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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on Sep 08. 2021

그때의 나와 면접

  지원동기는? 취업준비생 시절 입사지원서를 쓸 때마다 가장 난감한 질문이었다. 아니 솔직히 어처구니가 없었다. 뭐겠어. 빤하지. 취직해야 되니까. 백수 생활 청산하고 일 하고 싶어서. 돈 벌어서 맛있는 것도 좀 사 먹고. 옷도 장만하고. 노트북을 바꿔도 좋고. 할부 끌어서 인생 첫 자가용도 사면 좋지. 아, 부모님한테 우리 아들 취직했다고 자랑 좀 할 수 있게 해 드려야지. 그동안 만날 얻어먹은 친구들한테 술도 한 잔씩 사고. 음, 중장기적으로는 주택청약 부금 통장도 만들어서 얼마씩 입금도 해야지. 이게 지원동기지 뭐야. 아니면 무슨 “귀사는 업계 최고의 경영 실적과 선진 기업문화를 자랑하는 회사로서..” 용비어천가라도 듣고 싶었어?     


  그 시절의 울분이 다시 샘솟는다. 엊그제 경력사원 면접에 참가했다. 아, 지원자가 아니라 면접 평가자로. 꼴에. 어디 돈 많이 주고 일은 적은 회사에 하찮은 이력으로 면접이나 한 번 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런 좋은 곳에서 나를 찾을 리 만무하다. 근래엔 경력사원 면접 평가만 참가한다. 언제부턴가 회사가 신입사원을 잘 안 뽑는다. 방송인 유병재가 한 콩트 대사 “죄다 경력만 뽑으면 내 경력은 어디서 쌓나” 남의 일이 아니다.    

 

  서류에서 거르고 딱 네 명만 실무 면접을 본다. 남성 1명, 여성 3명이다. 나도 남자지만 갈수록 여성 지원자의 경쟁력이 눈에 띈다. 입사지원서의 완성도나 면접장에서의 답변 수준을 봐도 그렇다. 주변 동료, 심지어 다른 회사나 학교 안의 사정을 들어봐도 다르지 않은 것 같다. <가족오락관> 식의 성대결을 좋아하진 않는다만 남성 동지들이여, 제발 노력 좀 하자! 노오력!!     


  면접장으로 준비된 큰 회의실로 향한다. 인사팀 직원이 진즉에 와 있다. 나 포함 평가자 네 명.  나머지 의자는 어디 딴 데로 치웠는지 한쪽에 조금씩 띄워서 네 개, 맞은편 가운데에 하나가 덩그러니 놓였다. 다대일 면접의 전형적 구도. 자리 배치만 봐도 취준생 시절의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가 꿈틀거린다. 테이블 위에 네 사람분의 입사지원서와 낱장으로 된 새하얀 평가표가 가지런히 올랐다. 연필과 지우개, 검정색 볼펜이 서류 뭉치를 누르고 있다. 삼백 밀리리터 생수병은 종이컵을 뒤집어썼다. 지원자 한 사람당 이십에서 삼십 분. 빨라야 두 시간 뒤에나 이 방에서 나갈 수 있다.     


  첫 번째 지원자 들어가십니다. 조심조심 걸어 들어와 꾸벅 인사 후 착석. 코로나 시대니까 마스크 살짝 벗어서 본인 인증.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세요. 이쪽부터 면접관으로 참석하신 무슨 무슨 팀 아무개 팀장님이시고, 간단히 자기소개부터 부탁드릴게요. 예, 지원자 아무개입니다. 저는 지난 몇 년간.. 이상의 초식으로 참가번호 4번까지 복사-붙여넣기.     


  참가번호 1번. 33세 남성. 경력 4년 차. 서류상으로 가장 돋보였다. 경쟁사 똑같은 부서에서 일했다. 나이와 경력 연차도 적당하다. 답변도 곧잘 한다. 동종 업계여서 그런지 우리 회사 사정도 잘 안다. 다만 무난한데 에지(edge)가 없다. 즉시전력으로 쓸 수는 있지만 에이스는 아니다. 자신감 없는 표정과 음성도 마음에 걸린다.     


  2번. 28세 여성. 경력 3년 차. 긴장했는지 말이 빠르다. 어투도 조금 딱딱한 문어체다. 미리 외워둔 대사다. 연차 어린 지원자에게 흔한 모습이다. 질문에 답하는 걸 들으니 제법 영리하다. 면접관 소개 때 직책을 기억했다가 답변 중에 맞춤한 부분에서 그쪽을 바라본다. 업무 경험이 부족한 게 흠이다. 신입사원 채용이었으면 합격이다. 뽑아서 잘 가르치면 쓸 만한데 우리에게 그럴 시간이 있는지 모르겠다.     


  3번. 36세 여성. 경력 9년 차. 긴장한 것 같지만 2번처럼 말이 빨라지진 않는다. 공손하지만 비굴하지 않다. 당당하면서도 무례하진 않다. 잘 쌓은 시간은 내공이 된다. 다만 긴 경력에 비해 우리가 바라는 이력이 부족하다. 수치를 다루는 업무 경험에 대해 듣고 싶은데 자꾸만 소통 능력자임을 피력한다. 본인도 이번 판은 아니다 싶은가 보다. 답변이 무성의해진다. 면접 마치고 일어서는데 쌩 바람이 분다.     


