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oon Jun 27. 2023

다시 학교에 갑니다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 90년대에 교복을 입었던 분이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유명한 책 이름이다.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명문대에 진학한 저자가 이윽고 변호사가 되었다는 근황을 동영상 플랫폼에서 접한다. 영상 속 중년이 된 그가 손사래를 치며 펄쩍 뛴다. “공부가 어떻게 쉬워요! 다만 공부라는 게 해보면 어떤 놀이보다도 참 재밌는 것이구나, 그 얘기를 하고 싶었어요.”, 소회한다.


  방송인 유재석 씨와 가수 이적 씨가 머리를 맞대고 만들어 부른 노래, 「말하는 대로」. 서정적이었다가 격정으로 치닫는 유려한 멜로디가 인상적이다. 그것에 실은 노랫말은 압축하자면 말이 씨가 된다는 아포리즘이다. 살다 보면 참말로 그런 순간이 있다. 말로써 다짐한 것이 작은 시작이 됐구나. 심리학과 교육학에서 거창한 이론으로 등장하는 자기 암시, 자성예언(自成豫言)은 ‘말이 씨가 된다’는 어른들의 말씀과 같은 맥락이다.


  사회 초년생 티를 벗어 제법 일이 손에 익은 때였다. 선배나 상급자에게서 아쉬운 소리 듣는 일 없이 온전히 한 사람 몫의 조직 구성원으로 기능할 수 있게 됐다. 한데 언뜻 탈 없이 돌아가는 듯한 직업적 일상에서 마찰음을 듣는다. 회사는 치열한 아귀다툼의 지옥. 너보다 내가 돋보여야, 너를 밟고 내가 올라서야 나의 욕망이 실현되는 곳이라는 인식에 뜻밖에 가서 닿는다. 그러자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것이 환멸의 대상이 됐다.


  다시 공부하고 싶다는 욕구가 안에서 작은 결정으로 맺혔다. 비루한 현실에서 아카데미의 순수만이 유일한 탈출구가 돼줄 것 같았다. 왜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가치 있는 것들은 그것이 가까울 때엔 빛나지 않는가. 심지어 견공의 배설물까지. 군 전역 후 복학생 신분으로 대학 도서관을 전전긍긍하던 때엔 알지 못했다. 공부한다는 것, 공부할 수 있다는 것의 풍요로움을. 구멍 난 학점, 지하로 내려간 평점을 메우고 끌어올리던 내겐 너무 먼 이상향이었다. 다시 학교로 돌아간다면 이번엔 다르게 펼쳐보리라.


  나 다시 공부하고 싶어. 말로 새어 나오기에 이른다. 전공인 경영학이든, 부전공이었던 언론학이든. 아마 대학원이 될 텐데 어디든 들어갈 수만 있다면 열심히 재미있게 공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쩌다 주변 사람들과 각자 일터에서의 고충을 겨루면 나는 짐짓 그런 말을 중얼거렸다. 차마 실행하지 못했던 이유는 달리 뭐 있겠는가. 비싼 학비 때문이지. 시간이야 어떻게든 마련해 볼 수 있었다. 한데 빤한 월급은 자가 증식의 방편이 보이지 않았다. 두 내외가 같이 버는데도 대출금 갚고 양쪽 집 부모님들 부족하나마 생활비 보태드리면서 아이 학원비 대고 나면 수중에 여윳돈이라고 한 줌도 안 되었다.


  그러던 몇 해 전 어느 오후 일터에서의 나의 상관, 본부장이 자기 방으로 나를 호출한다. 그는 몇 달 전 본부 안에서 내가 원하지 않던 직무의 팀장 자리로 나를 보낸 사람이다. 찾으셨습니까, 본부장님. 그래 Hoon 팀장, 회사에서 선발하는 경영대학원 학비 지원 제도 있잖아, 내가 밀어줄 테니까 그거 한 번 해보지 그래? 제가요? 제가 자격이 될까요. 그렇게 말이 나온 MBA 진학이 마침내 이루어졌고 졸업한 것이 벌써 몇 해 전이다.


