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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on Oct 19. 2020

벤츠와 래미 마르탱

  가깝게 아는  중에 이렇게 시선을 끄는 차를 끌고 나온 사람은 처음이었다. 내 인간관계의 둘레가 겨우 초코파이, 아니 빅파이 만한 것이어서 일는지도. 나로서는 인터넷 자동차 매체의 신차 소개 삽화 사진으로나 봤을 법했다.

    

  몇 년 만에 ‘꽈친구’ K와 만났다. 된소리 발음이라야 한다. 단과대 동기, 전공 급우 따위의 낱말은 관계의 질감을 표현하지 못한다. K와는 전공 강의만 같이 들은 사이가 아니라 대학 동아리에도 함께 가입했었다. 대학 연합 여행 동아리 H대 지회(支會). 군입대 전 2학년 시절 K는 회장을, 나는 섭외부장을 맡았다. 대내외 행사 기획과 총괄이 내 역할이었다. 군대 2년여를 포함해 장장 7년을 보낸 대학 생활, 그중에서 여행 동아리에서의 활동은 K와 나에게 적잖은 비중이 된다.


  K는 여행을 좋아하다 못해 업으로 삼았다. 여느 동기들처럼 대기업이나 전문직에 도전하지 않고 작은 여행사로 취직을 했다. 그러더니 큰 회사에 다니는 친구들이 과장 승진을 할 즈음 은행 돈을 융자받아 그 여행사를 인수해버렸다. 한창 성업 중일 때는 서울과 부산에 사무실을 따로 두고 거기서 일하는 직원이 마흔 명이 넘었단다. 언젠가 내가 일 때문에 부산을 찾았을 때 마침 K도 그쪽 사무실에 있었다. 광안리 수변공원 근처 건물 꼭대기 횟집 문을 열고 들어설 때 먼저 와서 이쪽이다 손짓하며 호기롭게 웃어 보이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K에 얽힌 에피소드 하나. K는 과감하지만 섣부르고, 즉흥적이지만 추진력 있다. 일단 저지르고 뒷일은 미리 걱정하지 않는다. 직설적이어서 시원시원한 맛이 있지만 이따금 거친 언행으로 상대를 언짢게 하는 일도 있었다. 시쳇말로 선이 굵은 편이다. K를 따르는 후배들도 꽤 많았다. 그런 K가 2학기 기말 시험 직후 떠난 겨울 장기 여행에 뒤늦게 합류하게 됐다.(당시 동아리는 여름과 겨울 방학에 보름 내외 기간 일정으로 여행을 진행했다.) 속리산에서 하루 이틀 보내고 충청북도 단양으로 이동 중이었다. K가 오늘 밤 자기도 그리로 가겠노라 연락해왔다. 일찌감치 저녁을 지어먹고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벌컥 민박집 문이 열린다. 인사 대신 꽁꽁 언 얼굴로 입김을 뿜어내며 말한다. “배고파, 밥 줘.” 저녁때 먹다 남은 밥과 카레를 섞어 크게 한 숟갈 입에 가져가려는 순간 총무를 맡은 동기가 K에게 물었다. “회비는?” K는 대답 대신 메고 온 배낭을 툭 던진다. 배낭에서는 회비가 든 돈봉투 대신 웬 양주병이 굴러 나왔다. 술병 배에 붙은 딱지에 ‘Remy Martin’이라고 쓰여있다. 눈이 휘둥그레 져서 이게 뭐냐고 묻는 우리들에게 열심히 밥을 씹으며 잘라 말한다. “회비.” 부친의 애장품이 분명한 양주를 회비 대신 내어놓으며 K는 그 여행을 끝까지 마쳤다.     


