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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on Dec 22. 2023

가장 슬픈 새벽

  필자는 지난 2005년 방송사에 처음 취직했다. 그동안 회사 조직 안에서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의사 결정을 때때로 목격했다. 이따금은 손실이 명역관화인 결정도 있었다. 그것은 금전적인 가치만 가리키지 않는다. 브랜드 가치나 시청 주권 같은 것까지 아우른다. 정치적 편향성이 도드라지는 순간도 있었다. 그러나 언론 보도의 기능을 가진 방송사로서 최소한의 완결성은 갖추어 왔다. 때문에 구성원의 한 사람으로서 업무적 자존감까지 상처 입는 일은 좀체 없었다.


  회사는 중대한 보도 사안을 앞두고도 늘 미리 전열을 정비하지 못한다. 뉴스 특보나 특별 편성 직전까지 우왕좌왕한다. 채널 번호 앞뒤로 이웃한 다른 방송사의 준비 상태나 편성 계획을 살피는 일은 당연하고 타당하다. 다만 그것이 지나쳐 남의 눈치만 보는 것 같을 때도 더러 있다. 갈팡질팡 하는 탓에 방송사고의 위험을 초래하는 일은 조직 상부에서부터 경계해야 한다. 방송 편성 담당자로서 시청률 성과를 극대화하면서도 운영 상의 안정성을 도모한다. 그것은 오래 일했지만 여전히 간단하지 않은 일이다.


  몇 주 전 새벽이 그러했다. 그날은 부산 엑스포 유치의 성패가 결정되던 날이었다. 며칠 전부터 보도국과 관련 뉴스특보 편성에 대한 협의가 있었다. 미리 확정하여 편성표에 반영하지는 못했다. 역시나 경쟁 방송사들과 마지막까지 눈치 싸움을 피할 수 없고 행사 당일의 일정에 대해 변수를 살펴야 한다는 이유 때문이다. 오늘도 잠은 다 잤구나, 수면의 포기는 직업 선택의 필연적 결과다. 다만 방송사고 같은 절체절명의 위기만 도래하지 않길 바랄 뿐이었다.


  오락 프로그램 본방송 때문에 간단하지 않았다. 하필 당일 밤 우리 방송사의 주력 오락 프로그램의 최종회 방영이 예정돼 있다. 프로그램의 특성상 대결 구도에서 최종 우승자를 가려내는 내용이어서 귀추가 주목됐다. 보도본부에서는 오락 프로그램 본방송 중에 개최지 선정이 발표되면 급하게 뉴스 특보 편성을 취소해야 할 수도 있다고 알려 왔다. 필자는 후속 프로그램의 긴급 편성 변경에 대비하려면 최소한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회신했다.


  보도본부 기자 인력 여럿이 속한 단체 메신저 대화방에 필자도 소환됐다. 개최지 발표 현지인 프랑스 파리 특파원과 급파된 보강 취재 인력들이 보내오는 현장 소식과 뉴스 특보 제작진의 준비 상황 점검으로 대화방 활자가 분수대처럼 뿜어져 올랐다. 아니나 다를까, 당초 취재진에게 배포된 계획보다 시간 지연이 거듭되고 있단다. 오락 프로그램 본방송 중간에 허무하게 개최지 발표가 앞서는 일은 없을 예정이다. 외려 문제는 개최지 발표가 너무 늦어져 이미 시작한 뉴스 특보에서 시청자들에게 제공할 현지 상황과 그림이 없는 일이다. 그때 내 휴대전화가 다급하게 울렸다. 뉴스 특보에 배정된 부조정실 담당 프로듀서가 오락 프로그램 종료 후에 최대한 시간을 벌어달라고 요청해 왔다.


  미리 알려달라고 그러지 않았느냐고 따질 겨를도 없이 곧바로 다른 연락망을 가동했다. 다행히 시청자들이 알아차리지 못하게 매끄럽게 대처하여 뉴스 특보 제작진이 요구한 준비 시간을 벌어주었다. 그러면서 다른 방송사의 방송 화면을 비교해 보았다. 지상파 한 곳은 예정에도 없던 뉴스 특보를 무려 한 시간 전부터 긴급 편성해서 방송 중이다. 계획에 없던 일이라는 것은 어떻게 알았느냐. 위성 방송이나 IPTV, 디지털 케이블 TV와 같은 유료 방송 셋톱 박스에 딸린 리모컨을 조작하면 방송 화면 하단에 프로그램 제목과 같은 편성 정보가 표시된다. 이때 화면 하단 제목과 실제 방송이 다르다면 긴급하게 편성 계획이 수정되어 시스템에 미처 반영하지 못한 것이다.


