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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on Feb 24. 2023

무단횡단 범칙금이 너무해

  “삑삑! 지금 건너가신 분, 거기 멈추세요.”

  아이고, 오늘 저기 또 한 사람 걸렸네. 쯧쯧, 얼마나 야속할까. 몇 초만 기다리지, 그걸 못 참아서. 안 됐네, 안 됐어. 검은색 점퍼를 입은 내 또래 사내 뒤로 번쩍번쩍 경광등을 켠 경찰차가 따라붙는다. 차량에 달린 확성기로 사내를 불러 세운다. 구석으로 사냥감을 몰아놓고 느릿느릿 접근하는 육식동물과 닮았달까. 포식자에 압도된 여린 것은 이미 저항이나 도피의 의지를 잃었다.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 앞에 전철역으로 향하는 횡단보도가 있다. 아침 이른 시간이면 출근 시간에 쫓기는 주민들이 더러 인내심을 잃는다. 야음을 틈타고 사주를 경계하며 나도 몇 번 무단으로 횡단한 적이 있음을 고해한다. 마침 아직 차량 통행이 많아지지 않은 때다. 등교하는 아이들이라도 있으면 어른으로서 눈치를 살필까. 그렇지도 않아서 아직 살아있는 빨간불에 찻길로 뛰어든다. 오륙 분 간발의 차로 만원 전철이 십만원 전철도 된다. 흰소리지만 그만큼 객실 안이 붐비고 출근길 몇 분 차이가 크다는 말이다.


  방금이 처음이 아니다. 며칠 전 무심코 빨간불에 건너려다 맞은편 골목 모퉁이에 경찰차 꽁무니가 보였다. 혹시 몰라 멈칫하려니 신호가 바뀐다. 이 시간에 웬 경찰차, 하고 지나치려는데 그 앞에 중년 남성이 붙들렸다. 범칙금 몇 만 원이고요, 며칠까지 납부하셔야 합니다. 이른바 딱지가 끊기는 현장이다. 종이쪽지를 받아 든 아저씨 낯빛이 무채색이다. 평소에도 저런 안색은 아닐 것이다.


  그날부터 조심하던 차였다. 나보다 이삼십 분 먼저 출근하는 아내에게도 전파했다. 부인, 오늘 아침에 봤는데 단지 앞 횡단보도에서 무단횡단 단속 하더이다, 생돈 나가지 않게 우리 조심합시다. 그러고 엊그제 아침 골목 사이 잠복하는 경찰차를 또 만났다. 그날도 내가 못 봤다 뿐이지 현장 적발된 주민이 한둘은 더 될 듯싶다. 사실상 목 좋은 포인트여서 마음먹고 도사리면 미끼도 필요 없는 ‘물 반 고기 반’ 낚시가 될 법도 하다.


  그리고 오늘이 세 번째 목격이다. 단속도 좋지만 이건 좀 아니다 싶은 마음이 든다. 이건 오지랖일까 집요함일까 잠시 골몰한다. 스스로 인정하건대 나는 개인주의 성향이 강하다. 타인의 삶에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 나한테 직접 일어나는 일이 아니면 대체로 심드렁하다. 한데 묘하게 집요한 구석이 있다. 어지간하면 그냥 넘길 일일 텐데 도무지 그렇게 안 되는 때가 있다. 그러면 반드시 끝장을 보아야 직성이 풀린다. 오지랖과 집요함의 경계에서 갈팡질팡하다 째깍째깍 귀중한 출근 시간이 흐른다. 그래 결심했어. 휴대전화에 숫자 1을 두 번, 2를 한 번 입력하고 수화기 모양 아이콘을 누른다.


