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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on Jan 18. 2023

아픈 손가락과 명동교자 칼국수 폭풍 흡입하는 방법

  팀원 Y와 점심을 먹는다. 구내식당 말고 외식이다. 명동교자 가서 칼국수 먹을까, 좋죠. 먹어본 적 있느냐 물었다. 아주 오래전에 친언니와 쇼핑 다가 맛본 기억이 있단다. 날씨도 추운데 후루룩 면발에 뜨끈한 국물 제격이지, 좀 먼데 걸어가도 되겠느냐 묻는다. 맛있는 거 먹으러 가는데  걷죠 뭐, 한다. 가자.


  Y는 재작년 입사했다. 다른 방송사에서 일하다 온 경력사원이다. 그 해 연말 새 직장에서 첫 인사평가를 받았다. 우리 회사의 인사평가 체계는 상대평가다. 다 같이 업무 성과가 훌륭해도 가장 덜 훌륭한 누군가는 최저 등급을 받아야 한다. 공연한 희생자를 양산하는 시스템이다. 팀장인 나도 불만이 크다. Y가 첫 평가에서 최저 등급을 받았다. 내가 그렇게 주었다. 유독 다른 팀원들의 업무 실적이 우수했다. 경력이 있지만 초심자인 Y는 비교 열위일 수밖에. Y를 배려하겠다고 멀쩡히 일 잘한 다른 누구를 희생시킬 수도 없었다. Y는 나의 아픈 손가락이었다.


  평가 면담 때 이런 사정을 Y에게 솔직하게 말했다. 괜찮습니다, 제가 더 열심히 할게요, 팀장님. 그 말에 미안한 마음이 더 커졌다. Y는 이듬해에 말한 바대로 실행했다. 성실한 건 물론 일머리가 있다. 요령 피우는 법이 없이 요령이 있다. 난이도를 높여 업무를 주었다. 일전에 방통위(방송통신위원회 : 방송과 통신에 관한 심의를 위해 만들어진 국가기관)에서 공문이 왔다. 그런 문서는 표지만 봐도 가슴이 철렁한다. 우리 방송사가 또 뭐 잘못한 거 있나. 그중에서 내가 맡은 분야가 있는 건 아닌가. 반갑지 않은 편지다. 방통위에서 우리 방송사가 방송화면에 표시하고 있는 정보 가운데 언뜻 규정에 맞지 않는 것이 있을 수 있으니 검토해서 자체 시정하라는 내용이었다.


  Y를 호출했다. 그전에 상급자인 본부장에게 상황을 보고한다. 팀장의 요령이 절실히 요구되는 순간이다. 낱말 하나, 표현 하나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상관의 반응이 다르다. “방통위로부터 공문을 받았습니다만 심사에 부쳐 엄하게 처분하겠다, 그런 기조는 아닙니다. 기회를 먼저 줄 터이니 스스로 돌보아라, 하는 건데 차재에 일제 점검하겠습니다.” 본부장도 격하게 반응하지 않았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Y에게 ‘체크 리스트’를 만들어 우리가 점검할 수 있는 건 하고, 안 되는 건 유관 부서의 협조를 받으라고 지시했다. 아니다, 다른 팀장과 통화는 내가 할 테니까 우선 목록을 꼼꼼하게 만들어 달라고 주문했다. 방송법 규정이나 세부 규칙이 여러 법제 조항에 산재할 텐데 그것들부터 그러모으는 게 쉽지 않을 거라고 귀띔했다. 수고롭겠지만 그래서 너에게 지시하는 거라고 덧붙였다.


  결과물은 대만족이었다. 데드라인을 엄수했음은 물론이다. 대충 봐도 성의가 있어서 대충 하지 않은 게 느껴졌다. 이거 만들겠다고 며칠 고생했겠구나 싶었다. 잘했다 칭찬하려는데 도로 빼앗아갈 것처럼 보고서에 손을 뻗는다. “실은 팀장님께 드리기 바로 전에 심의실 담당자랑 확인차 통화했는데요, 하나만 더 포함시키면 좋을 것 같다고 해서요. 조금만 시간 더 주시면 그것까지 수정해서 다시 드릴게요, 팀장님.” 마지막 한 조각에도 정성을 들이는 업무 태도가 대견하고 기특했다. 그랬으니, 지난 연말 인사평가 때 팀장으로서 최고 등급을 안 주려야 안 줄 수 없었다. 1년 만에 최저에서 최고 등급으로. 회사 조직 안에서 일어나는 작은 드라마다.


