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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on Apr 03. 2023

스트레스 해소방에 가야겠어

  신경질이 늘었다. 절필의 부작용일까. 마땅한 글감이 없었다. 오늘이 어제와 같고, 내일도 오늘과 다르지 않을 것 같았다. 험한 세상에서 그 자체가 감사한 일임을 모르지 않다. 그러나 특별한 기록으로 남길 일이 손에 남지 않았다. 절필은 결심한 것이 아니었다. 무미건조, 무색무취한 일상의 우연한 결과다.


  낡은 프린터를 새것으로 교체했다. 보통의 생애주기를 가진 프린터가 몇 년을 건강하게 작동하는지 나는 모른다. 알았더라면 좀 더 일찍 영면의 세계로 보내주었을 터다. 종이를 밀어내는 롤러의 마찰력이 한창때 같지 않았나 보다. 어쩌다 인쇄할 일이 있으면 겨우 한두 장 출력할 때마다 삐삐, 용지 걸림 신호를 보낸다. 그 상태로 한참을 더 쓰다 얼마 전 기어이 새 프린터를 장만했다. 오래 수고한 옛 프린터에 관리사무실에서 천 원 주고 구입한 스티커를 붙였다. 주말 분리수거장에서 작별을 고했다.


  새 프린터를 설치한다. 나는 문맹이 아니다. 간단한 그림은 오해 없이 이해하는 지능 정도는 갖추었다고 자신한다. 한데 프린터와 동봉된 설명서대로 실행했는데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휴대폰 플래시를 켜서 프린터 틈새를 후비고 설명서를 다시 봐도 묵묵부답이다. 포장지를 막 뜯자마자 애프터서비스를 신청해야 한단 말인가. 알만한 큰 회사에서 어쩌자고 이런 물건을 돈 받고 팔고 있는 건가. 성질이 난다.


  세 식구가 봄볕에 이끌려 캠핑장을 찾았다. 낮에 잘 놀고 저녁도 맛있게 지어먹었다. 스트리밍 서비스에 엊그제 새로 올라온 영화가 있다. 빔 프로젝터를 연결해서 텐트 안을 영화관 분위기로 꾸민다. 접이식 의자를 접어 구석에 치워두려고 하는데 철컥, 무엇에 걸렸는지 온전히 접히지 않는다. 여태 잘만 되던 게 왜 또 속을 썩이나. 텐트 천정에 달아놓은 랜턴 조명을 밝혀 의자를 정밀 조사한다. 팔걸이 경첩이 비정상적인 각도로 펼쳐져서 접을 때에도 본래 각도대로 동작하지 않는 탓이다. 이게 어쩌다 이리되었을꼬. 찬찬히 펼쳤다 다시 접어도 가방에 수납 가능한 크기로 줄어들지 않는다. 지금쯤 영화 재생 버튼을 눌렀어야 하는데 애먼 밤 시간이 흐른다. 부아가 치민다.


  하룻밤 지내고 텐트를 접는다. 캠핑 구역마다 배치된 전기 콘센트에서 코드를 뽑는다. 캠핑 철수 중 전기 릴선 거두는 게 가장 성가시다. 급한 마음처럼 마구 감았다간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전기선이 엉킨다. 물레를 돌리는 마하트마의 평정심처럼 찬찬히, 차분히 한 바퀴 한 바퀴 감아야 단정한 전기선 뭉치가 완성된다. 대자연의 한쪽 구석에 쪼그려 앉아 전기선을 감노라면 여름엔 진땀이, 겨울엔 식은땀이 목덜미를 타고 흐른다. 바로 그 악명 높은 작업을 하려는데 어디서 꼬이고 엉킨 것인지 릴선 감는 손잡이가 옴짝달싹 않는다. 하나하나 풀어내는 데만 시간이 한참을 걸릴 본새다. 그거 풀었다고 끝나는 것도 아니다. 그때부터 시작인 거다. 역정에 불이 붙는다. 다 집어치우고 확 내팽개치고 싶다.


  아휴 씨! 저도 모르게 욕이 튀어나오는 걸 “아니 왜 그렇게 화가 늘었대?!” 아내가 한 마디 한다. 아내는 군말 없이 매트리스며 침낭을 개는 참이다. 아니, 이거 오늘따라 엉켜서 속 썩이네, 순간 짜증이 확 오르잖아. 한심한 변명을 갖다 붙인다. 요새 회사에 뭔 일 있어? 뭐 때문에 스트레스가 쌓였대? 다시 물어온다. 딱히 그런 건 없는데, 사람한테 화내는 거 아니고 물건한테 성질이 나더라. 핑계에 살을 불린다. 오빠 그러는 거, 혼자 물건에 화풀이하는 것 같아도 옆에 있는 사람한테까지 영향이 와, 불편하단 말이지. 그래? 미안, 조심할게. 쏘리.


  뭐 땀시 성질이 고약해졌는가. 왜 때문에 물건에 역정을 내나. 돌아보면 그랬다. 한 해 두 해 나이를 쌓다 보니, 이제는 확실히 안다. 사람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 타인은 열에 아홉 번 나의 기대와 다르게 움직였다. 이렇게 해주겠거니, 그렇게 반응하겠거니 하는 기대가 무참히 깨어진 적이 모래알만큼 하찮고 많다. 기대는 금물이다. 기대가 없으면 상심도 없다. 엊그제 회사 팀원의 업무 실수에도 “정신을 조금 차려가면서 일해주면 좋겠다.” 짧은 한 마디만 남겼다. 여러 말해봐야 나만 피로하다. 사람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사소한 물건까지 내 맘대로 안 될 때, 그때 파괴적 에너지가 폭발한다. 사람이야 그렇다 치고, 이깟 물건 하나도 뜻대로 다루지 못하나. 내 마음과 의도대로 움직여주지 않아서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이다. 사람도 사물도, 무엇하나 내 뜻대로 하지 못하는 일상, 그 파편이 모인 인생. 자기 효능감이 형편없는 깡통 계좌가 되어 스스로를 갉아먹는다. 요사이 내가 그랬다. 어두운 기운이 방사성 에너지를 뿜기 전에 마땅한 조치가 필요하다.


  스트레스 해소방이 생각났다. 대학로에 있었다던가, 홍대 앞에 남았다던가. 돈 주고 입장하면 작은 방 안에 남은 고장 난 티브이며 전축, 가구와 잡동사니를 쇠로 된 야구 방망이로 맘껏 때려 부술 수 있는 공간이 있다고 들었다. 아직도 그런 장사의 형태가 남아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데라도 찾아 못난 울화를 희석시키면 어떨까 싶다. 그때까지는, 우선 잠시 중단했던 글짓기에 조심해서 시동을 걸어보려고 한다. 활자의 완성을 위한 컴퓨터 키보드 작동에 다행히 아직까지는 장애가 없으므로. 그것만큼은 내 뜻대로 가능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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