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오너가 사회 관계망 서비스에 올린 사진이 화제다. 요사이 품귀를 빚는다는 신상 캔 맥주와 과자를 한 프레임에 담았다. 사진 위에 달아놓은 제목이 시선을 끈다. “이렇게 같이 먹어.” 나는 이런 조합으로 먹는다는 말인지, 네들도 나처럼 먹어보라는 뜻인지 의중을 파악하기 어렵다. 자랑을 넘어 살짝 약 올리는 것도 같다. 네들은 이런 거 없지~?
절주 중이었다. 다음 달로 예비한 건강검진을 대비해 벼락치기 공부하는 수험생처럼 음주 횟수를 줄였다. 알코올 섭취의 절대량도 제로에 수렴하게 낮췄다. 지난 두어 달 소주는 좀체 마시지 않았다. 맥주는 무알코올 제품으로 대체했다. 이것저것 다 마셔봤는데 양고기 꼬치에 곁들인다는 중국 회사 제품이 단연 으뜸이다. 진짜 맥주와 가장 흡사하다는 얘기다. 비슷한 처지의 건강 수험생들께 추천한다.
이웃나라 캔 맥주는 참을 수 없었다. 우연히 짧은 동영상 콘텐츠를 보았다. 뚜껑 전체를 들어 올려 따는 것부터 센세이셔널했다. 커다란 싱크홀 같은 구멍으로 크림 거품이 봉곳이 올라온다. 지금껏 세상에 존재하던 캔 맥주에서 볼 수 없던 비주얼이다. 이건 못 참지.
출근 직후 업무에 전념하지 않았음을 자백한다. 메일 수신함을 얼른 확인하고 팀원들의 동태를 살핀다. 잠깐 사이에 뭔 일이 날 것 같진 않다. 편의점 애플리케이션으로 회사 주변 매장의 재고량을 검색했다. 거의 다 품절인데 맞은편 비즈니스 빌딩 지하 점포에 재고가 있다고 조회된다. 우산을 쓱 집어 들고 회사 로비를 나선다. 주인장께 물건 있냐고 물으니 한 상자 있단다. 다른 가게는 인당 네 캔까지만 파는데 특별히 손님에겐 다 주겠단다. 한 상자가 몇 개 들이인지 묻지도 않고 신용카드를 내밀었다.
맥주 상자를 어깨에 지고 회사 로비를 통과한다. 보안 직원분들 시선이 따갑다. 저건 뭐 하는 인간인데 오전 댓바람부터 술 상자를 사무실로 들이는 건가. 저러고도 월급을 받아 간다고? 오늘만 눈감아주시라. 로비 통과로 끝이 아니다. 사무실 자리까지 가야 한다. 자연스러워야 시선을 끌지 않는다. 상자를 어깨에서 내려 사무용지 옮기듯 성큼성큼 걷는다. 팀원들도 알아채지 못한 눈치다. 봤으면 팀장님 그거 뭐냐며 달려들었을 것이다. 그러면 그 즉시 언박싱, 하나둘씩 나눠주다 보면 수중에 남는 게 없다. 얘들아, 이따 점심 살 테니 이건 상자째 가져갈 수 있게 해 주라.
출근해서 일하고 있을 아내에게 메신저로 낭보를 전했다. 아내도 득템한 게 있단다. 마찬가지로 요새 세간의 이목을 끄는 신상 건어물맛 과자를 온라인 쇼핑몰에서 구매했단다. 네 봉지를. 그게 다냐고 물으니 구매 제한이 있단다. 오늘 주문했으니 내일 택배로 올 거란다. 하룻밤만 참고 내일 맥주에 곁들여 맛보자며 대화를 종료한다. 그러고 보니 아내도 출근 직후에 잠시 농땡이 피웠네. 이심전심 부창부수. 스물네 캔 들이 맥주 상자를 들고 퇴근길 만원 전철에 오를 자신이 도저히 없다. 오늘과 내일, 이틀에 걸쳐 열두 캔씩 회사 쇼핑백에 담아 밀반출을 꾀한다.
그리하야 엊저녁이다. 목욕재계하고 냉장고 앞에 선다. 그저께 미리 넣어둔 여섯 캔 한 묶음 가운데 두 개를 꺼낸다. 아내 앞으로 온 작은 택배 상자를 뜯는다. 과자 네 봉지가 칼잠 자듯 포개어 누웠다. 새우 과자보다는 작아서 감자, 고구마 과자 봉지 크기다. 너구나. 너도 요새 꽤나 몸값이 비싸다며. 홍당무 마켓에서는 한 봉지 오천 원이 시가(市價)로 통한단다. 파는 이나 그 돈 주고라도 사 드시는 분이나 참 열정적으로 인생 산다는 생각이다. 일하러 간 회사에서 술 사들고 오는 나도 대충 살진 않는 인간 같다.
대기업 총수가 부럽지 않은 순간이다. 그래, 나도 ‘이렇게 같이 먹어’요. 뚜껑 개봉 전에 맥주 캔 외장에 인쇄된 음용 방법을 찬찬히 다시 읽는다. 냉장고에서 최소 여섯 시간 이상 식히라는 건 했고, 섭씨 4도에서 8도가 적정 온도인데 너무 차가우면 외려 거품이 잘 일어나지 않는단다. 냉장실 문짝 알림 창을 보니 4도로 설정돼 있다. 5에서 10분 사이 잠깐 꺼내두면 자연스레 온도가 오르리라. 그 사이 과자 봉지를 먼저 개봉한다. 마침 아내도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욕실에서 나온다.