  본점 말고 분점으로 가자. 내가 먹어봤는데 큰 차이 없더라. 본점은 대기 줄만 하세월이야. Y가 수긍한다. 예상한 대로 바로 입장했다. 뭐 드릴까요, 칼국수 둘이요. 오리털 점퍼를 벗어 의자 등받이에 채 걸치기도 전에 음식이 먼저 나온다. 칼국수는 햄버거보다 빠른 패스트푸드다. 국뽕이 차오른다. 이 비주얼 오래간만이네. 그릇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옆에 맛깔스러운 마늘 김치도 격조했다. 이 집 칼국수에 마늘 김치가 빠지면 산초 없는 돈키호테, 로빈 없는 배트맨, 피펜 없는 조던, 조세호 없는 유재석이다. 마늘 양념이 담뿍 들어있는 겉절이 김치가 중간중간 입맛을 개운하게 씻어준다.


  ‘민찌’라고 잘못 부르는 돼지고기 고명이 인상적이다. 잘난 체하자면, 민찌는 영어 민스(mince : 잘게 썰다, 다지다)가 이웃나라 일본을 건너며 발음이 달라진 이름이다. 중국식 만둣국 완탕에서 이주해 온 것 같은 만두도 네 개쯤 자리를 잡았다. 팀원 Y 몫의 그릇을 슬쩍 보니 그쪽도 네 개다. 음, 이게 정량이구만. 비슷한 크기로 썬 양파와 애호박, 쪽파도 보인다. 다진 고기와 함께 볶았는지 거뭇하게 그을렸다. 국물 색깔도 여느 칼국수와 다르다. 옅은 황톳빛으로 ‘난 좀 달라!’ 첫인상을 뽐낸다. 면발 역시 보통의 칼국수보다 얇고 하늘거린다. 어설픈 면치기 실력으로는 칠칠맞지 못하게 앞섶을 더럽히기 십상이다.


  Y야, 국물 어떠니? 크으, 끝내주는데요. 여부가 있으려고. 국물이 끝내준다. 영하권 날씨와 맞춤한 온도와 점성, 소금 간이다. 감칠맛이 탄수화물 섭취를 지연시킨다. 면발을 집어 들기 전에 하마터면 국물 절반을 원샷, 아니 반샷 할 뻔했다. 맛있지? 맛있는데요. 죽이지? 죽이는데요. 뜻 없는 문답만 주고받다 식사가 끝나간다. 마성의 진미에 현혹되어 팀장과 팀원 사이에 그럴듯한 근황도 나누지 못했다. 요즘 회사생활 좀 어떠니, 크게 힘든 건 없고? 새해 소망은 뭐니, 아바타는 봤댔나, 따위의 질문은 면발을 들이켜며 눈빛으로 보냈다. 답변 역시 같은 방법으로 돌아온다. 아니, 돌아온 것 같다.


  팀장님 잘 먹었습니다. 아냐, 약소하지. 다음에 더 맛있는 것 먹자. 일확천금의 행운을 잠깐 빌며 Y에게 훗날을 약속했다. 기분 좋은 포만감에 마음까지 넉넉해진다. 날이 좀 풀린 건가. 점퍼를 미처 여미지 않았는데 아까보다 덜 춥다. 회사원의 영원한 미스터리를 곱씹는다. 점심 사 먹고 나면 배가 불러서 안 추운 걸까, 아니면 진짜로 기온이 오른 것일까. 굳이 정답을 구하지 않고 회사로 돌아온다. 양치질하고 왔더니 Y가 파티션 너머로 무언가 쓱 내민다. 팀장님, 이거 드세요. 캐러멜이다. 그.. 그래, 잘 먹을게. 책상 서랍을 열어 칫솔과 함께 수납한다. 나중에 달달한 것 당기면 꺼내 먹을게. Y야 잘하고 있다 너, 지금처럼만 가자. 아, 단 거 줬다고 하는 말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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