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어 달 전, 필자가 벌이하는 방송사의 보도국에서 야심 차게 새 방송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토요일과 일요일을 뺀 나머지 평일 오후, 종전에 오락 프로그램 재방송을 방영하던 시간에 긴요한 본방송 프로그램으로 배치됐다. 종일 정치 뉴스 일색인 자사 보도 프로그램 사이에서 국내외에서 일어난 사건, 사고 중심으로 차별화하자는 구호 아래 기획된 프로그램이다. 그것이 장르적 다양성을 위시한 시청자 주권을 확대하는 길이기도 해서 큰 의미가 있었다.
지금까지의 성과만 보면 참담하다. 일단 최초의 기획부터 흔들렸다. 방영 초기에 작심한 대로 정치 이슈가 아닌 사건·사고 중심으로 아이템을 주로 다루었으나 준비가 충분치 못했다. 정치 아이템을 위한 방송 구성은 간단하다. 정치적 사안을 하나 두고 찬반 두 진영의 목소리를 내는 전현직 정치인이나 시사 평론가를 배석한다. 진행자 혹은 앵커는 최소한의 기계적 중립을 지키면서 방송 분량을 채워 가면 된다. 사건이나 사고 중심의 구성은 그것보다 고난도다. 이슈에 대한 보다 다양한 해석과 접근, 풍부한 자료, 더욱 노련한 진행이 필요하다. 프로그램 시청률은 이전 오락 프로그램 재방송보다 극적으로 나아지지 못했다. 결국 정치 아이템 위주로 선회하여 여타 프로그램과의 차별성을 잃어가는 중이다. 문제는 그렇다고 시청률이 개선되지도 못했다는 점이다. 큰 기대 속에 새로 태어난 프로그램은 그렇게 자기 색깔을 잃어가고 있다.
상황이 거기까지면 차라리 낫겠다. 신규 프로그램까지 정치 이슈로 일관하는 자사 보도· 시사 프로그램들은 이제 아침부터 저녁까지 특정 정치인에 대한 비판을 넘은 비난, 그것을 상회하는 비방의 경계를 외줄 타기 한다. 전체 시청률 성과만 보면 준수한 편이어서 경쟁사에 충분히 어깨를 견주는 수준이다. 정치적 편향에 대한 의도가 전혀 없었다고 할 수는 없으나 충성적 시청자, 즉 수용자에 소구하는 측면에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었다는 변명도 아주 외면하긴 어렵다. 이러나저러나 안타까운 현실이다.
언론의 정치적 편향성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정치 행위자로 일컬어지는 언론이 특정 정파에 대한 이념적 의제를 지속적으로 추구할 때가 아니라 외려 그것으로부터 거리를 두어 사실 보도를 우선할 때 정치적 영향력이 생긴다는 역설도 확인한 바 있다.(Cook, 1998) 하나, 한국 언론은 이러한 원리를 간과하고 스스로 정치 권력화하여 정치 기관처럼 행동하고 있다는 지적도 있었다.(최진호, 2012) 한국 언론의 정파성 자체가 아니라 그것의 정도 혹은 구현 방법에 문제가 있다는 연구도 잇따랐다.(김영욱, 2011) 아닌 게 아니라 필자가 속한 방송사도 그 정도가 끝 간 데 없이 나아가는 것 같아 걱정이다.
저널리즘의 위기를 상징하는 것으로 ‘기레기’를 대신할 낱말이 있을까. 민중의 공기이자 날 선 감시자로서 독자와 시청자, 수용자들의 지지를 받던 ‘기자’라는 직업은 대중의 인식 속에서 사라진 지 오래다. 아니, 멀쩡한 기사를 두고도 혀부터 끌끌 차면서 ‘저 기레기 또 또 거짓말..’ 하는 조롱성 댓글이 거의 모든 기사에 달렸다. 유시민 씨는 어느 방송에 출연하여 직업인으로서 기자에 대한 본인의 인식을 이렇게 술회했다. “나는 기자라는 직업에 대해 다르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언론의 공적 책임에 대한 기대 역시 환상에 불과하다. 기자라는 것은 결국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미디어 컴퍼니, 즉 언론사에 속한 정보 유통업 종사자로 봐야 한다.”는 발언에 공감의 댓글이 줄기를 이룬다.
언론학 연구의 초기 이론 가운데 기능주의 학파라는 것이 있다. 언론의 주요 기능 가운데 환경 감시의 기능이 있고 그것은 다른 말로 정보 제공 기능이라고 한다. 수용자에게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그것이 곧 사회 환경을 감시하는 기능의 토대가 된다는 이론이다. 이 같은 기능적 이점 때문에 언론은 존재에 대한 근원적 당위를 인정받는다. 한데 그것이 오늘날 대한민국에도 통용되는 이론이냐면 필자는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환경 감시, 정보 제공의 기능은 이른바 메이저 언론사부터 결여되거나 외면하고 있는 인상이다. 현 정권 출범 이후 연일 악화되고 있는 무역수지, 경상수지 적자나 대중국 교역량 급감, 그로 인한 경제적 악영향에 대한 경제 통계를 다룬 뉴스 보도는 중앙 일간지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수용자의 경제생활에 요긴한 정보는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심지어 그것을 전혀 다른 결론으로 이끄는 언론사와 기자를 두고 징벌의 대상이 아니라 폐기물 정도로 취급하는 표현은 차라리 관대하다.
