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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on Jun 30. 2021

엄마의 청국장

  엄마가 지어주는 저녁밥이 없었다면 나는 근래의 심한 우울에 진즉에 잡아먹혔을 거다. 어머니 말고 엄마라고 부른다. 마흔도 훌쩍 넘어간 아들이. 심지어 처와 자식도 있는 .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아버지가, 아니 그날까지는 아빠였던 이가 나를 호출했다. 이제부터 청소년이니 애처럼 엄마 아빠 하지 말고 어머니 아버지로 불러라. 이제껏 엄마 아빠였던 사람들이 갑자기 어머니 아버지라니. 단박에 그게 되나. 어색한 감정의 모서리를 쪼아가며 어찌어찌 아버지는 입에 붙였다. 헌데 어머니는 도무지 못 되었다. 엄마는 그냥 엄마다. 다행히 엄마도 아버지도 나무라지 않았다.


  몇 해 전 부모님이 내가 어려서부터 살아온 본가를 처분하고 우리 집 앞으로 이사를 오셨다. 아내가 꺼릴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장모님과 교대로 딸아이를 봐주시겠다고 듣고는 반색했다. 그렇다 해도 최고 수혜자는 나다. 장가들고 참으로 오랜만에 엄마 밥, 집 밥을 수시로 먹게 됐다. 맞벌이하는 부부의 사정 상 각자 알아서 끼니를 해결한다. 어쩌다 같이 저녁을 먹어도 대개는 외식이었다. 지금은 엄마 밥이 먹고 싶으면 퇴근길에 전화만 한 통 미리 넣어두면 된다. 오예.


  퇴근길에 전화 한 통 미리 넣었다.

-엄마, 나 좀 이따 전철 내리는데 밥 줘.

-좀만 일찍 전화 주지, 고등어 해동해 놓게. 알았어, 빨리 와.

 딸아이는 오늘 장모님과 함께 있다. 밥 먹고 얼른 넘어가서 교대해드리면 된다. 장모님의 퇴근.


  옛날 본가와 같은 번호로 도어록을 해제한다. 띠리리.

-엄마, 나 왔어, 아버지는?

-어, 외출하셨어.

-나 오늘 뭐 줘?

-어, 청국장.

 실은 문밖에서부터 냄새가 나서 그럴 줄 알았지롱. 우리 집 그것마냥 익숙한 동선으로 화장실에서 손을 씻고 나온다. 주방 앞 식탁 말고 4절지 만 한 소반에 보글보글 청국장이 오른다. 김 모락모락 콩밥, 어려서는 입에도 대지 않던 지금은 없어서 못 먹는 가지무침, 감자채 볶음, 김치 겉절이, 급하게 만들어낸 소시지 야채볶음이 주춤 물러서며 자리를 내준다. 냉동실에서 못 내린 고등어구이는 아쉽지만 없다. 아무렴 어떠랴, 이게 엄마 밥. 집 밥.


  청국장 한 술을 후후 불며 떠본다. 크, 이 맛이지. 아, 이 쿰쿰한 듯 구수하고 시큼한데 감칠맛 나는 발효의 마법. 조연 밑반찬들도 하나씩 챙겨 맛본다. 다 맛있다, 다 맛있어. 진수성찬이 별건가. 울 아부지 건강한 거 역시나 엄마 밥 덕분이지. 엄마가 묻는다.

-맛있어? 천천히 먹어.

 콩밥 뜨거운 기운을 손바닥에다 뿜으며 말한다.

-어, 어.


  밥공기가 반쯤이나 줄었을까, 뜬금없이 엄마한테 물었다.

-엄마, 엄마는 태어난 게 감사해?

 엄마 잠시 골몰하더니 말한다.

-에이, 뭘 감사해, 그냥 사는 거지. 엄마는 오늘 죽어도 아쉬울 거 하나 없어.

 다시 물었다.

-나는 어떨 것 같아 엄마?

 엄마 또 골몰하더니

-글쎄, 넌 어떤데?

 나 답한다.

-나도 하나도 안 감사해. 그냥 숙제하는 것 같아. 중도에 포기할 수도 없는. 컴퓨터 게임하면 미션이라고 있거든. 미션 수행하는 것 같아.


  엄마 눈동자가 삽시간에 아련해진다. 아, 내가 너무 깍둑 썰어 말했나 보다. 다음 밥술을 뜨며 말을 이어 붙인다.

-아, 엄마가 낳아준 게 안 감사하다는 말이 아니라, 아니 솔직해야지, 엄마가 낳아준 것 자체는 크게 감사하지 않은데, 사랑으로 길러준 거는 진짜 감사해. 엄마가 낳은 바람에 열심히 살아내야 하잖아. 근데 엄마가 얼마나 온 마음으로 사랑하면서 키웠는지는 아니까 감사해, 고마워.

 엄마 얼굴이 조금 누그러진다.

-엄마가 너 뱃속에 있을 때부터 목숨보다 사랑했지! 사랑으로 키운 건 말할 것도 없고! 열과 성을 다했지!

-아, 알지, 안다고.


  잘 먹었다. 엄마가 한 그릇 더 먹으라는 걸 물리쳤다. 소반을 들어 주방으로 옮겨 놓는다. 먹고 난 밥그릇 국그릇을 싱크대에 담그려는 걸 엄마가 만류한다. 빨리 가서 딸아이 외할머니 집으로 보내드리란다. 머뭇머뭇 신발을 신는다.

-갈게, 엄마.

-어, 빨리 가.


  엄마의 청국장엔 아무래도 벽사의 기운이 있는 것 같다. 벽사. 요사스러운 귀신을 물리침. 집에 가서 장모님 인사드리고 딸아이 얼굴 보면 벽사의 에너지가 몇 배로 증폭될 것이다. 몇 분 거리 집을 향해 걸으며 음악 스트리밍 서비스 어플을 켠다. 아쉬운 대로 그룹 다이나믹듀오의 ‘어머니의 된장국’ 리스트에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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