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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on Jun 08. 2023

의사 선생님도 아프다

  한 달 치 약을 타 먹기 위해 매달 하루 회사에서 멀지 않은 병원을 다닌다. 포털 사이트에서 행정구역명과 진료과목, 그 앞에 ‘가까운’이라는 관형사 세 단어로 검색한 결괏값 가운데 가장 윗 줄이었다. 1980년대쯤 지어졌으려나, 걸어서 가보니 병원 건물에 세월의 더께가 잔뜩 묻었다. 휘황찬란한 마천루가 대나무 처럼 솟는 도심 속에서 옛 서울의 기억을 홀로 숨죽여 간직하고 있는 듯했다. 한데 노포 맛집 찾아가는 것도 아니고, 병 고치러 가는 건데 좀 세련된 신식 건물이어야 하지 않을까. 또 모르지 뜻밖에 기적의 명의가 안에 계실지.


  병원 내부의 정경도 외양과 다르지 않았다. 둔중한 유리문이 바닥을 긁으며 내는 금속음을 섞어 문 위에 달아놓은 종이 울린다. 옥색 접수대가 먼저 보인다. 표지 끄트머리가 말린 과월호 잡지책들이 낡은 원목 탁자 위에 어지럽게 포개어 누웠다. 옆에 같은 날 들어왔을 직물 소파가 두 줄로 한쪽 벽을 보고 있다. 그 벽에 어울리지 않게 티브이만 납작한 요즘 물건이 걸렸다. 누가 언제 증여한 것인지 하얀 붓글씨로 새겨 넣은 커다란 전신 거울, 설마 저것까지 옛 것일까 싶은 상아색 정수기, 우산꽂이며 플라스틱 쓰레기통, 탁자 위 사각 화장지에 씌운 커버까지. 의학 드라마에도 시대물이 있다면 당장에 촬영 팀을 부를 법하다.


  접수대 뒤에는 민무늬 연분홍 가운을 입은 베테랑 간호사 두 분이 상주하신다. 사적인 친분이 더 있었더라면 내가 누나, 혹은 이모 하고 부를 정도 연배랄까. 최신식 병원에 있는 대기 명단 전광판 같은 건 있었대도 이곳과 조화롭지 않았을 일. 접수하고 잠시 소파에 앉아 기다리면 친히 이름을 부른다. 진료실에 얌전히 똑똑 노크하고 들어간다. 우리 모친 또래 여의(女醫), 그러니까 여자 원장님이 새하얀 가운 차림으로 맞이하신다. 눈매와 달리 양쪽 끝으로 뾰족하게 솟은 검은색 뿔테 안경이 이지적인 인상을 더한다. 명의임에 틀림없는 것은 첫 진료 이후로는 증세가 더 나빠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난달 이맘때 수중에 약이 몇 알 남지 않아 으레 병원을 찾았다. 익숙한 유리문을 열려는데 눈높이에 굵은 사인펜글씨가 있는 사무용지가 붙었다. “급한 사정 때문에 이번 주말까지 임시 휴원합니다. 정기 복용약이 필요하신 분은 아래 약국에 종전 처방 기록이 있으니 조제 문의하세요.” 전에 없이 뭔 일이래, 고개를 갸웃하며 약국에 들렀다. 종이에 적힌 대로 약을 내어주며 처방전은 병원 다시 문 열면 그때 가져다 달란다. 약값을 치르면서 약사 선생님께 병원 문 닫는 건 아니겠죠?, 물었다. 설마요, 답이 돌아온다.


  삼십 알 들이 약통을 흔든다. 덜그럭 덜그럭 안에 겨우 한두 알 남짓 굴러다니는 소리가 난다. 한 달 금세 가는구나. 오늘은 가면 열었겠지. 약국에서 일러준 대로 지난달 치 처방전도 달라고 해야겠구나. 출근했다가 점심 전에 슬쩍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병원 아주 문 닫았으면 새로 다른 병원 찾아야 할 텐데, 그것도 성가시다면 성가신 일이니 제발, 설마 하는 마음으로 횡단보도를 건넜다. 안에 전등은 켜놓은 것도 같고, 일단 유리문 눈높이에 안내문 없다. 문을 미는데 끼익, 띠링! 열린다, 다행히.


  원장님 안녕하세요, 꾸벅 인사하고 의자에 앉았다. 어서 오세요, 어디 불편한 데는 없으셨고요? 물어온 것에 대답은 않고 내 할 말만 풀어놓는다. “원장님 달포 전엔가 병원 문 닫혀 있어서 밑에 약국 갔더니 약은 내주는데 나중에 병원서 처방전 받아다 달라고 하더라고요.” 울 모친 연배의 여의께서 말씀하신다. “아이고, 그게 어떻게 된 일이냐면.” 무슨 사연이 있었구나. 귀를 기울여 듣는다.


  진료가 없는 주말 휴일, 원장 선생님께서 경상남도 진주로 나들이를 가셨는데 그만 충수염, 그러니까 맹장이 터지셨단다. 하필 가까운 데 수술 가능한 병원도 없어 차로 한참을 더 가서 나흘 밤 다섯 날을 타지에서 입원을 하셨단다. 큰맘 먹고 놀러 간 건데 초장부터 그렇게 된 터라 고생만 직사하게 하다 돌아왔다고 넋두리를 하신다. 이번에는 내 쪽에서 걱정과 공감을 표시한다. “저런, 그런 일이 있었군요. 얼마나 놀라고 아프셨어요. 같이 갔던 가족이나 일행 분들도 당황스러우셨겠네요. 어떻게 수술은 잘 된 거고 지금은 좀 괜찮아지셨고요?” 살가운 사람은 딱히 아닌데 진심 팔 할에 사람 된 도리 두 할이 섞인 말을 건네려니 저절로 원장 선생님과 눈썹 모양이 같아진다.


  여느 달에 갑절은 될 법한 진료 시간이 지난다. 병원 비상 휴무의 배경과 원인을 공유하는 데 조금 더 썼고 예의 내 진료 상담과 처방에 그만큼 덜 걸렸다. 지난달 처방전을 따로 가져다줄 것 없이 병원 다시 열자마자 간호사 선생님들이 어련히 일찌감치 약국으로 전달했단다. 대개는 원장 선생님이 내 신체 상태와 질환 증세를 염려하는데 어째 이 달 진료는 의료 면허도 없는 내가 그 역할을 한 뒷맛이다. 그 맛이란 게 왠지 폭신하고 들큼하다. 뭔지 몰라도 잘한 일 같고 아픈 사람의 환부와 상처를 어루만지고 살핀 기분이다.


  의사 선생님도 아프다. 사람은 누구나 몸이나 마음이 아플 때가 온다. 그럴 때면 누구라도 위로와 연민이 필요하다. 늦은 나이에 불청객으로 찾아온 원장 선생님의 맹장염이 안쓰러워서, 그 회복의 경과가 다행스러워서, 그래서 병원이 다시 열어 계속 다닐 수 있어서, 어쩌면 본가에 계신 노령의 모친과 겹쳐져서, 어떤 까닭이든 기분 좋은 동기화의 체험이었다. 아프면 서러운 법, 서러움을 헤아려 따뜻한 위로의 말 건넬 수 있는 나이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그대와 나는 괴롭지 아니하길 바라고 또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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