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어제도 저의 인사를 받지 않으시더군요. 물론 당신과 제가 사적으로, 또 업무적으로도 아주 가깝진 않습니다. 당신의 직급이 저보다 높으시지요. 저야 회사 조직에서 당신에 비하면 미물인 데다 일개 부속품에 불과하겠죠. 네, 저보다 나이도 많으시고요. 그래도 이렇게 가끔이지만 마주칠 때마다 인사드리는데 최소한 이름은 몰라도 저런 직원이 있구나, 정도는 느끼시잖습니까. 인지상정이지요. 제가 회사를 몇 년째 다니고 있는데요. 아, 기억을 돌이켜보니 몇 해 전에는 부서 간 회의에서 정기적으로 뵙던 때도 있었습니다.
아니, 엘리베이터이지 않습니까. 넓은 데도 아니고요. 사람이 딱히 붐비지도 않았어요. 위에서 내려오던 엘리베이터가 제가 있는 8층에서 문을 열었을 때 안에는 겨우 두어 사람이 타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당신은 버튼 패널 앞에 여유롭게 서 계셨고요. 엘리베이터에 오르려는데 당신이 보이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꾸벅 인사를 드렸고, 나지막이 “안녕하십니까.” 음성도 내었습니다. 적막에 가까운 공기에서 당신은 분명 내 목소리를 들으셨을 겁니다. 고개를 숙였다 드는 동작도 결단코 가볍거나 무례하지 않았다고 자부합니다. 의태어를 붙이자면 ‘까딱’이 아니라 ‘끄으떡’이었습니다. 막 포장을 뜯은 새 기계장치를 접었다 다시 펼 때의 느낌처럼요.
헌데, 당신은 어떠셨습니까. 식상한 묘사입니다만, 눈길 한번 주지 않으시더군요. 파리가 소매에 붙었어도 그렇게는 안 하셨을 듯합니다. 그야말로 미동도 없으셨지요. 왜 심령 영화를 보면 그런 장면이 있잖습니까. 혼백이 된 주인공이 옛 연인을 찾았는데 제아무리 목청껏 부르고 손짓을 해봐도 그 혹은 그녀의 눈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요. 일순 제가 망자인 줄 알았습니다. 불쾌감은 시간의 차이를 두고 엄습하더군요. 당신의 무반응이 있은 후, 아니 있었다, 존재했다는 물리적 표현은 틀렸습니다. 당신에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저는 몇 초쯤 있다가 민망함과 마주했습니다.
기실 당신을 여기에서 처음 뵌 것도 아닙니다. 당신은 처음 학창 시절 선생님의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화장실에서 뵐 때 가볍게 고개 인사를 드렸는데 모른 척 볼일만 보셨지요. 아, 도덕 수업이었나 윤리 수업이었나, 아니면 학기 초 예절 교육 시간이었나, 화장실에서 선생님을 뵐 때는 인사말 없이 목례를 드리는 게 예의다 배웠습니다. 뭐 각자의 생리 현상에 충실하려면 이래저래 겸연쩍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리 하는 게 맞겠다 수긍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인사를 못 받으시겠거니 했고요. 그런데 당신은 복도에서도 퇴근길 운동장에서도, 저희 담임 선생님 심부름 때문에 찾아간 교무실에서도 인사를 받지 않으셨습니다. 어리고 세상을 잘 몰랐던 나이였지만 기분이 썩 좋지는 않더라고요.
당신은 대학교에도 계셨습니다. 당신의 강의를 이전에 들었든 듣지 않았든 저는 그런 것과 상관없이 인사를 드려왔습니다. 공강 시간 단과대 앞에서 뵐 때 인사를 안 받으셨지요. 어떤 때에는 몇 학번 선배의 모습으로 나타나 역시 쌩 인사를 모른 체하시기도 했습니다. 그럴 때면 소심한 저는 내가 인사를 잘못했나, 아니면 오늘따라 일찍부터 안 좋은 일이 생기신건가. 심지어 군대에서도 뵀습니다. 그때는 후임병 알기를 장기판의 졸 취급하시는 말년 병장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각 잡힌 군기로 “충성!” 외쳤는데, 담배를 피우러 나가시는지 슬리퍼를 끌고 쌩 지나가시더라고요. 뭐니 뭐니 해도 가장 불쾌한 건 이즈음 직장, 회사에서 만나는 당신입니다. 아니, 왜 인사를 씹으십니까.
