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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on Jan 03. 2023

베트남 고수 이야기

  나는 오지랖이 넓진 않으나 괴상한 집요함이 있다. 이번에도 그 괜한 집요함에 발동이 걸렸다. 낯선 이에게 “여기에 이것, 그리고 저것 넣어서 먹으면 더 맛있어요!” 하는 것은 분명 방대한 오지랖의 소산이다. 그러나 음식 만드는 이에게 “이것을 저것으로 잘못 알고 넣으면 먹는 사람들이 식사를 망칠지 몰라요!” 말한다면 그것은 인류애에 기반한 집요함이다.


  지난 연말 아내와 아이, 세 식구가 베트남으로 단출한 여행을 다녀왔다. 늦여름, 혹은 초가을 같은 기후에서 보내는 성탄절은 그야말로 이국적이었다. 베트남 남부 나트랑, 원어민 발음으로는 ‘짱’이라고 부르는 곳에서 며칠 묵는다. 간 김에 인접한 도시까지, 현지 국내선 여객기를 타고 도심지 호찌민에서 몇 밤 더 지내고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나트랑에서는 베트남 재벌 ‘빈 그룹’에서 지은 섬 휴양시설 ‘빈펄 리조트’에서 묵었다. 나트랑 외곽에 있는 선착장에서 전용 쾌속선으로 섬과 육지를 연결한다. 알찬 일정을 보내고 새로 건조한 범선의 돛으로 쓰였어도 좋을 새하얀 침대 시트에 몸을 묻었다. 뜻밖에 숙면이었는지 몸이 개운하다. 시장기가 몰려온다. 현지 시각 오전 8시, 한국은 지금 10시. 배가 고플 시간이다. 아내와 아이를 깨워 호텔 로비 구석에 있는 조식 뷔페로 찾아갔다.


  베트남하면 쌀국수요, 쌀국수하면 베트남이지. 길게 줄 선 저곳에서 쌀국수를 담아주는 것 같다. 눈치를 살피며 줄 끝에 붙어 선다. 가만, 투숙객들 인상착의가.. 딱 봐도 한국인이다. 앞뒤로 선 일행들이 주고받는 말에 귓바퀴를 위성방송 안테나 접시처럼 들이댄다. ‘이거 맛있겠다.’, 한국말이다. 빙 둘러보니 홀 안에 손님 팔구할이 죄 한국 사람이다. 앤데믹이 맞긴 맞는구나. 나트랑에 한국인 관광객이 많아서 우스갯소리로 ‘경기도 나트랑시’라고 한다더니 없는 말이 아니다.


  내 차례가 되어 현지인 여성 조리사에게 검지로 숫자 1의 의미를 만들어 보였다. 조리사가 화답의 의미로 무언가 얘기한다. 검지로 잘게 썬 녹색 채소가 담긴 그릇을 가리킨다. 눈이 마주친 상태로 “고수?”라고 나에게 묻는다. 아, 한국말 고수! 영어로 ‘코리앤더’, 중화권에서는 ‘샹차이(향채)’라고 불리는 채소! 난 좋아한다. 반가운 마음을 담아 조리사에게 “슈어!”라고 답했다. 조리사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채소 한 줌을 국수 위에 올린다. ‘오, 너 쌀국수 좀 먹을 줄 아는구나.’의 뜻을 담은 웃음일 지어다.


  국수 한 그릇을 받아 들고 아내와 아이가 기다리는 테이블로 돌아왔다. 오, 그거 쌀국수야? 끄덕끄덕, 아내에게 답하고 국물부터 한 숟가락 뜨려는데..! 엇? 고수라고 올린 고명이 고수가 아니다. 이게 뭐지,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도 없었다. 잘게 썬 쪽파다. 젓가락을 핀셋처럼 써서 집어 올려 맛을 보았다. 여지없이 그것이다. 엥? 쌀국수의 종주국에서라면 고수까지 담뿍 올려서 제대로 맛보고 싶은데. 자리를 벗어나 쌀국수 코너를 다시 어슬렁거렸다. 구석에 진짜 고수를 담아놓은 접시가 따로 있었다. 여기 있었네, 테이블로 돌아오려는 순간에도 수많은 한국인 투숙객들이 “고수?”라고 서툰 우리말로 묻는 조리사에게 못 볼 거라도 본 표정으로 크게 고개를 가로젓는다.