  다른 방송사들은 어떠했느냐. 한 곳은 오락 프로그램 재방송 중이었고 다른 두 방송사는 이미 뉴스 특보를 시작하고 있었다. 편성 경쟁의 측면만 보면 우리 방송사에 유리한 상황은 아니다. 두 방송사가 이미 시청 대기 수요를 선점했다. 보도 전문 채널들은 어떤지도 보았다. 두 방송사 모두 진즉 개최지 발표 특별 방송을 시작했고 위성으로 연결하여 현지 기자의 브리핑을 내보내고 있었다. 그 순간 우리 방송사도 뉴스 특보 오프닝을 막 시작했다. 내 몫의 역할도 칠부 능선을 넘었다. 이제 개최지 발표 이후에 스튜디오 안에서 이루어지는 강평, 앵커 클로징과 프로그램 타이틀 뒤에 후속 프로그램만 연결하면 늦은 퇴근이 가능하다.

 

  스튜디오 앵커가 파리 현지 취재기자를 호명했다. 화면이 바뀌고 혈기 왕성해 뵈는 삼십 대 남자 기자가 등장한다. 앵커가 개최지 선정과 관련한 현지 여론에 대해 묻는다. 기자는 오늘 있었던 최종 프레젠테이션에 즈음하여 대한민국의 추격세가 뚜렷하고 예선 투표를 통과하여 결선 투표에서 막판 뒤집기가 가능할 전망이라고 리포트했다. 그러면서 정부 관계자로부터 취재한 내용이라며 이른바 양손에 혜택을 제공하자는 전략으로, 예선에서 경쟁국에 투표하면 결선에서는 대한민국에 투표해 달라, 그러면 경쟁국과 우리나라가 제공하는 경제적 이점을 모두 누리게 될 것이라며 극적인 역전극의 논거로 활용했다. 앵커 역시 한껏 고무되어서 대한민국의 선전을 기원하고 부산 시민을 비롯한 대한민국 국민에게 개최지 선정의 영광이 어서 돌아갔으면 좋겠다고 덕담을 이었다.


  특보 방송을 시작한 지 어느덧 이삼십 분, 개최지 발표가 언제 이루어지나 기다려질 때였다. 사전에 약속한 대로 현지에 나가 있는 유력 정치인사와 전화가 연결됐다. 앵커는 조금 전 취재 기자에게 했던 대로 현지 분위기와 개최지 발표 전망에 대해 물었다. 정치인 역시 취재 기자와 엇비슷한 맥락으로 얘기를 이어갈 때 급하게 현장 그림이 수신된다. 흔들리듯 불안하게 초점을 맞춘 카메라 앵글 안에 경쟁국 유치 인력들이 서로 부둥켜안으며 환호한다. 어리둥절해하는 앵커가 개최지가 발표된 것이냐고 묻자 정치인도 당황하며 그런 것 같다, 우리나라가 아니라 경쟁국이 유치에 성공한 것 같다고 덧붙였다. 그 순간 방송화면 하단에 큼지막한 자막이 표시됐다. “대한민국 부산 엑스포 유치 실패, 90표 차 예선 패배.. 사우디 최종 확정”


  한껏 달뜬 분위기를 연출하던 전화 인터뷰는 한순간에 침통하게 바뀌었다. 정치인은 유치 실패에 대해 관계자의 한 사람으로서 국민들에게 거듭 사과하며 통화를 마쳤다. 취재 기자는 예상과 전혀 다른 결과에 대해 본인도 당황스러워하며 후속 보도를 약속했다. 스튜디오로 돌아온 앵커는 함께 출연한 전문가와 급하게 패인을 분석했으나 침울한 분위기는 이미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우여곡절 끝에 뉴스 특보 방송을 개시한 지 사십여 분 만에 앵커가 클로징에 나섰다. 예상보다 빨리 후속 프로그램으로 이어졌다. 늦은 퇴근길을 서두를 수 있게 됐지만 손가락 한 마디만큼의 보람도 없이 허무하기만 한 새벽이었다.


