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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on Apr 06. 2023

직장인 점심, 그 강호의 의리

  아내가 낮에 장례식장에 다녀왔다. 밥도 못 먹고 돌아 나와서 외근을 다녔단다. 육개장 한 사발도 못 얻어먹었냐고 물었다. 일행 없이 혼자 조문 간 거여서 앉아서 먹기가 좀.. 공복의 사정이다. 뭘 그런 눈치를 보느냐, 배곯은 까닭을 애정을 담아 나무랐다. 나였으면 혼자라도 밥공기 리필에 편육이며 마른안주도 더 달라, 상조회사 직원을 못살게 굴었을 것이다. 혼자면 어떠랴. 나는 혼밥에 의연하다.


  우리 회사 구내식당은 존재 자체에 큰 의의가 있다. 비싼 서울 도심 물가에 비하면 저렴하게 점심 한 끼를 때울 수 있다. 세상에 싸고 좋은 물건은 없는 법. 먹는 것도 다르지 않아서 가격에 걸맞은 식단이 제공된다. 썩 맛있지는 않다는 말이다. 가성비도 좋지만 가심비도 무시하지 않는 젊은 직원들의 외면을 받는 것도 사실이다. 회사 건물 지하에 위치하므로 나는 그곳을 일찌감치 던전(dungeon : 중세 성 안에 있던 감옥, 온라인 게임에선 몬스터들이 모여 있는 소굴)이라 불러왔다.


  “혹시 던전 갈 사람?” 콧등 위부터 보이게 목을 세워 파티션 너머로 묻는다. 팀원 여럿 가운데 오전 사무실에는 삼십 대 초중반의 여성 팀원 둘이 업무 중이다. 구내.. 식당이요? 팀원 둘이 각각 두 음절씩 발음한다. 응, 비도 부슬부슬 오는데 간단하게 지하 내려가서 점심 먹고 올까 하고, 덧붙인다. 음.. 즉답하지 않고 팀원 둘이 서로 눈빛을 교환한다. 팀장님, 요 근처에 해물칼국수 맛있는 데가 새로 생겼다는데 거기는 어떠세요? 내가 다시 답한다. 글쎄, 날씨도 그렇고 오늘은 어디 밖으로 나가기가 꺼려지네, 난 괜찮으니까 둘이서라도 먹고 와. 둘이 서로 다시 눈빛을 주고받는다. 음, 그러시면 저희 다녀오겠습니다, 식사 맛있게 하세요, 하고 우산을 챙겨 총총히 나간다.


  사무실에 혼자 남아 구내식당이 한가해질 시간을 점쳐본다. 그러다 문득 횡격막 부근에 음습한 기운을 느낀다. 이봐, 혼밥의 달인, 아마추어 같이 왜 이래. 마음속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솔직히 좀 섭섭하네, 아마추어 같이. 목소리에게 답한다. 사람에게 기대는 금물이다. 기대는 곧 상심, 실망의 씨앗이 된다. 그런데도 좀체 프로페셔널이 못 되는 나는 또 실수한다. 팀원들에게 구내식당에 동행하겠느냐 물으면 같이 가시죠, 팀장님, 하는 답이 얼른 돌아오길 바랐다. 아마추어 같이.


  서운함의 이유를 좀 더 자세히 들어본다. 속 시원하게 얘기해 봐, 뭐가 그렇게 섭섭했는데? 내가 답한다. 실은 어제도 저 팀원 두 사람 데리고 밖에 나가서 점심밥 사줬거든. 카이센동이라나. 인당 이삼만 원 하는 꽤 비싼 메뉴였어. 그것만 시켜준 줄 알아? 곁들임으로 게살 크림 크로켓도 주문했거든. 시원한 맥주 좋아하는 취향도 알아서 그것도 추가했고. 뭐 엄밀히 법인카드로 사긴 했지. 이달 지출 한도가 조금 남았거든. 기왕이면 팀원들 맛있는 것 먹이고 싶어서. 개카든 법카든 좌우지간 내 지갑에서 나간 거잖아. 팀원들 밥이며 술 사주면서 내 용돈에서 는 때도 많아. 어제는 밖으로 나간다니까 냉큼 따라나서더니만 오늘은..


  그리고 어제 그렇게 사줬으면 됐지, 새로 생긴 식당 있다고 거기 가시는 거 어떠냐고 뭘 또 물어. 말이 그렇속뜻은 나더러 사라는  아냐. 빈말이라도 어제 맛있는 것 사주셨으니까 오늘은 저희가 낼게요, 시늉이라도 했어 봐. 기특해서라도 내가 또 사주지. 법카든 개카든 얼마든지 내지. 호이가 계속되면 둘리인 줄, 아니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고, 으레 밥 먹으면 팀장이 계산하니까 구내식당은 가기 싫고 나가서 딴 거 먹고는 싶고, 그러니까 우리랑 먹으려면 팀장님 너님이 쏘세요, 직접 말 못 하겠으니까 에둘러 “거기는 어떠세요?”라니. 팀장님 좋을 대로 하시고 저희는 나가서 먹고 싶거든요, 차마 말 꺼내기가 어려웠구나. 그래서 그렇게 하라고 했잖니.


  저 양반이 오늘은 정말 어디 안 나가고 구내식당에서 대강 한 끼 때우고 싶은가 보다, 얻어먹은 도리가 있고 의리가 있지, 혼자 터덜터덜 밥 먹으러 가게 하는 건 그래도 좀 뭣 하지, 그런 생각은 아예 없구나. 둘이서라도 다녀와, 하니까 정말로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재빨리 시야에서 사라진다. 어제 너희가 먹던 알록달록한 해산물 덮밥 줄어드는 속도보다 갑절은 빨라서 혼자 남겨진 허전함도 후식 커피 나오는 타이밍보다 느리게 엄습해 오더라.


  어쩌면 이게 그들이 정말로 원한 결과인지 모른다. 단비 같은 점심시간 그 잠깐만이라도 상급자의 그늘에서 벗어나 오롯한 자유를 누리고 싶었을 게다. 메뉴며 식단이며, 던전이며 외부 식당이며 상관없이 무어라도 팀장 없이 먹으면 완벽한 한 끼, 산해진미가 부럽지 않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어제 비싼 밥 같이 먹어준 것도, 오늘 단칼에 ‘싫은데요’ 하지 않은 걸 고마워해야 하나. 근데 팀원들아, 내가 너희 밥 챙겨준 적은 있어도 너희가 내 끼니 걱정해 준 적은 없지 않냐. 그리고 단언컨대 나는 너희의 점심을 일절 구속한 적이 없다.


  주니어 시절 동기 선후배들과 우르르 몰려나가서 김치찌개며 된장찌개, 제육볶음에 계란말이까지 골고루 시켜 이것저것 맛보던 왁자지껄한 점심이 그립다. 언제나 도돌이표인 식단표지만 소박한 구내식당 메뉴로 얼른 한 끼 때우고 음료 한 잔씩 손에 들어 산책을 나서던 때도 아른거린다. 먹는 것, 먹는다는 것, 먹고사는 문제 때문에 하잘 데 없는 상념에 빠지는 오후다. 내일은 다른 부서 친한 후배를 부르든가 정오 전에 조용히 사라져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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