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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on Nov 14. 2022

대주가 아닌 애주가가 증류식 소주 즐기는 방법

  대주가(大酒家), 말 그대로 술을 많이 마시는 사람을 뜻하는 한자어다. 어학 사전에 정식으로 등재된 낱말이다. 나는 대주가 아니고 애주가다. 술을 흠모하여 아낀다. 아끼지만 아까워하진 않는다. 그럼에도 두주불사는 못 되고 적당히 즐긴다. 아니다, 솔직해야지. 적당하지 못하고 지나쳐서 술에 지는 때도 없지 않다.


  무엇 때문에 술에 지는 것이냐. 술을 꼭 이기려고 들어야 하냐만 나름의 까닭을 따져 본다. 나는 술을 섞어서 마신다. 유사 과학일는지 모르겠으나 흔한 속설을 상기한다. 주종, 그러니까 술의 종류를 섞으면 대취한다. 아주 근거 없는 얘기는 아닐 듯도 하다. ‘소맥 폭탄주’ 몇 순배 돌면 다들 왜 초장에 그렇게 취하겠는가. 소주 분자들 사이로 촘촘히 침투한 맥주 분자의 활약을 상상한다.


  그러면 왜 술을 섞는가. 폭탄주를 즐긴다는 얘기가 아니다. 술 마시는 하룻저녁에 여러 주종을 넘나 든다는 말이다. 안주, 음식과의 조화 때문에 그렇다. 본디 나는 진득한 인간이 못 된다. 먹는 것도 마찬가지다. 고기 먹었으면 다음에는 해산물이다. 배 어지간히 채우면 간단한 주전부리 들렀다가 다시 뜨끈한 국물로 가는 것도 좋다. 어디서 주워듣고 분수에 안 맞게 입맛만 고급이다. 육고기에 적포도주 마시고 물고기에는 백포도주, 간단한 마른안주에 맥주 마셨다가 다시 국물에 청주 곁들이는 식이다. 없어서 못 마시지, 위스키로 마무리하는 것도 좋기만 하다. 이러니 술을 이길 재간이 없다.


  그 여정에 소주는 없었다. 네 주제에 서민의 영원한 반려자를 무시해? 그런 게 전혀 아니다. 안타까운 사연을 들어보시라. 때는 20세기의 끝을 몇 해 앞둔 시점, 필자는 대학 문에 들어 본격적인 음주 인생을 시작한다. 단과대와 동아리, 고교 동문회 등 온갖 신입생 환영회의 테이블에 주로 오르는 술은 막걸리 아니면 소주였다. 지금처럼 순한 16도 소주는 세상에 없던 시절이다. 자그마치 알코올 25도 도수의 빨간색 뚜껑 소주. 우아하게 돌려서 열지 않고 탄산음료처럼 병따개로 여는 박력 있는 액션, 그것부터 중압감으로 다가온다. 겨우 맥주의 쌉쌀함을 알아가는 초심자인 나로서는 시작부터 끝판 왕을 만난 셈이다. 맥주는 대학생들에겐 비싼 술이었다. 선배들과의 술자리는 늘 고역이었고 소주는 점점 더 싫어졌다. 소주는 취하기 위해 마시는 무색의 액체에 지나지 않았다.


  술에 대한 나의 관심과 애정은 그렇게 소주를 비껴갔다. 직장에 취직하고 돈 벌기 시작하면서 맥주 정도는 사 마실 수 있었다. 포도주도 접하게 됐지만 2000년대 중반까지는 진입장벽이 높았다. 그러다 유통사가 늘어나면서 한 병에 1, 2만 원하는 저렴한 것도 많아졌다. 맥주 중에 톡 쏘는 라거 맥주만 있는 게 아니라, 부드러운 밀 맥주, 향긋한 에일, 묵직한 흑맥주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편의점 맥주가 보급되면서 국내 양조장에서 만드는 수제 맥주도 맛볼 수 있었다. 일본식 선술집에서 파는 청주도 좋았다. 대형 마트에 가면 심오한 위스키의 세계도 기웃거렸다. 오직 소주만 아니었다. 트라우마가 된 그것은 얼른 취하기 위한 소맥 폭탄주의 주재료 정도로만 취급했다.


  그러다 증류식 소주라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유행에 민감하지 않으나 궁금한 것은 못 참는다. 뭐든 알아야 별 것 아니네, 치워둘 수라도 있다. 유명 힙합 가수가 지역 양조장과 힘을 합쳐 오리지널 브랜드의 소주를 출시했단다. 녹색 병에 든 희석식 소주가 아니라 증류식 소주란다. 그건 또 무슨 맛일까. 잘은 모르지만 증류식 소주는 희석식 소주보다 향과 풍미가 좋다고 들었다. 그런 것이라면 빨간 뚜껑 소주의 어두운 기억을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


  증류식 소주는 희석식 소주보다 귀하고 비싸다. 만드는 방식 때문에 그렇다. 희석식 소주는 말 그대로 알코올 원액인 주정에 물과 감미료, 기타 첨가물을 섞어서 만든다. 원액을 몇 배로 불려서 만들 수 있으니까 값이 저렴하다. 대신에 별다른 향과 풍미가 없다. 증류식 소주는 쌀이나 고구마, 다른 곡물을 발효시킨 다음 그것을 끓인 증기를 식히고 걸러서 만든다. 이슬 같은 방울방울을 힘들게 모아서 만드는 것이니 귀하고 비쌀 수밖에. 발효에 쓰이는 누룩의 종류, 증류와 숙성의 방식에 따라 맛과 향이 천차만별이란다. 골라서 마시는 재미가 있겠다.