  한두 해 지나면 이십 년을 채울 방송사 업무 경력을 돌아보았다. 방송 현업 종사자로서 이렇게 민망할 정도로 낯 뜨거운 순간이 있었던가. 이렇게 참담한 실패는 필자로서도 처음이었다. 국제적 행사의 유치 실패는 위정자들의 몫으로 돌린다고 치자. 조금 전의 뉴스 특보는 완벽한 방송 실패다. 이 정도면 시청자들에 대한 기만과 다름없다. 개최지 발표를 기다리는 동안 우리 방송은 유치 실패 가능성에 대해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정부 관계자들이 손에 쥐어주는 자료가 유일한 취재 원천이므로 우리는 아무 잘못이 없다는 말은 전혀 통하지 않는다. 일말의 실패 가능성에 대해 마땅히 거론하고 분석했어야 옳다.


  필자는 언론학을 공부하며 여러 미디어 이론에 대해 접했다. 그중 인지부조화와 집단 동조, 확증 편향 이론은 또렷한 인상으로 남았다. 일단의 특보 방송을 경험하며 확실히 뼈에 새겼다. 필자가 속한 방송사의 뉴스 특보는 강의에서 배운 세 가지 이론의 오롯한 발현이다. 먼저 필자는 필자가 속한 방송사의 취재 인력과 언론 보도 기능이 예선 참패의 가능성을 아예 몰랐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느 지점에서의 균열과 누수를 분명 감지했을 것이다. 그러나, 정부 관계자의 설명만 들으면 진짜로 막판 뒤집기가 가능할지도 모를 일이다. 취재 기자로서 체감하는 현지 분위기와 보도 자료로 활자화된 내용에 온도차가 있다. 좋은 일에 산통 깰 수도 없는 노릇이고 다 잘 될 거라고 다시 마음을 다잡는다. 다른 언론사의 분위기도 살펴본다. 그들도 나와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 방송사보다 훨씬 인력과 규모 면에서 큰 방송사에서도 비관론은 고개를 들지 않는다. 좋은 게 좋은 거다. 집단 동조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그러면서 확증 편향이 그것을 부추긴다. 최근 경쟁국에 대한 지지 의사를 철회한 소수의 투표국이 대세의 경향을 반영한다고 믿는다.


  결과적으로 특보를 편성하지 않은 소수의 방송사가 승자가 되었다. 그들이 우리 방송사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인력에 집단 지성이 가능한 조직이어서 그랬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의 평소 보도 행태 역시 부산 엑스포 유치 실패에 대해 본격적으로 거론하지 않았다. 공연한 노력을 투여하지 않을 정도로만 오늘 새벽 운이 좋았을 뿐이다. 다른 방송사의 헛된 호들갑, 권력에 순치된 듯 낯 뜨거운 충성적 보도 실태를 보며 비웃었을지 모르지만 그들도 안심할 여건은 못 되리라 짐작한다.


  돌이켜 아쉬움을 곱씹는다. 뉴스 특보의 앵커가, 혹은 현지 취재 기자가 유치 실패의 가능성에 대해 잠깐이라도 언급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정부 관계자의 낙관적 브리핑, 현지 분위기에 약간의 반전이 감지되고 있긴 하지만 최근 대한민국 정부의 ‘잼버리’ 파행 등 잇따른 악재로 인한 유치 실패 역시 시나리오 중에 있어야 한다고 보도했더라면 이렇게 비통하리만치 우울한 퇴근은 없었을지 모른다. 필자는 필자가 속한 방송사가 다양한 미디어 이론의 일관된 반면의 교사가 되길 더 이상 바라지 않는다. 제발 작은 것이라도 우수한 전범이 되어 내세워 자랑하지 못할지언정 스스로 흡족한 사례가 있어주길 진정으로 소원한다. 방송사 종사자로서 가장 슬픈 새벽, 우리 언론의 공론장의 역할에 대해 새삼 상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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