  조리사가 고수라고 굳게 믿고 있는 채소 고명을 올리지 않으면 면과 고기뿐인 국물이다. 고깃국에는 모름지기 채소가 아삭아삭 씹혀 줘야 느끼함을 달랠 수 있다. 저 많은 고국의 동포들이 본고장에 와서 반쪽짜리 쌀국수를 맛보고 있으니 안타까움이 이루 말하기 어려웠다. 괴상하고 기묘한 집요함이 시동을 켠다. 틈을 보아 조리사에게 얼른 말을 걸었다. “Excuse me, ma'am. It's not ‘고수’ but ‘쪽파’, if I say it in Korean words. 아쒸, 쪽파가 영어로 뭐더라.(스마트폰을 검색하며) Oh, It's chives(쪽파) in English. It's over there you're saying ‘고수’, coriander in English.” 조리사님 당신이 한국말로 고수라고 부르는 건 고수가 아니라 쪽파예요. 고수는 그쪽이 아니라 저쪽에 있는 거예요. 고수, 영어로 코리앤더라고 부르는 거 말이에요, 조악한 영어에 이런 의사를 담았다.


  “No, This is ‘고수’!” 예상 밖의 불통이다. 나름대로 길게 풀어서 찬찬히 알아듣기 좋게 설명한 건데 내 영어가 진심을 담기에 역부족이었나 보다. 그녀는 자기 손에 쥔 것이 고수임을 고수한다. 이번에는 먼 데 접시에 있는 진짜 고수를 손으로 집어 와서 조리사 눈앞에 들이댔다. “Unfortunately, This is ‘고수’! Almost every korean people love chives. They can't enjoy it because you told them wrong. Of course it's not your fault at all. Maybe, you heard it wrong from someone, too.” 전부 당신 탓은 아니겠지만 당신이 잘못 알려주는 바람에 그 좋아하는 한국 사람들이 쪽파도 못 넣어 먹고 있다, 아마 당신도 어디서 잘못 들었겠지, 그런 뜻으로 말했다.


  이제야 온전히 알아들었다는 반응이다. 알려줘서 고맙다는 말까지 돌아왔다. 나도 귀찮게 해서 미안하다는 말로 응수했다. 테이블로 돌아오는 뒤통수로 그녀가 다른 조리사들과 내가 교정해준 정보를 공유하고 있음을 느낀다. 다들 보세요, 저기 저 괴짜 같은 한국 사람이 알려줬는데 이게 아니라 저게 고수래요, 뭐라더라, 이건 고수가 아니고 다른 거래요, 베트남 말로 그런 뜻 아니었을까.


  왜 그렇게 오래 걸렸어? 아내가 묻는다. 자초지종을 짧게 전달했다. (아이를 보며) 하이고, 대단한 사람이야 너희 아빠, 안 그렇니? 아이가 버터와 잼 바른 토스트를 한 입 베어 물며 고개만 끄덕인다. “부인도 알지만 내가 오지랖은 넓지 않은데 이상하게 집요한 구석이 있잖아. 사람들이 다 잘못 알고 먹거나 못 먹고 있더라고. 미스 커뮤니케이션은 바로 잡아야지. 아마, 한참 전에 무슨 녹색 채소를 국수에 얹어주려니까 어떤 한국인이 지레 못 먹는 고수인 줄 알고 완강히 거부했나 봐. 그때부터 잘못 알았겠지. 이제 내 덕분에 제대로 된 쌀국수 맛볼 수 있을 거야, 우리 한국 동포들. 흐흐흐.”


  식사를 마치고 부러 쌀국수 코너를 지나 퇴장하였다. 고수로 잘못 알고 있던 그것, 쪽파는 한국 사람들이 대개 좋아하는 거라고 알려주었기 때문일까. 이제는 한국인으로 추정되는 손님들에게 일일이 “고수?”하며 묻지 않고 기본 값으로 쪽파 고명을 올려주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는데 리조트 주인장만큼이나 만족스럽다. 애먼 성취감까지 들었다. 그래, 이런 집요함은 그래도 세상을 조금 이롭게 하는 거 아냐? 자화자찬의 결론으로 식사를 마무리했다.


  객실로 돌아가 외출할 채비를 갖추고 호텔 로비를 나섰다. 리조트에 딸린 놀이공원이며 수영장에서 한 나절 신나게 놀았다. 어스름 즈음 호텔로 돌아오는데 어떤 생각이 뇌간을 간질였다. 근데, 나 진짜로 오지랖 넓은 사람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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