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방 붙박이장 문에 기대어 놓은 다리미판을 꺼낸다. 들어낸 자리에 다리미가 웅크렸다. 분무기는 어딨더라. 아내 화장대 선반 구석에 조그만 연보라색 분무기가 화장품 대열로 숨어들었다. 삼종 세트를 들고 거실로 나간다. 멀티탭 전기 연장선을 끌어와 다리미 콘센트를 꽂는다. 싱크대 수도꼭지에서 분무기 물을 채운다. 소파 틈새에 고개를 박은 리모컨을 빼내어 티브이 전원을 켠다. 다림질에 열중하느라 백색 소음이 될 테지만 적막보다는 낫다.
안방 침대를 굴러다니며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렸다. 빨래를 널던 아내가 데시벨을 높인다. 오빠, 애 교복 윗도리 좀 다려줘! 군대 다녀와서 그런 건지 전에 와이셔츠 다리는 거 보니까 잘하더구먼. 나보다 나은 것 같으니까 놀지만 말고 좀 해줘. 칭찬을 수반한 업무 지시는 위력을 가진다. 그래? 정히 그렇다면야. 한 벌이야? 아니, 두 벌!
일전에 학교에서 지정한 교복점을 방문해 중학교 동복이며 하복, 체육복을 구입했다. 스마트 월드는 편리하지만 엄격하다. 아무 때나 가면 안 되고 모바일 시스템으로 미리 예약한 시간을 엄수해야 한다. 교복점 무거운 유리문을 몸으로 밀어 연다. 몇 분이냐, 아이 이름이 무어냐 묻는다. 죄송하지만 너무 혼잡해서 아버님은 여기서 기다려 주시고 아이와 어머님만 안쪽으로 모시겠단다. 뜻밖에 안으로 들어간 주인을 기다리는 강아지 신세가 된다.
미어캣처럼 고개만 들어 안쪽의 동태를 살핀다. 점원이 이끌어 시야에서 사라진 모녀가 다시 보인다. 전신 거울 앞에 선 아이가 턱을 당기며 팔다리를 쭉 뻗는다. 멀리서 언뜻 봐도 소매가 길어 손이 없다. 치마는 무릎을 덮는다. 모녀와 점원, 삼자 간 자못 진지한 토론이 이어진다. 한참 만에 아이가 자기 옷으로 갈아입고 나온다. 수선한 옷은 입학 전 며칟날 학교에서 찾아가세요. 안내를 듣고 나오는 순간에도 아이와 부모들이 쇄도한다.
내일이 입학식이다. 아내는 일찌감치 회사에 휴가원을 제출했다. 나는 어떡할까, 며칠 전 아내에게 물었었다. 그냥 출근하란다. 운동장이나 강당에 모이는 거창한 입학식 같은 것 없이 곧바로 미리 배정된 교실로 입장한단다. 심플하구먼. 나 때는 엄마, 아부지, 외할머니 총출동했던 것 같은데. 절차의 간소화, 군더더기 없는 실용주의가 시대가 추구하는 가치인 것에 이견이 없다. 다만 문득 허전한 기분은 왜 때문일까. 아이 교복 블라우스를 다리는 것으로 마음의 틈새를 메운다.
얼마 만에 만져보는 다리미인 것이냐. 생전 옷 다려 입을 일이 없다. 방송사에서 직장 생활하는 나는 대체로 격식 있는 옷을 입지 않는다. 청바지에 운동화, 후드 티가 근무복이다. 화이트 셔츠에 넥타이, 양복 재킷 입을 일이라면 일 잘했다고 상 받거나 심의 징계나 방송사고 때문에 벌 받는 때뿐이다. 언감생심 상 같은 것 바라지 않는다. 험한 일이나 안 겪으면 족하다. 양복 입을 일 달갑지 않고 그래서 옷 다려 입을 까닭도 여간해서 없다.
실력 발휘 좀 해볼까. 아내 말이 틀리지 않아서 군대에서 익힌 것이다. 요즘 군대도 그렇게 하는지 모르겠다만 이십몇 년 전 우리 부대에는 그런 전통이 있었다. 자대 배치받아 전입해 온 신병이 첫 휴가를 나갈 때면 내무반 실세 고참이 새 군복에 주름을 잡아 다려준다. 겨우 일병쯤 될까 싶은 맞선임은 다림질 노하우가 영 부족하다. 제대 앞둔 말년 병장은 성가셔서 그런 일 돌보지 않는다. 차기 내무반장 내정자쯤 되는 상병 선임이 친히 투박한 다리미를 잡는다. 그 정도 짬밥은 돼야 훈련소에서 받아온 망태기 같은 군복에 칼 주름을 새길 수 있다.