  힙합 가수가 만든 소주를 반드시 손에 넣기로 결심한다. 듣자 하니 특정 편의점을 통해 수도권에 유통한다고 한다. 편의점 회사에서 만든 애플리케이션을 스마트폰에 내려받는다. 상품을 검색해서 재고를 보유 중인 점포를 찾아주는 기능을 활용한다. 지도와도 연동이 돼서 어느 점포에 몇 병이 남았는지를 정확히 표시한다. 엇, 집 바로 앞 편의점에는 없고 조금 더 가야 있는 곳에 두어 병이 남았다. 저녁때까지 팔리지 않아야 할 텐데. 퇴근길 발걸음이 오랜만에 재빠르다.


  맛이 어땠냐고? 희석식 소주와는 달랐다. 희석식 소주는 냉장고에서 차게 식혀서 향을 맡지 않고 단번에 털어 넣으며 마신다. 크, 하며 올라오는 뒷맛을 맛이 강한 안주로 덮는 게 맛이라면 맛이다. 증류식 소주는 너무 차게 해서 마시지 않는다. 온도가 내려가면 아까운 향을 맡을 수 없게 된다. 살짝 머금어 마시면 과일 향이 상큼하고 목으로 넘어가는 게 부드럽다. 힙합 가수가 내놓은 술의 경우, 산뜻한 향과 자연스러운 단맛, 혀에 닿는 끈적한 질감이 특징이다.

  알고리즘은 귀신보다 무섭다. 증류식 소주를 다루는 콘텐츠를 들이민다. 정통한 크리에이터는 힙합 가수의 술보다 세상에 나온 지 훨씬 오래된 다른 증류식 소주를 추천했다. 대형 마트 진열대에서 흔하게 보던 술인데 저 술에 런 노력과 수고를 담았구나. 놀랍게도 도자기를 만드는 회사의 창업주가 전통 소주에 뜻을 품고 십여 년 전에 세상에 선보인 술이란다. 십 년 넘게 고전하다가 세상이 그 가치를 알아주기 시작해 몇 해 전 드디어 흑자 전환을 이루었단다. 술 이름의 작명도 근사하다. 소주의 불사를 소(燒) 자를 파자하여 한 음절씩 두 글자 이름을 붙였다. 바로 사다가 맛을 보았다. 이 좋은 술을 왜 진즉에 몰랐을까. 향긋하고 부드럽다. 다른 증류식 소주도 다르지 않지만 특히 음식과의 조화가 훌륭하다. 희석식 소주처럼 안주로 씻어내는 게 아니라 입 안에서 맛나게 어우러진다.


  강남에서 고급 요리 주점과 식당 여러 곳을 운영하는 친한 선배 형이 있다. 형이 오래전 창업을 준비할 때 우리나라 지역 특산주를 취급하려고 갖은 노력을 다했었다. 안정적인 공급, 원활한 유통망 등의 현실적 한계에 부딪혀 포기하면서 정말 아쉬워했다. 그러다 결정한 게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의 청주였다. 일본은 같은 현 안에도 여러 곳의 양조장이 있단다. 나는 형처럼 창업의 꿈같은 건 없지만 달라진 미래를 기대한다. 우리나라의 전통 증류식 소주가 더 발전하여 편하고 친근하게 다양한 술을 맛볼 수 있는 날. 국민 모두가 대기업이 제공하는 초록 병 소주만이 아니라 마을의 숫자만큼이나 다채로운 증류식 소주를 즐길 수 있게 되는 때.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송강호 배우가 연기한 오경필 중사의 대사가 퍼뜩 떠오른다. “어이 이수혁 병장, 내 꿈은 말이디 온젠가 우리 공화국이 남조선보다 더 맛난 과자를 만드는 기야. 알갔어? 그때까진 이 초코파이를 구리워 할 수밖에.” 오 중사의 소망이 내 것과 다르지 않다.


  이쯤 되면 애주가를 넘어 스스로 대주가임을 인정해야 하는 것 아닌가 싶다. 양으로만 많이 마시는 게 아니라 여러 종류를 섭렵하는 것도 범주에 끼워준다면. 이제 증류식 소주까지 입문했으니 누군가 술꾼이라고 나무라도 할 말 없다. 비 그치니 날이 차진다. 겨울이 깊어 가고 벗들과 한 해 보내는 자리도 하나 둘 날짜를 꼽아 간다. 그날 처음 몇 병은 증류식 소주로 시작하자고 권해볼 생각이다. 대기업 소주보다 얼마쯤 술값이 더 들겠지만 뭐 어떠하랴. 특별한 어느 밤의 의미 있는 지출이라고 여긴다면. 좋은 술은 역시 좋은 사람들과 함께. 애주가 가운데 사람 싫어하는 이 없고 그 역시도 좋은 사람인 때가 늘 많았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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