  무엇이 좋았고, 무엇이 남았느냐. 불타는 금요일 저녁, 남들이 먹고 마시고 즐기며 생업 현장에서 쌓인 5일 치의 스트레스를 희석할 때 나는 회벽의 강의실에서 학업에 전념하고 있다는 차별감 자체가 좋았다. 지금 배우고 익히는 것이 일터에서 어떤 쓸모가 있을지 확신하지 못했다. 다만 내가 지금 기꺼이 수고하고 있고 그것이 누가 시켜서 하는 게 아니라 순전히 내 의지에서 비롯한 것이라는 것이 흡족했다. 귀하게 얻은 졸업장으로 동기 몇 사람은 대우가 더 좋은 곳으로 직장을 옮겼다. 나는 그런 것 없이도 그들 자체를 얻은 것이 생의 큰 수확이다. 남는 것 중에 사람보다 좋은 게 뭐가 더 있을까.


  MBA를 졸업하고도 성취감은 오래가지 못했다. 공부는 아직 끝나지 않은 듯했다. 학부 시절 부전공으로 짧게 인연 맺은 언론학에 더 이끌렸다. 나 기회만 된다면 공부를 더 해보고 싶어. 가까운 이들에게 어느덧 또 고해하고 있었다. 역시나 금전적인 한계가 가장 컸다. 이번에도 말이 씨가 됐을까. 십수 년 전 장가들 때 주례를 부탁드렸던 은사님(신문방송학과 수업을 듣는 경영학과 수강생을 교수님은 눈여겨보신 것 같다.)께서 모교 언론대학원 원장이 되셨다. 어느 저녁 전화 주셔서는 학교로 돌아와 공부해 볼 뜻이 있는지 물어오셨다. 물론이죠, 말씀드리면서도 학비에 대한 부담은 차마 털어놓지 못했다.


  아내와 상의 끝에 응시 원서를 일단 제출하기로 결심한다. 학부, 대학원 졸업장과 재직 증명서를 그러모았다. 자유 양식인 학업계획서에 공부에 대한 늦은 열정을 빼곡하게 채웠다. 전형료를 치르고 회사 봉투에 서류를 담아 등기우편으로 발송했다. 오랜만에 양복을 꺼내 입고 모교 면접장을 찾았다. 엊그제가 합격자 발표 날이었다. 탈락의 고배를 들이켤 것 같지는 않은데 등록금 고지서에 찍힐 숫자가 관건이다. 미리 고지된 발표 시간, 대학원 홈페이지에서 합격 여부는 확인했고 등록금 고지서를 다운로드한다. 과연 얼마가..


  과분한 금액이 장학금 명목으로 차감됐다. 대학원 운영 규칙에 모교 졸업생, 언론사 현직 종사자에 대한 장학 규정이 있다고 들었으나 혜택 범위를 자세하게 짐작하기 어려웠다. 이거면 생활비를 크게 걱정하지 않고 공부를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은사님께 사무치게 고마운 마음을 표현할 방법을 급히 수배한다. 강의 중이실까 싶어 늦은 오후에 얄궂은 메시지로 마음을 담아 보낸다. “선생님, 합격자 발표 확인했습니다. 장학금 주셔서 감사합니다! 공부 성실하게 잘하겠습니다.”


  공부가 가장 쉽더라. 어느덧 중년. 회사원으로 살며 치사한 남의 돈 벌어보니까 뼈가 저리게 알겠더라. 당장 오늘 벌어서 내일 먹을 것을 걱정하지 않고 반듯한 책상 걸상에 앉아 학문적 대가의 안내를 받으며 책 속 거대 담론의 세상에 자신을 온전히 빠뜨릴 수 있는 시간, 그것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이제 나는 다른 어떤 이보다 잘 알게 되었다. 다시 학교에 간다. 두꺼운 교과서로 오랜만에 백팩을 채워 등에 메고 집을 나서는 초가을 아침이 벌써부터 기대되고 설렌다. 학창 시절 남의 속도 모르는 제목의 베스트셀러 저자처럼 사회적으로 크게 성공한 사람이 되진 못했지만 나는 이제야 비로소 안다. 공부가 개중에 쉬운 것이었더라.

매거진의 이전글 의사 선생님도 아프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