교복 블라우스를 다리미판에 펼친다. 어른 남자가 입는 군복 상의보다 아담하고 간단해서 널빤지에 난짝 내려앉는다. 포장 상태에서 눌린 옷 주름이 어지럽다. 아이 엄마는 첫 등교에 이렇게 입히고 싶지 않았나 보다. 포장지만 벗겨 바로 입힌 건지 집에서 깔끔하게 다시 다려 입힌 것인지, 안 보면 몰라도 보려면 보인다. 내 새끼가 집에서 사랑 담뿍 받고 자라는 아이라고, 어디에서든 알아챌 사소한 증명이라도 남기고 싶은 마음인지 모르겠다.
군대에서 했던 것처럼 능숙하게 분무기를 척척, 슉슉 쏜다. 다리미 열판에 손바닥을 가져간다. 뜨뜻한 열기가 올라온다. 예열 완료다. 등판을 펼쳐 아래 허릿단부터 넓게 펴서 다린다. 교복 치마 안에서 금세 다시 주름이 잡힐 부분이지만 정성스럽게 다림질한다. 다리미판 모서리에 왼쪽과 오른쪽 어깨 등판을 번갈아 끼워 다려낸다. 등판이 끝나면 앞판 차례다. 단추가 있는 쪽은 까다롭다. 뾰족한 다리미 머리를 단추 사이로 밀어 넣는다. 단추 없는 반대편은 거치적거릴 것이 없으니 식은 죽 먹기다. 양팔 주름이 백미다. 어깨 재봉선을 한 손 엄지와 검지로 잡는다. 다른 손 같은 손가락으로 소매 끝을 잡아 다리미판에 펼친다. 다시 한번 물을 분무한다. 다리미 잡은 팔뚝이 바닥과 수직이 되도록 체중을 실어 날카로운 직선의 주름을 만든다.
우선 한 벌을 완성하여 옷걸이에 건다. 예전 실력 어디 안 갔구먼. 새하얀 블라우스가 종이옷처럼 빳빳하게 펼쳐 나풀거린다. 양팔 주름이 벨 듯 절도 있다. 어때, 제법이지? 들으라는 건지 혼잣말인지 저절로 나오는 말이다. 냉장고를 열던 아내가 흘끔 본다. 응, 됐네, 잘하네, 역시. 이제부터 교복 다림질은 아빠가 전담하는 걸로.
뭐, 까짓것 이 정도 수고로움이면 못할 것도 없다. 가만, 이제 교복 입기 시작했으니까 중학교 삼 년에 고등학교 삼 년, 합이 육 년이다. 자그마치 육 년 동안 쉬는 날마다 다리미판 앞에 양반다리로 앉겠구나. 군대에서도 길어야 이년 몇 달 남짓이었는데 그 세 배는 된다. 앞으로 육 년은 꼼짝없이 다림질할 운명이다. 그래, 그게 뭐 대단한 수고겠니. 아빠는 그저 중학교, 고등학교 올라갈 우리 딸 앞날이 다리미로 편 것처럼 판판하게 펼쳐지길 바랄 뿐이다. 요새 학교 폭력이다 무어다, 자식 학교 보내는 마음이 편하지 않은 세상인데 공부 잘해서 성적 좋은 것보다 평탄하고 완만한 학교생활, 그게 제일인 것 같거든.
나머지 한 벌을 마저 다려 아이 방 옷걸이에 걸었다. 딸, 아빠가 옷 다려놨으니까 아침에 여기서 꺼내 입어. 새로 받은 교과서로 책가방을 싸는 아이는 들은 둥 마는 둥이다. 아휴, 저 어린이가 언제 커서 벌써 교복 입고 중학교에 간다냐. 세월이 쏘아놓은 살 같아서 감개가 무량할 따름이다. 내일 저마다 새 학교 교문을 통과할 이 땅의 어린이와 청소년, 혹은 청년, 그 푸른 영혼들의 위대한 출발을 축하하고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