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족수에 대한 단상

by Hoon

여러분은 몇 명이서 모이는 자리를 선호하시는지. 아, 정족수라고 해서 거창하게 회의나 협의체 따위의 의사 결정에 필요한 머릿수를 말하려는 게 아니다. 그저 편한 밥자리, 술자리에서 스스로의 취향으로 미뤄볼 때 난 요 정도 규모로 모이는 게 좋더라, 그런 게 있으신지 여쭙는 거다. 아, 그런 거 없으시다고. 술과 안주만 있으면 된다고. 어헛, 술만 있어도 좋으시다고. 진정한 애주가로서의 자세에 엄지를 척!

어려서는 다다익선, 많이 모이면 모일수록 좋았다. 왁자지껄, 들썩들썩, 무리 지어 어울리는 것만으로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다. 한쪽 친구, 동기들이랑 술잔을 부딪치다 다른 쪽 후배, 동생들이랑 게임이라도 할라치면 이번엔 대각 맞은편 자리에서 선배, 형, 누나들이 부른다. 잠깐 오줌을 누고 왔더니 금세 내 자리에 누가 앉았다. 잔과 젓가락만 얼른 챙겨 다른 데 빈자리에 옮겨 앉는다.


헌데 이런 것도 노화의 증상인 것인지 이젠 그런 자리가 그저 그렇다. 아니 다들 전쟁 같은 돈벌이에 종사하느라, 혹은 애 키우느라, 아니면 안 키워도 제 몸 하나 건사하기 바쁜지라 그렇게 모이려야 모일 수도 없다. 어쩌다 천금 같은 기회에 오랜 인연들이, 아니면 새로운 관계로 엮인 사람들과 떼로 만나는 자리가 생겨도 전과 같은 흥분, 기대는 없다. 물론 오랜만에 그리운 얼굴 잔뜩 보는 것이야 마다하겠냐만, 그럼에도 귀갓길 왠지 모를 공허함과 맞닥뜨리는 날도 더러 있었다. 식당이나 주점 한두 군데를 거쳐 서너 시간쯤이나 보냈건만 난 오늘 누구와 마음을 나눈 걸까.


그때보다 나이 든 나는 딱 ‘셋’이 모이는 자리가 좋다. 셋은 기동력 있다. 일단 둘이 약속을 정하고 머리 하나만 더 채우면 된다. 짝 소리가 나게 세 사람이 구성되면 더없이 좋겠고. 시간과 장소에도 구애받지 않는다. 하나가 늦으면 나머지 둘이 먼저 만나 있으면 그만이다. 세 사람 모두 중간 거리쯤에서 ‘도킹’이 어려우면 한 사람이 조금 멀리 희생하면 된다. 먼 걸음을 해준 멤버에겐 어떤 형태로든 보상이 돌아간다. 그 또한 무사 공평. 자리를 옮겨 차로 이동해야만 하는 순간에도 마침하다. 택시 기사님 옆 조수석에 한 명, 뒷좌석에 다른 두 명이 탈 수 있다. 일행이 넷이어서 2열 가운데 자리까지 앉히려면 앉은 사람도 양옆 두 사람도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셋 중엔 소외되는 이가 없다. 함께 자리한 세 사람에겐 정연한 대화의 흐름, 엇비슷한 발언의 기회가 주어진다. 네 명만 모여도 그렇지 않다. 처음 얼마간은 서로 안부도 챙기고 공통의 화제로 일체감이 유지되나 싶다. 그러다 자리가 깊어지면 어느덧 둘과 둘로 대화의 파트너가 나뉜다. 운동장 하나에 축구공이 두 개다. 행여 한 사람이 잠시 끽연을 하고 돌아온다 치자. 애연가는 다른 셋이 한참 어떤 얘기에 열을 올릴 때 눈치껏 주제를 파악해 겨우 대열에 합류해야 한다. 수능 언어영역에서 고득점 했던 그, 구차하지만 무슨 얘기 중이었냐고 물어봐야 할 수도 있다. 다섯 명이 넘을 때는 설명할 필요도 없다. 군대 연병장에서 축구공 네댓 개로 돌리는 이른바 ‘전투축구’가 딱 그 짝이다. 아예 운동장이 여럿으로 쪼개지기도 한다. 그쯤 되면 아비규환, 파장이다.


셋이서는 금전적 부담도 비교적 감내할 만하다. 고기며 회, 술 몇 병쯤 셋이 비워내고 치르는 값에 대단한 각오까진 필요 없다. 지금 이 어려운 고난의 행군에서 대여섯 명 이상 되는 무리의 밥값, 술값을 ‘쏘는’ 것은 단연 사소한 결심을 수반한다. 에잇, 셋이 간만에 모였으니 오늘 작심하고 늦게 귀가하기로 하자. 그러면 1차 내가 냈으니 2차는 그대, 마지막 3차 생맥주 오백에 노가리는 저이가 쏘면 된다. 자 됐어, 이동!


그래서일까. 경험적으로 세 사람이 모였다가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만큼은 공허하지 않았다. 꽉 채운 시간을 보냈고, 오랜만에 제대로 사람의 온기를 느꼈다. 괜한 소리를 했나 싶기도 하지만, 없는 말을 한 건 아니다. 이해해 주겠지, 나도 그들이 했던 말들 중에 좋은 것만 채로 거른다. 그게 나고, 그들이다. 누구는 전철로, 다른 이는 버스로, 얼마나 치열한 하루를 살아낸 것인지 유난히 취기가 오른 또 다른 이는 택시를 불러 각자의 쉴 곳으로 돌아간다. 집으로 이끌어주는 탈것에 몸을 싣고 한참 움직이고 있을 때쯤 메신저를 보내본다. 반가웠다고, 좋았다고, 조심해서 들어가라고. 택시에 쓰러지듯 올라탄 그에겐 전화를 걸어봐야겠다. 잘 가고 계시죠?


셋이 아니라 둘은 어떠하랴. 둘이 만난다는 건 그야말로 두 인생의 절묘한 교차점이 된다. 마땅히 나눌 얘기도 없는 데다 대화의 단절 자체가 두려운 사이라면 절대로 단둘이 만날 수 없다. 잠시 말이 멈추어도 그 여백 자체로 조화롭고 상대의 침묵에 공감하는 관계여야만 일대일의 시간이 가능하다. 사람이 그리워지는 계절이다. 새벽 서리가 내리는 절기가 된 것 때문만은 아니리라. 아니 열이면 어떻고 스물이면 어떻겠는가. 그저 이 지구적 시련이 어서 지나가서 떠들썩한 자리를 벗어나는 해방감 섞인 소회라도 느껴보고 싶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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