  2020년 현재로. 퇴근이 늦어 약속 장소로 향하는 발을 빠르게 놀렸다. 저기 식당이 보이는 듯하더니 K가 밖에 나와 담배를 태우고 있다. 주차된 자동차에 궁둥이를 걸친 채. 헌데 그 차가 예사 것이 아니다. 보닛에 삼각별이 고개를 들고 있으니 독일 메르세데스 벤츠에서 만든 것일진대 문짝이 좌우 두 개뿐이다. 공기 저항을 고려한 듯 돌고래처럼 차 허리가 유려하게 뻗었다. 색깔도 은색인지 금색인지 UFO가 있다면 비슷한 도료를 뿌렸으리라. 딱 봐도 비싼 차다. “네 차냐?” 물으니 담배 연기를 뿜으며 “응.” 답한다.     


  K는 요새 일이 없단다. 코로나 때문에 직격타를 맞은 회사는 몇 달째 휴업 상태고 직원들은 무급 휴가를 줬다. 그런 와중에 저 살 길을 찾은 직원들이 회사를 떠나고 있는데 다음 주에 퇴직금으로 몇 억 원이 나가야 한단다. 수중에 그 돈이  다 있지 않아서 은행 빚을 졌더란다. 나로서는 짐작도 못할 규모의 돈이 오가는 심각한 이야기임에도 표정만은 무덤덤하다. 술이 몇 잔 더 들어가니 K가 자꾸 실없이 웃는다. 그게 더 안쓰럽고 안타까워서 나는 술잔만 부딪쳐주었다. 고작 월급쟁이 회사원인 내가 무얼 안다고 자영업자의 넋두리를 말로서 받아쳐 주겠나.     


  K에게 밖에 세워둔 저 벤츠부터 팔지 그랬냐고 물으려다 소주로 삼켜 내려보냈다. 그러길 잘한 것 같다. K에게 바깥의 저 차는 최후의 보루다. 그저 이동의 수단이 아니라 그동안 숱하게 만나 온 비즈니스 파트너들에게 격식에 맞는 의복이 돼주었을 다. 우리 회사 이 만큼 잘 되고 그래서 대표인 나는 이 정도 차 끌만 한 주제는 되오, 말 없는 증표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 K에게서 저 차를 내놓으라는 것은 타잔에게서 마지막 나뭇잎 팬티 한 장을 빼앗는 일과 진배없다. 타잔과 정글의 야만을 구분하는 건 겨우 식물의 잎사귀로 만든 팬티 한 장이었다. 타잔이 그것만은 끝까지 지켜내고 싶었을지 모른다. 알몸이 된 타잔을 마침내 정글의 동물들이 조롱하고, 그래서 그가 침입자의 군대에 맥없이 무너지는 장면은 떠올리고 싶지 않다.     


  이십몇 년 전 겨울 여행에서 K가 들고 온 양주가 위스키가 아니라 브랜디였고, 읽을 때는 ‘래미 마틴’이 아니라 불어 발음을 살려 ‘마르탱’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사실은 돈 버는 직장인이 되고도 한참 지나서야 알게 됐다. 그 여행에서 K의 마지막 자존심은 래미 마르탱이었다. 우리가 비싼 술 맛이나 좀 보자 반색하며 회비와 ‘퉁치지’ 않았다면 K는 그 길로 서울로 돌아가 영영 동아리방 문을 열지 않았을는지 모른다. 그해 겨울 우리 모두는 서로의 마지막 자존심을, 최후의 팬티 한 장을 모른 체하거나 물리치지 않았다. 지금의 세상도 그러한가 물으면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K가 다시 일어서길 바란다. 아니 그럴 거라 믿는다. 마블 영화 중 외계 악당 타노스의 침공에서 14,000,605개의 미래를 본 끝에 닥터 스트레인지는 아이언맨에게 마침내 승리하게 되는 하나의 미래, 그래서 필연적인 지금의 고통을 말해준다. 그런 역할이 K를 위한 나의 몫이었으면. K가 나중에 더 크게 돈 벌면 네 비까번쩍한 ‘벤츠’로 나를 태우러 와서, 아버지가 아끼던 것 말고 네 돈 주고 산 ‘래미 마르탱’ 한 병 따자고 말해주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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