 레시피가 서비스 결과 메뉴에 올라온다. 활자와 사진으로 일목요연하게 정리돼서 한눈에 알아보기 좋다. 엄마가 말한 요리법을 기본으로 공백이 촘촘히 메워졌다. 엄마는 고수니까 언급하지 않았지만 몰랐으면 자칫 결과물을 망칠 뻔한 내용이다. 구하기 어려운 재료나 발효 과정처럼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것만 아니면 중간 요리과정도 사진으로 제공된다. 주방 시설을 갖춘 서비스 본사에서 내가 알려준 요리법대로 실제 만들어보았다는 뜻이다. 완성된 모양이 처음 내가 보내준 사진과 제법 비슷하다. 수정 요청이 필요한지 묻는다. 아니오, 라고 입력하면 미리 등록한 계정에서 요금이 자동 결제된다.


  여기까지는 서비스 초기 모델이다. ‘엄마의 레시피’ 서비스의 진짜 비즈니스는 이제부터다. 완성된 요리법대로 실제 조리된 음식을 주문한다. 본사가 제휴한 반찬 가게나 식품 공장에서 위생적으로 만든 음식이 집으로 냉장 배송된다. 비조리 상태를 원하면 밀키트 형태로도 받아볼 수 있다. 마냥 저렴한 건 아니지만 일일이 재료 사다 만들어 먹는 것보다는 낫다. 무엇보다 요리 꽝손인 나보다 엄마 음식을 더 충실하게 구현할 수 있다는 게 큰 이점이다. 미묘한 맛의 차이는 피드백 과정을 통해 조절할 수 있다. 두어 번 주문했더니 점점 엄마가 해준 것과 같은 맛이 돼 간다. 인공지능의 도움까지 받으면 시간도 비용도, 그래서 서비스 이용료도 가시적으로 줄어들 것이다.


  공상이 '공고한 상상'이 된다. 이쯤 되니 진짜로 이런 서비스가 세상에 나오면 좋겠다는 생각이 커진다. 이렇게 된 거, 다니던 방송사 때려치우고 본격적으로 창업 투자금 유치하러 다녀봐?! 세상의 모든 맛있는 음식은 이 세상 모든 어머니의 숫자와 같다던데, 사명감까지 무장하고 한 번 덤벼?! 아닌 게 아니라 우리 집도 회사 후배도 사정이 다르지 않다. 여기 두 집만 이런 형편일 것 같지도 않다. 알고 보면 모두 엇비슷한 세태일지 모를 일이다. 남편이든 아내든 시어머니나 친정 엄마 요리법 전수받는 집이 얼마나 될까. 이러다 세상의 모든 맛있는 음식이 그대로 멸종하면 어쩌나. 나 하나 벼락부자 되자고 이러는 거 아니다. 시대의 과제다. 자, 투자자 모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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