새우 과자보다 넓고 두툼하다. 시즈닝이라고 부르는 가루 양념이 고루 묻었다. 과자 중간에 녹색 입자가 점점이 보인다. 청양고춧가루인 건지 그걸 강조한 모사인 건지는 모르겠다. 와사삭 어금니로 깨물어 먹는다. 첫 감상은? 맛있다. 새우 과자에는 없는 단맛이 직관적으로 느껴진다. 대중적으로 금방 인기를 얻는 먹거리를 맛보면 대개 달다. 잘은 모르지만 인류는 단맛이 들어오면 일단 맛있다고 느끼는 듯하다. 단 음식 중엔 건강에 좋지 않은 것이 많다. 뜬금없는 소리겠지만 악마가 이브에게 권했던 선악과는 분명 엄청 달았을 것이다.
단짠의 조화가 기막히다. 거기에 요즘 유행하는 매운맛까지 더해졌으니 사실상 필승 공식인 레시피다. 저절로 맥주를 부른다. 마침내 그 순간이다. 캔 맥주를 따자. 경건한 마음으로 맥주를 평평한 테이블 위에 안착시킨다. 왼손으로 맥주 캔 기둥을 살포시 잡고 오른손 검지로 고리를 만들어 뚜껑 고리에 건다. 설명 그림처럼 뚜껑이 바닥과 수직을 이루도록 한 번에 뜯어서 딴다. 착, 하는 소리와 함께 맥주 캔 윗면이 시원하게 열린다. 허리를 세워 캔 입구 안쪽을 본다. 밀도 있고 부드러운 거품이 크림처럼 안쪽부터 차오른다. 마지막까지 안내에 충실히 따른다. 두 손바닥으로 캔을 감싸면 거품이 더 높게 올라올 거라는데 정말로 그렇게 된다. 아마 상온에 가까울수록 거품이 더 잘 일어나는 특성을 세심하게 이용한 것이리라.
아내와 짠 부딪칠 경황조차 없었다. 반사적으로 입술을 가져가 첫 모금을 마신다. 그 맛은? 과장이 없이 말하겠다. 참말로 그동안 캔 맥주나 병맥주에서 맛보지 못했던 호프집 생맥주의 그 맛이다. 생맥주 특유의 시큼하고 청량한 맛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그것도 원체 장사가 잘 돼서 케그(생맥주 드럼통) 교체 주기가 빠르고 노즐 관리도 잘 된 유명 호프집 생맥주 같은 맛이 난다. 맥주 회사 연구진이 무려 4년간 몰두한 결과물이라는 데 수긍이 간다. 탄산이 많은 생맥주를 깡통 용기에 담고, 윗면 전체를 뚜껑으로 삼겠다는 착안이 놀랍다. 윗면이 열린 깡통은 그것 자체로 훌륭한 맥주잔이 된다. 사람의 살 중 가장 얇고 부드러운 입술을 직접 대는데 상처 하나 없이 밀폐력을 유지한다. 경이로운 기술력이다. 아이디어와 실행 능력이 편의점 냉장고에 빼곡한 경쟁자를 하찮은 기타 나머지로 만들었다.
먹다 보니 이 과자, 분명 아는 맛이다. 세상에 전에 없던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비슷한 게 뭐가 있었더라. 두뇌 풀가동의 순간 맥주 한 모금이 성능 좋은 냉각수가 된다. 기억났다! 건어물 과자와 같은 회사 제품이 아니다. 일본과 한국에서 같은 이름으로 영업하는 대기업 L사의 식품 제조 회사에서 나온 오징어맛 과자의 그 맛이다. 거기에 매운맛을 더하면 딱 이 맛이다. 올 브랜드 뉴(whole brand new)만 위대한 것이 아니다. 이미 있던 것에 새 요소를 추가하고 대중이 열광하는 경향을 담아내는 작업도 칭찬받아 마땅하다. 오징어에서 왕좌를 물려받은 맥주 안주 먹태, 그것에서 출발하여 요즘 사람들이 좋아하는 매운맛, 청양고추로 엮어낸 아이디어와 조합, 제품 포지셔닝이 훌륭하다. 술안주 과자로 마케팅한 까닭인지 역시 중학생 딸아이는 엄마 아빠의 호들갑에도 심드렁한 반응이다.
술은 마시면 늘고 그렇지 않으면 준다. 한 동안 절주했더니 고작 340밀리리터 맥주 한두 캔에 취기가 오른다. 가깝고도 먼 나라에서 만든 맥주와 자랑스러운 우리나라 과자. 오묘하고 절묘한 조화가 맞춤한 듯 생경한 것이 이 즈음이어서 더 생각이 많아진다. 고가품 가방과 한정판 운동화만 달려가 줄 서서 사는 게 아니라 캔 맥주와 과자도 경쟁하며 전리품처럼 획득해야 하는 세상, 그것도 어리둥절한 건 마찬가지다. 모쪼록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 북한군 오경필 중사의 대사처럼 나의 조국 대한민국이 더 풍미 있는 맥주와 맛있는 과자를 부족함 없이 모두가 손에 얻을 수 있는 나라가 되는 날을 그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