  경찰 상황실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전화기 너머 상대는 필경 제복을 입었으리라. 수고 많으십니다, 위급한 일로 전화드린 건 아니고요, 민원 상담이랄까 의견 개진이랄까 말씀을 좀 나누고 싶은데 어느 부서와 통화하면 될까요, 저는 OO동 주민 아무개입니다. 신원과 사연의 머리말 정도를 밝히니 알맞은 통화 상대를 알려준다. 말씀하신 지역 지구대에 얘기해서 민원인분께 바로 전화드리라고 하겠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수고하십시오.


  잠시 후 정말로 전화가 걸려왔다. 다시 한번 신상을 밝히고 자초지종을 풀어놓는다. 아침 이른 시간부터 성가시게 해 드려서 죄송하다, 방금 전 OO동 **아파트 앞 횡단보도 앞에서 경찰서에서 나오셔서 무단횡단 단속하시는 걸 보았다, 교통안전 도모하는 취지 당연히 모르지 않고 생활 법규 지키지 않는 사람들이 무조건 잘못한 것도 맞다, 한데 며칠 동안 출근길에 우연히 보았는데 계도 조치나 안내도 없이 곧바로 범칙금부터 부과하시는 건 가혹한 것 같다, 가뜩이나 먹고살기 힘든데 아침부터 일터로 향하는 주민이 벌금부터 떼이면 반성보다 원망과 증오가 더 크지 않겠느냐, 구두 경고를 먼저 해주시거나 현수막이라도 걸어서 단속 안내를 먼저 하는 게 순서 아닐까 싶다, 실제 이 시간이면 그쪽 로 차량 통행이 많지도 않아서 위반에 미혹되기 십상이다, 공권력 행사가 능사는 아니지 않느냐, 팍팍한 세상 생업으로 먹고사는 사람들 처지를 먼저 생각해 달라 찬찬히 피력했다.


  “그러셨군요, 맞는 말씀입니다. 저희도 아침 시간에 무단횡단 하는 사람이 많다는 신고가 있어서 얼마 전부터 단속한 것인데 그 부분까지는 미처 생각을 못했습니다. 말씀하신 점 참고해서 우선 현수막 만드는 것부터 검토하겠습니다. 전화 주셔서 감사합니다.” 수화기 너머 음성이 촉촉하고 온기 있다. 건조하고 뻣뻣한 자동응답 음성 같은 것이 아니어서 일단 마음 놓였다. 성의 있게 답변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좋은 하루 보내십시오, 큰 품 들지 않는 덕담도 곁들이며 통화를 끝냈다.


  짧은 시간, 뜻이 언어로 온전히 통한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왜 말귀를 못 알아들어, 어쩌자고 이른 시간부터 귀찮게 볼멘소리야, 하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인가. 큰 소득은 공감을 넘어 연대감까지 설핏 확인한 순간이다. 제복이냐 아니냐 정도 차이뿐이지 전화받으시는 경찰관님이나 나나 놀면서 먹지 못하고 벌어서 먹어야 하는 매한가지 근로자, 노동자 아니냐, 같은 처지에서 보시면 고단한 몸 이끌어서 겨우 직장으로 가는 첫걸음인데 옜다 벌금, 고약한 선물부터 안기는 건 너무 인정머리 없지 않으냐, 이해받은 것 같아 흡족했다.


  삶의 난이도는 죽는 순간까지 부단한 우상향인 것인지 점점 사는 게 어렵다. 다른 나라 사정은 오래 머물러 보지 못해 잘 알지 못한다. 적어도 대한민국에서의 삶은 불가역적으로 힘들어지는 게 분명하다. 태어나 이날까지 한 번도 텔레비전이며 신문에서 “올해는 작년보다 나을 것 같습니다!” 들어보지 못했다. 가스도 전기도, 기름도 라면도, 기어이 소주까지 값이 오르는데 내 월급만 레트로 감성이다. 도대체 언제 적 품삯이야. 보혈 같은 월급, 하찮은 법규 위반으로 떼이지 맙시다. 그도 그렇지만 나라님들도 팍팍한 백성들 형편 좀 살펴주셔요. 진정으로 아뢰는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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