백 번 양보해서 당신이 왜 그러실까 궁리도 해봤습니다. 천성이 모진 분은 아닐 테고, 격무에 지치셔서, 일 때문에 무언가 골똘히 안으로 사유하실 게 많으셔서, 그 때문에 바깥 환경에 눈과 귀가 무뎌지셔서, 바로 그런 연유가 있지는 않을까 이해하려 했습니다. 아니면 인사를 받는 것 자체가 몸에 익지 않아서 그러신 걸까도 고민해 봤습니다. 말을 꺼내서 인사를 받아야 하나, 고개는 어느 정도 숙여주는 게 체면에 적당할까, 습관이 안 되다 보니 시도조차 못하시게 된 건가 짐작도 해봤습니다. 그래도 이건 아니잖습니까. 그것도 한두 번이지 어째 매번 인사를 못 보고 못 들으십니까. 이쯤 되면 분명 보고 들었는데 반응하지 않으시는 겁니다. 시쳇말로 인사를 잘근잘근 씹어 드시는 거죠.
당신에게 대단한 것 바라는 게 아닙니다. 아랫사람인 제게 먼저 다정한 인사를 건네주십사, 하는 거 당연히 아니겠고요. 저의 인사와 데칼코마니처럼 어울리는 선명한 음성과 행동을 기대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어 너구나, 너 인사했구나, 그래 봤다, 들었다, 알았다, 라는 뜻의 고갯짓 한 번이면 충분합니다. 그때는 그냥 의태어 ‘까딱’이어도 됩니다. 최소한 제가 그래 난 투명인간이 아니었어, 스스로 안도할 수 있을 정도의 ‘리액션’만 해주셔도 만족합니다.
이젠 저도 조치를 취해야 하겠습니다. 당신과 어디서 마주치더라도 아주 최소한의 예만 갖추려고 합니다. 안녕하시냐고 묻던 음성은 묵음으로 바뀔 것이요, 고장 없는 기계 같던 고갯짓은 최대한 효율적이고 경제적인 동작으로 재입력될 겁니다. 당신의 시야에서 멀겠다 싶으면 아예 인사를 말아버릴까도 계획하고 있습니다. 이런 걸 사람들은 ‘소심한 복수’라고 부른다죠.
인사에 관해 말씀드리다 보니, 한두 달 전부터 출근하는 옆 부서 인턴사원들 얘기까지 할 뻔했네요. 졸업한 지 얼마 안 됐거나 졸업반 마지막 학기 중에 선발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딱 자기 팀 선배, 상사들 말고 다른 직원들한테는 일절 인사를 안 한다는 말씀은 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저한테도 물론 안 한다는 얘기도 공유하고 싶지 않습니다. 아니, 회사에서 누구랑 마주쳐도 자기들보다 선배들일 텐데 무조건 인사부터 하고 보는 게 본전 찾는 길이지, 라는 꼰대 같은 이야기는 주머니에 깊숙이 넣어둘까 합니다. 하긴 그네들에게 무슨 잘못이 있겠습니까, 인사의 중요성에 대해 일깨워주지 않은 부서 선배, 상사들의 탓이겠죠, 라는 꼰대력 충만한 말도 못 들은 체해주십시오.
오늘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앞으로 다시는 당신께 인사를 받아줍네 어쩌네 거론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비단 회사가 아니더라도 당신은 때로는 이웃 주민의 모습으로, 어떤 때에는 아주 친밀하지는 않은 지인의 모습으로, 또 이따금은 먹고사는 문제로 얽힌 사람의 모습으로, 예상치 못한 시공간에서 여러 모습으로 제 앞에 나타날 테니까요. 변신에 능숙한 당신에게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어서요. 전 그저 저와 비슷한 사고를 가진 이들에게 따뜻한 인사말을 주고받으며 짧은 세상 살다가려고 합니다. 그럼, 아무쪼록 건강하십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