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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on May 11. 2023

사과하면 지는 사회

  아침저녁으로 만원 전철만 타지 않아도 수명이 5년은 늘 것 같아. 내가 나 들으라고 자주 하는 푸념이다. 집에서 나와 돈 벌러 갈 수 있는 일터가 있다는 것은 무척이나 감사한 일이다. 하나 그곳으로 향하고 그곳에서 돌아오는 길은 고되고 괴롭다. 고마운 마음을 희석시킨다. 자가용 승용차로 출퇴근하는 친구에게 넋두리했더니 연중무휴로 막히는 올림픽대로에서 느끼는 갑갑함도 우아하진 않단다. 근로자, 노동자의 이동은 이러나저러나 수고롭다.


  두 번은 꾹 참는다. 아침부터 타인과 승강이하고 싶지 않다. 의지와 상관없이 낯선 이와 어깨며 등이 맞대어진다. 그런 순간에도 노동자로서 자신의 내면과 가만히 마주 하며 하루를 시작하길 원한다. 세 번째, 이윽고 옆에 앉은 중년의 남성에게 영원히 유보하고 싶었던 의사의 전달을 시작한다. “죄송한데요, 선생님. 그렇게 양 발끝을 벌려서 앉으시면 옆에 앉은 제가 많이 불편합니다. 조금만 배려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인상을 찡그리며 돌아오는 응답이 이렇다. “제가 언제 그렇게 앉았어요?” 하아, 나는 짧은 한숨을 쉰다. 다시 의사를 회신한다. “여기 한 번 보십시오. 선생님 발이 제 앞자리 가운데까지 넘어와 있잖습니까. 저쪽에 앉으신 분에게도 마찬가지고요.” 에헴, 중년 남성은 공연한 헛기침을 뱉으며 입술을 굵은 시옷자로 만든다. 보고 있던 휴대전화를 재킷 주머니에 찔러 넣더니 팔짱을 끼고 눈을 감는다. 파리에 있는 에펠탑 다리 같던 발끝이 마지못해 수습된다.


  사과하지 않는다. 아, 그랬나요, 미안합니다, 몰랐습니다. 짧은 마디 몇 글자만 발음하면 될 일이다. 그랬으면 내 쪽에서도 도리어 감사합니다, 성가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하며 상대의 감정을 한 번 더 살필 요량이었다. 만원 전철은 인간에게 품는 일말의 기대를 일원 몇 전도 안 되는 하찮은 것으로 만든다. 자신의 민폐를 인정부터 하지 않으니 사과가 뒤따를 연결 고리는 처음부터 없었던 것일지 모른다.


  일전엔 퇴근길이었다. 회사 근처 전철역에서 승차할라치면 진즉에 만석이 돼서 열차가 승강장으로 들어온다. 앉아서 가는 노곤한 귀가는 언감생심이고 적당한 자리에서 부대끼지 않고 서서만 가도 다행이다. 양쪽 좌석 앞에 안정감 있게 서지 못하고 거기 선 사람들 등 사이에서 엉거주춤 서서 가게 되었다. 한데 앞에 청년 등짐 가방이 점심시간 자전거로 음식 배달하는 라이더들 그것마냥 심하게 뒤쪽으로 도드라졌다. 키 작은 내 얼굴로 자꾸 달려들어서 도무지 서있지도 못할 지경이 됐다. 역시나 영원히 유보하고 싶던 교신을 시도한다. 최대한 얌전하게 어깨를 톡톡 두드리고는. “선생님, 실례지만 가방을 좀 앞으로 메주시면 어떨까요. 선반에 올리셔도 괜찮을 것 같은데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날의 응답은 어땠느냐. 미간을 찌푸리고 가재눈으로 쏘아보며 “거, 금방 내려요. 쓰읍!” 후우, 나는 짧게 한숨만 쉬고 다시 말 붙이지 않았다. 곧 내린다던 청년은 한참을 더 가다 하차했다.


  다른 날 출근 중이었다. 용케 승차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좌석에 앉았다. 나보다 더 운이 좋은 여성 승객이 다음 정차역쯤에서 타자마자 내 옆자리에 앉는다. 열차 문이 열릴 때부터 그녀는 한쪽 볼에 휴대전화를 대고 있었다. 탑승한 지 이제 이십 분도 넘어가는 때, 전화기가 뜨거워지는지 볼을 바꿔가며 통화를 이어간다. 거기까지면 참을 수 있다. 전화기 속 상대와 전철 객실이 떠나가게 큰 소리로 논박을 주고받는다. 인내의 임계점을 돌파하는 순간이 온다. “죄송합니다만 통화 좀 짧게 해 주시면 어떨까요. 다른 분들도 불편해하시고 저도 많이 시끄럽습니다.” 그 여자 반응이 예사 것이 아니다. “아, 어쩌라고요!? 제가 지금 중요한 일이 있어서 통화하고 있는 거잖아요!” 그날은 나도 조금 데시벨을 키웠다. “그렇게 중대한 일이면 내려서 전화하세요! 이른 아침 출근 시간에 다른 승객들 폐가 되게 뭐 하는 거예요! 적반하장으로 나오고 말이야.”


  왜 사과하지 않는 것일까. 아마도 그런 까닭인 것 같다. 사과하면 지는 것이다. 미안하다고 말하는 순간 나는 영원히 구제할 수 없는 패배자가 된다. 잠깐만 경계를 늦추면 까마득한 뒤쪽으로 도태되는 아귀다툼의 세상이다. 그런 세계에서 나의 잘못은 끝까지 인정해선 안 되는 일이다. 그것만은 막아야 한다. 인정부터 할 수 없으니 사과는 아무리 페이지를 넘겨도 나타나지 않는 상상 속의 챕터다. 설령 미안한 일을 했더라도 미안하다, 내 입으로 먼저 말할 수는 없다.


  비트겐슈타인은 스무 해의 세월을 바쳐 자신의 이름을 건 철학서를 집필했다. 책을 한참 쓰다 말고 문득 자문한다. “먼저 괜찮은 인간이 되지 않고 어찌 훌륭한 논리학자가 되겠는가. 그동안 저지른 잘못을 참회하지 않으면 참된 철학을 세우지 못한다.” 그는 지난날의 모든 잘못을 활자로 적어 그 대상이 되는 사람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고백하고 용서를 구했다고 한다. 벽안의 옛사람이 감당한 수고까지 바라지 않는다. 다만 지금 당장의 민폐라도 사과해 달라. 미, 안, 합, 니, 다, 그 다섯 글자면 충분하다. 그거면 더는 어두운 마음을 품지 않겠다.


  사과한다고 지는 게 아니다.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향하는 공감과 연민을 담은 사과는 한 번의 잘못을 얼마든지 지워낼 수 있는 실수 정도로 부피와 무게를 줄인다. 지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사람으로 성장하여 마침내 이기는 사람, 승자가 되게 하는 것이 바로 인정과 사과다. 엊그제 커피점 종업원에게 행패 부리고 뒤늦게 찾아와 어설픈 사과를 남겼다는 헛나이만 먹은 사내들, 그보다 며칠 전 바다 건너와서 사과는 없이 그저 마음이 아프다고만 했던 이웃나라 정치인, 이런저런 군상들이 떠오르는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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