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길이 구만리 같은 여성 희극인이 세상을 등지던 날, 정확히는 그랬다는 소식이 들려온 날 묘하게 머릿속에서 이 노래가 재생됐다.
이젠 더 볼 수가 없네
그녀의 웃는 모습을
그녀가 처음으로 울던 날
내 곁을 떠나갔다네
그녀가 세상에서 마지막 숨을 내쉬던 날 실제로 울었을지 아니면 웃었을지 알 도리는 없다.
어디선가 그런 말을 들었다. 세상 가장 쓸 데 없는 게 연예인 걱정이라고. 나는 십 분지칠 정도로만 그 말을 인정한다. 망자가 된 연예인, 유명인에 대한 추념까지 쓸모를 따질 이유는 없다고 본다. 세상만사를 효용으로 견주는 데 나는 진저리가 쳐진다.
그녀가 죽고 일주일 남짓 지났다. 세상은 그녀를 빠르게 잊는다. 인터넷으로 그녀의 부고 기사를 보려면 이제 한참 페이지를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굳이 그려보면 검색어 순위의 우하향 곡선에서 망각의 속도를 가늠할 수 있겠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코코」를 보셨는지. 나는 단언컨대 디즈니사가 내어놓은 모래알처럼 많은 작품 중에 이 작명에 만점을 주고 싶다. 코코는 주인공 멕시코 꼬마 소년의 이름이 아니다. 제작진은 뜻밖에 꼬마의 증조할머니 이름을 제목으로 붙였다. 작품을 관통하는 중요한 메시지를 경청하자면, 사람은 태어나 두 번 죽는다. 육신이 죽을 때 한 번, 그리고 세상에 남은 사람들 중에 자신을 기억하는 이가 아무도 없게 될 때 다시 죽는다. 이때 죽는 게 진짜 죽음이다. 잊혀짐은 소멸이다. 주인공 꼬마는 불시에 망자의 세계에서 만난 고조할아버지의 죽음을 막아내기 위해 그의 딸, 아직 현실 세계에 있는 증조할머니의 성냥불 같은 기억을 붙잡는다. 다시 얘기하지만 이 같은 작명에 나는 아낌없는 찬사를 보낸다.
그녀의 두 번째 죽음이 영원히 오지 않거나 최대한 늦게 도래하기를 바란다. 그러면서 다시 그 죽음을 돌이킨다. 그녀의 죽음은 여느 유명인의 그것과 사뭇 다른 질감으로 엄습했다. 누리꾼들의 반응을 보면 그 같은 감정이 내 것만은 아니었던 듯하다. 그 까닭을 파고 파서 내려가다 보면 아마도 그녀가 ‘좋은 사람’이었기 때문이지 싶다. 가장 연예인 같지 않은 연예인이었다는 누군가의 소회도 보인다. 이따금 티브이 화면에 비치는 바르고 정직한 말씨와 태도, 그렇게 묻어나는 착한 심성은 나만 알아본 게 아니었으리라. 동영상 서비스에 유작처럼 남아있는 그녀의 대중 강연에서 그녀는 말한다. 나는 내 외모가 싫지 않다고. 너무나 특별하다고. 이런 나를 내가 사랑하지 않으면 그 누가 사랑해주겠냐고.
줄기에서 끊어진 그녀의 삶에 도대체 어떤 심연의 힘이 작동한 것일지 궁리한다. 아, 이것도 쓸데없는 일이라고 핀잔주지는 마시라. 인간은 타인의 죽음에 대해 사유하면서 역설적으로 생의 본질과 마주한다. 결국 삶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중요한 조건이 일시에, 아니면 오랜 시간에 걸쳐 결핍된 사정 이리라 짐작해본다. 누군가 추측하듯 고치기 힘든 병을 오래 앓아 와서 일까. 아니면 생계가 많이 곤란해졌을까. 그녀에겐 고향과 다름없었을 역사적인 공개 코미디 프로그램의 폐지, 줄어드는 코미디언들의 무대 같은 것에 마음이 무너졌을까. 혹시 코로나 블루라는 것도 어두운 기운에 힘을 보탰을까? 생업이 위태롭고 생활의 반경이 최악으로 좁아진 사람들이 겪는 마음의 병이 그녀를 벼랑으로 몰았을까. 떨칠 수 없는 깊고 어두운 우울의 그림자가 그녀를 삼킨 것은 아닌지 너무 늦은 걱정을 해본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살아있는, 살아서 남은 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이 고작 그런 것뿐이다. 그녀는 우리에게 사람은 태어나서 단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흙으로 돌아간다는 우주의 가장 확실한 진리를 다시금 일깨우고 떠났다. 아무쪼록 그녀가, 그 착한 마음씨가 오래도록 기억되어서 그녀의 진짜 죽음이 기웃거리지 않기를 기도한다. 그녀가 생전 거의 마지막으로 출연한 어느 예능 프로그램에서 입고 나왔던 수수하고 단정한 체크무늬 셔츠와 면바지가 눈에 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