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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on Dec 27. 2022

아버지의 부재

  부고가 날아든다. 망자 이름이 들어본 듯 아닌 듯. 지금은 다른 회사에서 일하는 후배 C가 어떤 이의 별세를 간단한 문자로 알려왔다. “故 최OO 님이 누구냐.” 답신을 보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형님.”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다. “아이고, 알았다. 가마.”


  발인이 모레다. 오늘 안 되면 내일도 있다. 한데 누구보다 빨리 달려가 주고 싶다. 오후에 상암동 사옥에서 업무 회의가 있다. 마치면 네다섯 시쯤이다. 까짓것, 원대 복귀하지 않고 현지 퇴근하련다. 빈소가 반포 성모병원. 대중교통으로 가면 여섯 시 안짝. 조문객들이 오기 전 썰렁한 공간을 한 자리는 채울 수 있겠다.


  고속터미널 역에서 하차. 얼마나 땅속 깊이 철길을 뚫어놓았는지 에스컬레이터로 한참을 올라온다. 전철 역사와 붙은 널찍한 곳에 생맥주 주점이 있다. 통유리 너머 물오른 청춘들이 왁자지껄 먹고 마신다. 맞은편 육교 너머 직사각형 건물 이마에는 불이 들어온 십자가가 붙었다. 저 아래 어디쯤이 장례식장일 테다. 저기 널찍한 방에도 검은 옷을 입은 이들이 육개장에 흰쌀밥을 먹고 있겠지. 각자의 안식처로 회귀하는 빨간 자동차 불빛의 행렬이 짙푸른 삶과 무채색의 죽음을 등분한다.


  현금이 없다. 얼마 전 지갑을 바꿨다. 지폐를 쓸 일이 거의 없다. 샌드위치처럼 도톰한 지갑에는 꼬깃꼬깃 의미 없는 영수증만 수북하다. 아내에게 간단한 명함지갑을 사다 달라고 부탁했다. 그것 안에 주민증과 신용카드만 넣고 다닌다. 혹시 몰라 어쩌다 수중에 들어온 오천 원짜리 한 장을 두어 번 접어 구겨 넣었다. 현금이 필요하다. 장례식장 로비 한가운데, 가장 목 좋은 곳에 현금인출기가 비석처럼 섰다. 일로 만난 사이에 들이는 금액의 갑절을 인출한다. C에게 나의 깊은 애도와 연민, 연대를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다.


  마테오. C의 아버지의 세례명이다. 빈소 앞 전광판이 망자의 다른 이름도 알려준다. C는 유서 깊은 천주교 집안의 후손이다. 선대 조상 중에 이 땅에 복음을 펼치다 순교한 어른도 있다고 들었다. 신발을 벗는데 C가 내 기척을 알아챈다. ‘어 형님!’ 하는 눈빛에 대고 ‘기다려, 아버님께 곧 인사드리마.’의 속뜻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국화 한 송이를 뽑아 들어 제단 앞에 눕힌다. 한 걸음 물러나서 이마와 명치, 왼쪽과 오른쪽 쇄골 아래를 짚어 십자가를 만든다. 두 손을 모으고 엄지를 열십자로 포갠다. ‘C 아버님, 병상에서 오래 편찮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이제 주님 곁에서 온전한 안식 누리시고 높은 곳에서 사랑하는 가족들 돌보아 주십시오.’ 속말을 건넸다.


  냉담자(교회에 나가지 않는 교인)도 못 되는 날라리 신자지만 오늘만큼은 진중한 마음으로 성호를 새겼다. C와 같은 절대자를 섬기는 형편이 새삼 편리한 찰나였다. C와 그의 여동생과 선 채로 목례를 나눈다. “형님, 어쩜 이른 시간에 먼 걸음 하셨어요.” 하는 걸 “당연히 한 걸음에 와야지.” 답하는 중에 C가 모친을 부른다. “어머니, 자주 말씀드렸던 Hoon 선배예요. 지금 OO방송사에 있는..”, “아이코, 그러시구나! 말씀 많이 들었어요. 와줘서 고마워요.”, “지당한 말씀을요, 어머니. 아버님 오래 편찮으셨잖아요..”, “그러게, 그랬지..”, 상심이 크시겠다는 말씀까지 드리고 돌아 나와 조의금 봉투를 길쭉한 구멍으로 떨어뜨렸다. 방명록에 이름을 남긴다.


  모서리 깊은 테이블 구석에 앉는다. 식사드릴까요, 상조 회사에서 보내온 단정한 맞춤복 차림새의 중년 여성이 묻는다. 예, 한 사람이요. 허연 비닐 식탁보 위에 종이 용기에 담은 육개장과 쌀밥, 편육과 김치, 모둠전과 홍어무침, 견과류와 진미채 등이 오른다. C가 녹색 술병과 작은 종이컵을 들고 와서 맞은편에 앉는다.


