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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on Jun 07. 2023

층간소음의 실체

  그녀는 왜 주말 아침 이른 시간부터 거실에 나와 있는 것인가. 낭패가 아닐 수 없다. 내가 잘못 알았구나. 사과하자. 오해의 잘못을 인정하고 미안하다는 문자 답신을 보내야 한다.


  벌써 다섯 해도 전, 그러니까 우리 식구가 지금 사는 아파트로 이사 와서 첫 밤을 보낸 새벽이었다. 안방 천장 구석 어디쯤에서 웅성거리는 사람 목소리가 들린다. 잠귀가 밝은 나는 그 소리에 잠이 달아나버렸다. 가뜩이나 잠자리 바뀌는 것에 예민해서 선잠을 설치던 밤이었다. 바깥으로 낸 통유리 창 커튼이 암실의 그것처럼 아직 새까맣다.


  베개에 뒤통수를 붙인 채로 프로파일링을 시작한다. 가만, 사람이 육성으로 내는 소리가 아니다. 말소리 사이에 짧고 간단한 음악 선율이 들린다. 티브이다. 뉴스 앵커 멘트 사이 코너의 시작을 알리는 시그널 뮤직이다. 누군가 종일 뉴스만 방송하는 보도 전문 채널이나 지상파 방송사나 종합편성 채널에서 하루 중 가장 먼저 편성한 뉴스를 틀어놓은 거다. 새벽잠이 없고 기상 직후에 뉴스를 시청취하는 경향으로 미루어 보건대 그 혹은 그녀는 최소한 중장년 이상 연령자다. 청력 감퇴는 신체 노화의 주요 증상이다. 작은 소리로는 들리지 않아 티브이 볼륨을 키워둔 것이라면 노령 거주민인 게 틀림없다.


  다음날 같은 시각 또 강제로 기상한다. 어쩌면 인과나 선후 관계가 뒤바뀐 것은 아닐까. 충성적 뉴스 시청자인 그는 기상 후에 티브이를 트는 게 아니라 알람을 겸해 매일 같은 시각 자동으로 그것이 켜지게 해 두었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더 심각한 징후다. 누군가의 기상 루틴을 해체하지 못하는 한 회사며 학교에 가야 하는 우리 가족은 앞으로 반영구적으로 천금 같은 새벽 수면 시간을 강탈당해야 할지 모를 일이다.


  나는 오지랖이 넓진 않지만 집요하다. 작용과 반작용, 관성과 지렛대의 원리를 모두 이용하여 침대에서 용수철처럼 상반신을 일으킨다. 아내와 아이가 완전히 깨지 않게 건넌방에서 최대한 기도비닉을 유지하며 트레이닝복을 입는다. 삐리릭, 현관문 도어록 열리는 소리만큼은 어쩔 도리가 없다. 휴대전화 화면에 표시된 현재 시간 ‘AM 05:40’. 기필코 소음의 진앙을 찾아내리라.


  윗집을 향해 계단을 오른다. 동작을 감지한 복도등에 불이 들어올 때 공연히 흠칫 놀란다. 모르고 보면 내가 바로 거동 수상자이겠구나. 우리 아파트는 승강기 앞에 1, 2호 라인이 나란히 붙은 구조다. 1호부터 현관문에 귀를 붙여본다. 어릴 적 바닷가에서 주운 소라 껍데기에서 들은 백색 소음 같은 소리만 들린다. 2호 현관문에도 똑같이 해본다. 이 집도 한밤 중이다. 그렇게 한 층 더, 한 층 더 올라간 것이 어느덧 꼭대기층에 닿았다. 에이, 이 정도 수직 거리면 뉴스가 아니라 액션 영화를 틀어놓아도 들릴 리가 없다. 아래층 집들도 똑같이 가봤지만 역시나 아니다. 위아랫집 거실에서 나오는 소리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대각선 거리 3, 4호 라인 어느 집일까 떠올리다 몸서리가 쳐졌다. 우리 동은 1, 2호 라인이 전부다. 납량특집은 아직 이른 계절이다.


  여기서 포기할 수 없다. 이번에는 건물 밖으로 나가 멀리 떨어져서 불 켜진 집이 어디인지 헤아린다. 군데군데 불 켜둔 창이 보인다. 가만, 우리 바로 윗집에 불이 들어왔는데 거실 밝은 등은 아니다. 저 위치면.. 안방이다! 용의 선상에 제일 윗줄에 올려야 할 곳, 바로 저 집이다. 마음 같아선 지금 당장 초인종을 눌러 집 안의 상태를 확인하고 싶지만 아서라 말아라 참아낼지어다. 가택침입의 혐의자나 스토커가 되고 싶지 않다면 삼가야 할 일이다. 대신 경비실로 찾아가 탐문 수사를 이어간다. 엊그제 이사 온 주민인데요, 혹시 저희 바로 윗집에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사시나요? 아, OOO호면 팔순 가까운 할머니가 선생님 또래 따님과 둘이 살고 있어요.