  마지막 4번. 33세 여성. 경력 8년 차. 졸업 직후에 우리 회사 계열사에서 일했단다. 평가자로서 객관을 유지해야 하지만 친근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게다가 밝고 유쾌한 성격이다. 앞서 3번까지 엄중했던 분위기가 반전된다. 초반 호감을 얻은 것은 분명해 보인다. 마지막 참가자이기도 해서 면접 시간이 길어진다. 그런데 이게 지원자에게는 악재가 됐다. 이어지는 심도 싶은 질문에 맥없이 무너진다. 나중에는 얘기가 산으로 가서 본인도 무슨 소리 하고 있는지 모를 지경이다.     


  두 시간이 훌쩍 흘렀다. 평가서 네 명 지원자 이름 옆에 써넣은 알파벳 등급을 재차 확인한다. 다른 평가자들과 의견을 나눈다. 사람 눈은 다 비슷비슷하다. 약간의 이견이 있지만 결과를 뒤집을 무엇은 아니다. 평가서 귀퉁이에 서명한다. 인사팀 직원이 들어와 평가서를 모은다. 오늘 결과를 토대로 최종 면접 대상자를 추릴 거란다.     


  부담스러운 만남을 치르고 집으로(나였다면 술집으로) 돌아가고 있을 지원자들처럼 나도 그 시간을 곱씹는다. 꼰대 같은 소리겠지만 몇 가지 당부하고 싶다. 당신이 면접을 앞두고 있다면 최대한 공부해서 가면 좋겠다. 준비되지 않은 지원자가 많다. 의외로 경력자 중에 다수다. “지원자께서 생각하시는 우리 회사의 약점은 무엇입니까?” 예상 질문 0순위 문항에도 우물쭈물하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어떤 인사담당자는 CEO 신년사까지 숙지하라고 한다. 그것까지 바라지도 않는다. 최소한 면접에 나올 법한 예상 질문이라도 뽑아보라. 물론 거기서 안 나올 가능성이 9할 이상이다. 적어도 불안감은 떨칠 수 있지 않은가. 하나라도 물어봐줬다? 완전 땡큐다. 그 시간만큼은 당신의 독무대다.     


  모르면 모른다고 솔직하게 말하라. 나도 모를 소리를 하기 시작하면 얘기가 안드로메다로 향한다. 질문의 의도를 다시 물어봐도 좋다. 이런 뜻으로 해석하고 답을 해도 괜찮겠느냐 물어라. 그러면서 시간을 버는 거다. 잘 모르겠는데요, 끝! 이게 아니라 성심성의껏 머리를 굴려 아는 대로 답하라는 얘기다. 내가 답할 수 있게 질문을 살짝 바꾸어 달라 요구하는 것도 방법도 있지만 그건 고수의 길이다.     


  태도의 적정 온도를 찾아라. 공손할수록 좋지만 비굴할 것까진 없다. 예의 바른 사람 입네 약간의 위장이 필요한 것도 안다. 그렇지만 네가 너를 속일 수는 없다. 자연스럽게, 너답게 말하고 행동하라. 어차피 회사와 직원 사이 궁합의 문제다. 밝고 명랑한 것과 진지하고 신중한 것, 둘 중 하나만 정답일 수 없다. 직무에 적합한 유형이 있을 뿐이다. 아니면 회사의 고유한 업무 분위기, 그것에 맞느냐 그렇지 않으냐 차이 정도다. 자신감을 가져라. 태도로 운을 뗐지만 이 얘기가 하고 싶었다. 너를 너로서 세상에 드러내기를 주저하지 말아라.     


  지원자만 잘하라고? 그건 옳지 않지. 회사도 잘해야지. 어렵게 마련한 자리에 애꿎은 지원자들 헛걸음시키면 안 된다. 오랜만에 큰맘 먹고 정장 꺼내 입어 메이크업하고 온 분들이다. 질문 사이에 공백 생기면 엄청나게 자괴감 든다. 나한테 더 궁금한 게 없나? 내가 마음에 안 드는 건가? 오늘 괜히 온 건가? 오만가지 생각에 자아가 쪼그라든다. 지원자 당신이, 당신의 생각이, 당신이 지내온 시간이 궁금해서 보자고 했다는 인상을 부족함 없이 줘야 한다. 서류 전형부터 옥석을 잘 가려서 얼마 안 되는 면접 시간을 귀중하게 써라. 입맛대로 부르려면 몇 만 원 면접비라도 꼭 쥐어서 보내라.     


  지원자 네 사람 나가는 뒤태가 저마다 안쓰러웠다. 할 수만 있으면 다 데리고 나가서 낮술이라도 사주고 싶었다. 한 잔씩 술 따라주면서 오늘 고생했다고, 애썼다고, 준비하느라 힘들었겠다고 다독이면 좋았겠다. 어떤 지원자가 끝에 이런 말을 덧붙였다. 오늘 떨어지면 다음에 다시 도전하겠다고. 그 지원자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뭣 하러 그러느냐, 인재를 몰라본 빌어먹을 회사, 평생 원수로 삼고 여봐란듯이 다른 데 가서 더 잘 돼야지, 그 무슨 답답한 소리냐. 쨍! 잔 부딪치며 시원하게 한 잔 들이켜는 상상을 해본다.     


  어쩌면 오늘 나는 지난날의 나와 면접을 치렀는지 모른다. 나는 여전히 부족하고 그때는 아무것도 없었다. 오늘 만난 네 사람이 나였고 내가 그들이었다.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싶지만 그것도 아니다. 지금 제대로 아는 게 있기는 한가. 수고한 네 사람 지원자의 앞날에 행복과 행운이 깃들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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