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 다녀오고 복학했을 때 ‘공짜’라는 말에 혹해 MBTI 성격유형 검사를 받았다. 교내 취업지원센터가 실시한 여러 지원 활동의 일환이었던 듯하다. 결과는 전체 16가지 유형 중 나는 ESTJ형. 결과지의 장황한 설명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현실적, 사실적, 체계적, 논리적. 자신이 속한 집단을 잘 이끌어감. 일 처리가 매끄럽고 규칙과 규범, 위계질서를 중시. 대인관계는 화끈, 솔직하며 뒤끝이 깨끗함. 단점으로 현실 세계의 정보 수집에만 몰두할 수 있으므로 추상적 측면도 고려해야 함. 덕분에 입사 지원서의 성격 장단점 문항을 별 수고 없이 채울 수 있었던 건 비밀. 취업지원센터의 전폭적인 지원에도 불구, 위처럼 써서 냈던 자기소개서는 모두 서류 전형에서 탈락했던 건 안 비밀.
그런데 요사이 인터넷 세상에 재미로 돌아다니는 정보를 보니 내가 알던 것과 조금 다르다. 팀원과 회사 동료로서 내가 속한 ESTJ형은 한 마디로 ‘꼰대’란다. 그것도 꼰대 끝판왕이라는 수식이 붙었다. 언뜻 불쾌했지만 조금만 숨 돌려 생각해보니 틀린 말도 아니다. 그래, 난 꼰대가 맞다. 검사 결과지의 긴 설명에 그러한 뉘앙스가 살포시 스며있다. 다른 유형에 대한 코멘트가 궁금하시다면 아래 그림을 참고하시길.
ESTJ형 꼰대가 얼마 전에 다녀온 캠핑장 얘기를 들려 드리겠다. 여느 때와 달리 10월 말 캠핑장에서는 ‘핼러윈 데이 이벤트’를 진행한다. 숙박 요금도 평소보다 비싸다. 캠핑장 관리동에서 코로나 발열 체크를 하고 입장을 하려니 농구공 만 한 늙은 호박 한 덩이와 시간표가 인쇄된 종이를 들려준다. 언뜻 들여다보니 순서가 빡빡하다. 마술쇼, 호박등 만들기, 텐트 꾸미기 대회, 어린이 코스튬 플레이, 사탕 나눠주기 등등 어지간한 군인 일과표 못지않다. 아아, 난 그저 만추를 즐기고 싶을 뿐인데. 아이 아빠인 내게 망중한의 여유는 허락되지 않는다.
도통 마음에 드는 게 없다. 뜻도 모르겠는 서양 명절을 도대체 언제부터 쇠 왔다고 이리들 호들갑인가. 속을 파내 섬뜩한 이목구비를 만들어내는 호박등은, 나중에 알아낸 것인데 ‘잭 오 랜턴(Jack-O’-Lantern)’이라고 부른단다. 집집마다, 아니 텐트마다 칼과 가위, 각종 날카롭고 뾰족한 연장을 동원해 단단하고 두꺼운 호박 껍질을 도려내느라 낑낑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텐트 입구 앞에는 ‘행복한 핼러윈’이라는 뜻의 영어 알파벳 색종이가 알록달록 걸렸다. 해골 가면도 줄줄이 늘어놓았다. 어느 집엔 용인에 있는 놀이공원에서 야음을 틈타 훔쳐온 것인지 마귀할멈 마네킹이 서있다. 대단한 지극 정성이다. 하이라이트는 꼬마들에게 사탕을 나눠주는 시간이다. 앞 텐트 엄마는 진지하게 마녀 분장을 하고 사탕이며 초콜릿을 나눠주며 연신 “해피 핼러윈!”이라고 인사한다. 그러고 보니 아이들이 사탕을 얻어가기 전에 미국 말로 뭐라 뭐라 하던데 “트릭 오어 트릿(Trick or Treat)”?! 아마 어디 영어 유치원이나 유튜브에서 보고 들었나 보다. 그렇더라도 조선 땅에서 이 무슨 생경한 진풍경인가.
문득 이런 ‘꼰대심’이 발동한다. 앞 집 마녀 어머니, 이 서양 명절의 유래에 대해선 아시는 건지. 일단 나는 잘 모른다. 야영장 안에 수십 명의 어른들 중에 대강의 윤곽이라도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어쩌면 아이들이 더 잘 알지도 모르겠고 아니라도 해도 탓할 수 없다. 제대로 알려주지 않은 어른들의 불찰이니까. 정월 대보름에 부럼으로 견과류를 사 먹지 않고, 단오에 널뛰기는 일생 해본 적이 없는 데다 한식에도 뜨끈한 국물에 밥 말아먹는 나이지만 내가 수용할 수 있는 서양 명절은 어디까지나 성탄절까지다. 한 마디 더. 핼러윈 데이라는 말도 요상하다. 할로윈이면 할로윈이지 핼러윈은 또 무슨 발음인가. 한글로 쓰고 영어 원어민한테 보여줄 것도 아닌데 그렇게까지 혀를 굴려서 표기해야 하나. 또 뒤에 ‘데이(day)’가 붙는 것도 영어권에서는 틀린 말이란다. 본토 사람들은 그냥 ‘핼러윈’이라고만 부른단다.
얼른 스마트폰의 녹색창을 켠다. 할로윈이라고 입력했는데 핼러윈으로 자동으로 고쳐서 검색한 결과를 보여준다. “매년 10월 31일 다양한 분장을 하고 즐기는 서양 축제. 켈트 문화에서 유래한 것으로 10월 31일은 죽은 사람의 영혼이 이승으로 돌아오는 시기로 여겨진다. 핼러윈이란 ‘모든 성인 대축일 전야제(All Hallows’ Day evening)’의 줄임말이다.”라는 설명이 보인다. 꼬마들이 했던 말도 의문이 풀린다. “길가나 집 앞에는 ‘잭 오 랜턴(Jack-O’-Lantern)’이라 불리는 호박등을 설치한다. 아이들은 집 앞에 잭 오 랜턴이 켜진 집에만 들어가 문을 두드린 후 “트릭 오어 트릿(Trick or Treat)”이라 외친다. ‘과자를 주지 않으면 장난을 치겠다’는 의미다.” 영어 투성이의 서양 명절. 당연한 건가.
그러고 보니 내일은 또 ‘막대과자 데이’다. 동네와 번화가를 가리지 않고 편의점 앞에 꾸러미로 포장된 막대형 과자가 늘비하다. 저게 다 제과회사의 상술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이제는 거의 없겠지만 여전히 팔 사람은 팔고 살 사람은 사서 다른 누군가에게 주겠지. 아, 제과회사여 나에겐 구매를 기대하지 마시라. 난 ESTJ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