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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on Sep 09. 2021

행운돈가스를 소개합니다

  당신의 솔푸드(Soul food)는 무엇인지. 소울푸드로 쓰면 안 된단다. 외래어 표기법에 맞지 않다. 영혼의 음식, 먹기만 하면 심신이 치유되는 그런 음식 말이다. 나한테도 여럿이 있지만 그중 하나가 모교 앞 돈가스다. 행운돈가스.     


  우리 회사 최대의 복지는 넉넉한 점심시간이다. 물론 취업규칙이나 인사규정에 임직원 여러분께서는 최대 몇 시간까지 점심을 냠냠하고 들어오시면 됩니다, 따위의 조항은 없다. 업무에 지장이 없는 선에서 눈치껏 알아서. 그 점에 있어서는 대단히 MZ세대 지향적이다. 11시 반쯤 되면 각 팀 막내들부터 오찬 드시러 나가고 없다.     


  점심 다 돼오는데 마침 후배가 톡을 보내온다. 읽지도 않고 키보드로 “콜” 전송한다. 후배는 모교 후배이기도 하다. 더없이 막역한 사이다. 로비에서 만났다.

- 형, 오랜만에 그거 드실래요?

- 그거? 좋지!

  이상한 대화다. 텔레파시가 통한다. 모교 앞 돈가스 먹으러 가자는 소리다. 그걸 알아듣고 냉큼 그러자고 한다. 전철로 몇 정류장 가면 모교 앞 식당가, 아니 주점가다. 지리멸렬한 직장생활에 단비 같은 순간이다. 짜릿한 일탈.     


  가게 앞에 벌써 대기 팀이 한둘 보인다. 9월 초, 2학기 개강은 했어도 대개 비대면 수업일 텐데 대기줄이 있다. 대학생들이 인정한 맛집이란 뜻이다. 코로나 출입 장부에 기록을 남긴다. 그러기를 몇 분 남짓, 입장하세요. 연로하신 이모님이 물으신다.

- 뭐로 드릴까?

- 정식 둘이요.

  구석 작은 테이블이 우리 자리다. 노란 단무지와 깍두기를 담은 날 일(日)자 종지가 벌써 기다리고 있다.     


  자, 어떤 돈가스가 나오느냐. 이름에서 이미 힌트를 드렸다. 돈카츠가 아니라 돈가스. 난 일식보다 경양식 돈가스 파다. 일식 돈가스는 먹고 나면 입 천정이 다 벗겨져서 별로다. 경양식 돈가스는 생전 그럴 일이 없다.     


  경양식 돈가스의 당연한 코스. 수프가 먼저 나온다. 크림수프 베이스에 땅콩가루를 섞었다. 부드럽고 고소하다. 대기업의 힘을 빌렸겠지만 완전히 의존하진 않았다. 주인장의 튜닝이 마음에 든다. 후추 솔솔 뿌리고 서너 숟가락 뜨면 끝. 대학가 인심 너그러운 거 모르지 않다. 더 달라면 마흔 다섯 접시도 먹을 수 있다. 근데 이상하게 더 먹으면 맛이 없다. 아쉬운 듯 딱 한 접시가 최적이다. 한계효용 최대치다.     


  수프 접시 얼른 가져가시고 오늘의 주연 등장한다. 세월의 흔적이 묻은 하얗고 널찍한 쟁반에 돈가스 정식이 나온다. 돈가스 두 덩이, 생선가스와 함박 스테이크가 한 덩이씩. 그 위에 계란 프라이(후라이의 맞는 표기법)가 살포시 안착했다. 돈가스와 함박은 고소하고 들큼한 브라운소스, 데미그라스 소스다. 생선가스는 타르타르 소스. 격식은 다 갖췄다. 소스 아끼면 안 된다. 아주 그냥 국물 자박하게 뿌려서 돈가스 사분지 삼은 눅눅해져야 맛 난다. 그래야 입 천정도 무사하다. 가니시는 단출하다. 가늘게 썬 양배추 위에 케요네즈(케첩+마요네즈) 드레싱, 그 옆에 마카로니와 옥수수, 완두콩 샐러드. 밥도 있다. 일식 돈가스에 나오듯 감질나게 적은 양이 아니라 공기째 푸짐하게 엎어 높은 흰밥이다.     

  내가 이곳 행운돈가스에 처음 발을 들인 건 20세기 말, 꼬박 24년 전이다. 97학번 새내기 시절, 그러니까 1997년 3월 중순쯤으로 기억한다. 지금은 노회 한 고교 영어 선생님이 된, 당시 2학년 선배 누나 손에 이끌려 왔다. 학생식당에서 이천 원짜리 제육덮밥 얻어먹는 것도 감지덕지한데 무려 그 두 배가 넘는 가격이었다. 기억대로라면 사천 오백 원. 그렇지 않아도 돈가스 좋아하는데 대학가에 번듯하게 자리 잡은 돈가스는 그야말로 완숙의 경지였다. 누나가 사준 그날의 돈가스는 나의 대학생활, 청춘의 본격적 시작을 알리는 맛이었다.     


  꼭 끝에 한두 조각 남긴다. 배가 차서 딱 그만큼이 안 들어간다. 이십여 년 전보다 이천오백 원 올라서 칠천 원. 그래도 싸다. 회사 근처에서 일식 돈가스 사 먹으려면 못해도 만몇 천 원은 각오해야 한다.     

  소화도 시킬 겸 후배와 캠퍼스를 걷기로 한다. 후문으로 들어가 본관 앞으로 뚫린 전철역을 이용하여 회사로 돌아가면 된다. 노천극장 옆 커피점에서 음료 두 잔을 주문한다. 후배는 ‘아아’, 나는 커피 못 마시니까 자몽 에이드. 각각 이천오백 원과 삼천 원. 아름다운 가격이다. 이런 물가라면 내 월급으로도 귀족적 소비생활이 가능하다. 비대면 수업의 영향인지 학기 초의 활기는 확실히 옅다. 강의동 건물들을 스치며 후배와 소싯적, 그러니까 시쳇말로 리즈시절 얘기를 주고받는다. 아, 옛날이여.     


  회사로 돌아가는 전철 안에서 잠시 타임머신을 타고 온 기분을 삼킨다. 이제 다시 우리는 처절한 생업의 현장으로 간다. 두어 달 뒤에 오늘의 약발이 떨어지면 또 올 것이다. 나의 솔푸드. 행운돈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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