  오케이, 오늘은 일단 철수. 며칠을 더 새벽 소음에 시달리다 대충 조반을 물렸을 것 같은 주말 오전 시간, 윗집에 인터폰을 넣었다. 여성이 받는다. 경비실에서 알려준 대로라면 모녀 중 딸일 것이다. 공손히 신분을 밝히고 프로파일링의 결과를 확인한다. 혹시 어머님께서 안방에서 주무시고 새벽이면 그 방에 있는 티브이를 켜두시느냐. 예, 그런 것 같은데요 무슨 일이시죠? 그롸치! 주먹을 불끈 주었다 펴면서 불편 신고와 민원 협조 요청을 이었다. 다행히 말이 아주 안 통하지는 않는 분위기다. 티브이에 자동 전원 설정이 돼있는지 살피고 아니더라도 모친께 이른 시간에 티브이 시청을 가급적 삼가거나 음량을 최대한 줄이라고 당부하겠단다. 그 후로 적어도 더는 강제 기상은 없었다.


  그러다 몇 년 만에 오늘 새벽이었다. 잊고 지냈던 강제 기상의 기억이 일거에 소환됐다. 잠결에 들리는 티브이 소음이 무척 거슬렸다. 이삼십 분을 더 참았을까. 인내의 옹벽이 허물어져 머리맡에 휴대전화를 더듬거렸다. 일전에 다른 일로 받아준 윗집 휴대전화 번호가 저장돼 있다. 그녀도 내 번호를 알고 있다. 몇 번을 더 망설였고 소통의 시도 자체도 오랜만이라 전화번호가 바뀌었을지, 그 사이 혹시 이사 간 건 아닌지 모호한 상태에서 덜컥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아랫집입니다. 안방 TV 소리 좀 낮춰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채 몇 분 지나지 않아 띵동 휴대전화가 운다. 아따 응답 빠르시네, 하고 보는데 도착한 것이 장문의 메시지다. “안녕하세요. 저희 어머니가 얼마 전부터 병원 중환자실에 입원 중입니다. 현재 안방 텔레비전은 사용하고 있지 않습니다. 항암 치료 때문에 계속 입퇴원을 반복하시고 집에 계시는 동안에도 기운이 없으셔서 TV를 보지 못하십니다. 거실 텔레비전이 있기는 하지만 그마저도 꺼져 있을 때가 많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혹시 안방에 불이 켜져 있어 사람이 있구나 생각하실 수 있는데 어머니가 무사히 돌아오길 바라는 마음에서 제가 일부러 항상 켜두고 있습니다. 소음은 아마 다른 집에서 나는 소리를 오인하셨나 봅니다.”


  화들짝 놀라 거실에 나가 보았더니 일찍 기침(起寢)하신 어부인께서 소파에 모로 누워 티브이를 시청하고 계신다. 짧은 탄식을 뱉는 내게 아내가 “왜?” 천연덕스럽게 묻는다. 아냐, 하고 안방으로 들어가 휴대전화를 다시 집어 든다. 나도 장문으로 답신을 보낸다. “그런 사정이 있으신지 몰랐습니다. 저는 예전과 비슷한 상황일까 싶어 소음 줄여달라 부탁드린 것입니다만 애먼 데에서 원인을 찾았나 봅니다. 어머님 건강이 좋지 않으시다니 이웃으로서 진심으로 위로를 드립니다. 쾌유를 바라고 저 역시 몇 해 전 가족을 큰 병으로 떠나보낸 형편이라 그 슬픔을 깊이 공감합니다. 잘 알아보지 않고 마음을 어지럽게 해 드린 것 같아 사과합니다. 죄송합니다.” 또 얼마 안 돼 전화기가 울린다. “사과까지 하시다니요. 괜찮습니다. 옛날처럼 반상회 같은 거라도 있으면 서로 얼굴도 익히고 불편 사항도 얘기 나누고 할 텐데 소통의 어려움이 큰 것 같습니다. 어머니 쾌유 빌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대로 교신을 접을 수 없어 마지막 답신을 보냈다. “다음에 혹시 티브이 소리가 들리면 윗집 어머님 퇴원하셨구나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이웃 사이의 소통 단절이 당연한 일상인 시대여서 자칫 갈등이 질 수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곤란한 사정까지 꺼내어 말씀해 주셔서 감사하고 그만큼 이해가 깊어졌습니다. 다시 한번 어머님의 쾌유를 빕니다.”


  독일의 저명한 철학자이자 사회학자인 위르겐 하버마스는 일생을 두고 의사소통 이론과 공공성에 대해 연구했다. 그는 의사소통 행위 이론이라는 이름으로 사회적 상호작용과 의사소통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것을 통해야만 진정으로 민주적이고 평등한 사회를 구현할 수 있다고 그는 피력한다. 시민들이 서로 다른 관점과 이해를 공유하는 행위야 말로 민주주의 사회로 나아가는 길이라는 것이 그의 장대한 연구의 결론이다. 하버마스의 이론들은 이후 사회학, 정치학, 커뮤니케이션 이론 등 다양한 학문 분야에 영향을 주었다. 그가 주말 아침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난 일을 알게 된다면 필경 흡족한 미소를 지으리라.


  소통이 있어야 다름을 파악할 수 있고, 그 과정에서 논박과 시비는 불가피한 것이며, 그것을 통해 마침내 온전한 이해가 이루어지고, 그런 다음에야 합의와 결론에 이를 수 있음을 주말 아침에 굳이 되새긴다. 하버마스 옹께서 불통으로 일관하는 어떤 사람들을 친히 불러 따끔하게 한 말씀해 주시면 딱 좋을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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