  “형님, 한 잔 받으세요.” 그래, C야, 얼마나 황망하겠냐. 아버지 오래 투병하셨잖냐, 느이 아버지 존함 석자 내 분명히 들어서 아는데 언뜻 생각이 못 미치더라, 나도 얼마나 놀랐던지, 놀란 마음으로 서둘러 온다고 온 게 지금이다, 툭 하니 술잔 부딪치고 싶은 것을 상갓집에서는 그러는 것 아니라고 어른들한테 배웠다. 눈으로만 무겁게 부딪쳐 소주를 들이켠다.


  C에게 말했다. C야, 나도 집에 맏이이고 누구 하나 귀띔해주는 이가 없어서 몇 해 전 장인어른 돌아가셨을 때 애먹었었다, 너는 나처럼 공연한 고생 안 했으면 싶어서 말이다, 이제부터 조문객이 쇄도할 텐데 네 체력이 가장 중요하다, 술 많이 마시지 말고 최대한 앉아서 체력을 비축해라, 그래야 내일모레 발인에 장지까지 아버님 잘 모실 수 있다, 너희 집은 천주교지만 조문객들은 아니어서 상주인 너와 엎드려서 절하는 것으로 예를 갖출 텐데 무릎이며 허리 상하는 걸 조심해라, 또 마치 결혼식 피로연장 돌면서 인사하는 것도 아니니까 조문객 앉은 테이블 이곳저곳 누빌 필요도 없다, 그것도 지친다, 가능하면 상주석을 지키면서 문상객을 맞아라, 아내와 아이는 이따 늦기 전에 집으로 보내서 재우고 너도 새벽에 잠깐이라도 반드시 눈 붙여라, 내가 겪은 대로 시행착오의 결과를 제공했다.


  C는 아버지를 잃었다. 나는 몇 해 전 아내의 아버지, 장인어른, 영어식 표현으로 ‘파더 인로(Father in low)’를 떠나보냈지만 엄밀히 나의 친부는 아니다. 슬펐지만 친부를 잃은 아내와 견줄 것은 되지 못한다. 아버지를 잃는다는 것, 절반쯤, 아니 반의반쯤, 아니 반의반의반쯤만 알 것 같은 마음으로 짐작하자면 집에 큰 문이 하나 무너져서 없어진 기분이리라. 여러 가족, 식솔들이 그 문 아래로 들고 나며 꿈을 키우고 안식을 누리던 자리, 그 큰 것이 어느 날 영원히 사라져버린 마음일 것 같아 눈 밑이 떨렸다. 기둥은 또 왜 아니냐. 이제 큰 기둥은 C 너와 나 같은 자식들 몫일 테고 핵가족도 옛말이 된 시대에 가족 구성원 중에 기둥이 아닌 이가 누구냐, 우리들의 어머니, 너와 나의 아내, 네 아들과 내 딸, 어느 누구 하나도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기둥들이지 그들 없이 우리가 어찌 하루라도 살겠느냐, 빤한 말도 뇌까렸다. 아버지의 부재, 아직 내 일로 직접 겪지 않은 일이 아끼는 사람의 일로 당장 벌어진 일이 되어서 버겁고 사무쳤다.


  마침 내일이 돌아가신 장인어른의 기일이다. 이제부터 죽는 날까지 C와 나는 매년 겨울의 엇비슷한 이맘때쯤을 가족을 여읜 날로 맞이할 것이다. 반가운 우연은 단연코 아니겠지만 우리는 또 이렇게 서로 연민하고 연대할 것이다. 같이 겪은 고통과 쾌락, 동고와 동락 중 더 강력한 계기는 단연 전자라고 믿는다.


  조문객이 몰려든다. 테이블 빈자리가 줄어든다. 일어나자. 자리를 비워 새로 온 사람들이 편하게 앉게 하자. C의 예닐곱 살 먹은 아들이 엄마 소매에 매달렸다. 점퍼를 여미어 입고 C의 아들에게 다가간다. OO아, 아저씨가 현찰이 이것밖에 없다, 다음에 열 배 큰돈으로 줄게. C의 아내가 고맙습니다 해야지, 한다. C야, 나 간다, 같이 밤새워주지 못해 미안하다, 형님 무슨 소리세요, 집까지 한참 돌아가셔야 하겠네요, 그게 뭐 대수롭겠냐, 모레까지 아버님 잘 모시고, 다녀와서 추스르면 소주 한 잔 하자, 후일을 도모하며 신발에 구둣주걱을 끼웠다. 그때쯤이면 C의 아버지, 마테오는 온전히 주님의 곁에 계실 것이며 C는 일단은 아버지를 보내드린 후일 것이리라.


  낯선 곳에서 집으로 향하는 전철에 오르며 아내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낸다. 나, 이제 귀가, 후배 C 아버지가 돌아가셨대서 문상 왔다 가는 길. 몇 분 후 전화기가 부르르 떤다. “ㅇㅋ.” 삶은 계속되고 나와 너, 우리의 삶 속에서 사랑하는 이를 이따금 떠나보내는 중에도 삶은 계속되기에. C도 나도, 우리 모두 살아가기로, 살아보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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