인공지능의 출현과 발달은 언론에 또 얼마나 위협적인가. 스포츠 경기 결과나 간단한 발생 기사 따위는 사람 기자보다 자연스럽게 써 내려가는 인공지능, 이른바 로봇 기자의 등장에 놀랐던 것도 이미 지나간 일이 됐다. 되레 인공지능이 기사를 쓰면 최소한 의도적인 사실 왜곡은 줄어들거나 없어지지 않겠느냐는 비아냥 섞인 기대가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인공지능의 발달이 직업의 종말을 촉발할 것이고 그 가운데 기자라는 직업도 결코 예외가 될 수 없을 거라는 전망이 설득력을 가진다. 기사 말미에 달린 이른바 ‘바이라인’에 실존 인물인 어떤 기자의 것이 아니라 소프트웨어 이름과 버전이 달린 기사를 흔하게 접할 수 있는 날이 언제고 도래할 것을 생각하면 언론사에서 벌이하는 필자 역시 생계에 더 없는 불안을 느낀다.
해법은 간단하고 진리는 늘 단순한 것에 있다. 핵심은 실천에 대한 의지이고 동시적이고 다차원적인 노력이다. 저널리즘의 권위에 대한 회복만이 유일한 살 길이다. 권위는 어디에서 오는가. 인정과 신뢰에서 출발한다. 상대가 가진 능력, 그것에서 기인한 결과물에 대해 고개를 끄덕여 존중, 존경할 수 있으려면 그의 작업이 믿을 만한 것이어야 한다. 맥퀘일(McQuail, 1992)은 언론이 절대적 객관성을 유지하는 것은 본래부터 불가능하다고 설파했다. 그렇더라도 최소한의 상호 객관성이라도 가지려면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부터 정비해야 한다. 바람직하지 않지만 정치적 편향성도 일면 수긍한다고 치자. 적어도 그 정도와 농도가 낮고 묽은 기사를 제공하려고 노력해야 옳다. 기자로서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아서 통계 데이터나 수치에 대한 합당한 해석이 기사에 녹아야 한다. 객관적 수치를 두고도 추이를 반영하지 않거나 앞뒤를 잘라 전혀 말이 안 되는 결론에 이르게 하니 조롱과 무시를 사는 것이다. 쌀로 밥 짓는 얘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기본을 간과할 수 없기에 하는 말씀이다.
시장의 왜곡도 돌아보아야 한다. 시장주의와 다원주의를 표방하는 기능주의 이론은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완전히 설득력을 잃었다. 언론사도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이므로 수요와 공급의 시장 논리를 적용받는 시장 선택의 대상에 다름 아닐진대 실상은 그것과 무척 다르다. 독자와 시청자, 수용자로 일컫는 미디어 소비자가 그들의 경제 활동을 영위하는 데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언론사만이 시장에서 생존해야 맞는데 전혀 그렇지 않은 곳이 더 큰 시장 지배력을 영위한다. 시장이 왜곡됐기 때문이다. 소비자의 니즈를 충족하는 재화나 서비스를 생산하지 않는 기업이 지속 가능성을 가진다는 건 기업의 이윤을 소비자의 선택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충분히 조달할 수 있다는 방증이다. 언론이 수용자가 아니라 정치나 경제 권력과 유착 관계를 형성하는 데 총력을 기울인다는 합리적 의심은 일견 당연하다. 왜곡된 시장은 종국에 말 그대로 시장 실패를 피할 수 없다. 수용자, 즉 소비자가 감시할 수밖에 없다. ABC, 발행 부수 인증제와 같은 논의를 해묵은 그것으로 치부할 수 없는 이유다.
인공지능은 기회다. 인공지능의 주효한 특징 중 하나는 의도한 대로 학습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인공지능의 발전 단계에도 순서가 있어서 개발자의 의도대로 학습하여 성장하는 인공지능은 초기 단계의 그것이다. 보다 발전된 인공지능은 개발자 혹은 조련자의 의도대로 학습하지 않고 인공지능이 스스로 도출한 최적의 결론을 살펴볼 때 개발자가 추론의 과정을 이해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른다. 이것을 언론 환경에 대입하면 최대한의 객관성을 담보하는 장치이자 방법론으로 활용하는 아이디어도 가능하다. 인간 기자의 사적 욕망, 혹은 집단으로서의 언론사가 가지는 확대된 사적 욕망을 배제하고 아주 낮은 농도의 정치적 편향성을 목표로 한 기사를 작성하는 데 인공지능이 훌륭한 조력자가 될 만하다. 언론사가 선제적으로 인공지능을 활용하고 때로는 그것을 인증하는 장치도 제공한다면 잃어버린 신뢰와 인정, 권위를 회복하는 귀중한 방편이 될 수 있다.
수용자로부터 외면받다 못해 조롱이 일상화된 대한민국의 저널리즘, 소비자에게 선택받지 못하는 제품을 생산하는 기업, 나아가 산업은 단연코 생존할 수 없다. 필자는 얼마 전 방영을 시작하여 아직 자리 잡지 못하고 있는 필자가 속한 방송사의 프로그램이 어서 본래의 색깔을 회복하고 어엿한 간판 프로그램의 대열에 합류하기를 진정으로 바란다. 특정 정파를 종일 비난하는 정치 아이템으로 얻을 수 있는 손쉽고 달콤한 성과에 미혹되지 않고 저널리즘의 본령을 세우는 데 일조하기를 간절히 원한다. 필자의 일터인 방송사가 대중으로부터 폭넓은 지지와 응원을 받는 저널리즘의 전초 기지가 되기를 무엇보다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