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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on Sep 13. 2021

딸아이의 당선

부제 : 「딸아이의 낙선」 후속 편

  추곤증(秋困症)을 쫓는 아내 전화가 왔다.

- 어 부인, 어쩐 일?

- 오빠, 따님 반장 됐대!

  엥? 무슨 뜬금없는 낭보?! 아, 지난주 개학했다더니 새 학기 반장선거 했구나. 엄마 아빠한테 내색도 없더니, 뭔 기특한 일 이래. 아이 방과 후에 간식을 챙겨주시는 모친이 소식을 먼저 들으셨다. 아내에게 부리나케 전화하신 모양이다.     


  딸은 지난 3월 1학기 반장선거에 야심차게 출사표를 던졌다가 낙마했다. 선출 방식의 영향도 있었다. 나 국민학교 때에는 다득표한 1등이 반장, 2등이 부반장이었다. 동점자가 나오지 않은 이상 투표 한 번이면 끝이다. 아이 학교는 반장을 먼저 뽑고 후보자 등록을 다시 받아 부반장을 뽑는다. 아이는 두 번의 투표 모두 한두 표 차이로 2등이었다. 그날 저녁 아이는 퇴근한 엄마한테 안겨서 서럽게 울었다.     


  울음을 겨우 그친 아이한테 물었다. 뭐가 가장 속상하냐고. 자기가 1등이 아닌 건 괜찮단다. 적지 않은 친구들이 표를 줬으니까 그걸로 됐단다. 서러운 눈물의 이유는 그렇다. 자기는 반장이 너무 하고 싶어서 마음속으로 오래전부터 준비했단다. 근데 별 뜻도 없이 재미 삼아 나간 친구들이 덜컥 반장, 부반장이 되더란다. 나는 여기까지 듣고 그냥 안아주기만 했어야 했다. 딸, 인생이 원래 그래. 내 마음대로만 되지 않아. 그 말을 듣고 다시 울음 엔진이 켜졌다. “인생이 뭐 그래?! 불공평하잖아!”     


  아이가 뭐가 됐다고 하니까 내가 더 기쁘다. 부모가 되어 봐야 부모 심정을 안다는 만고의 진리. 나 어렸을 때 나한테 좋은 일 생기면 우리 엄마 아부지가 이런 마음이었겠구나. 단순히 어깨가 으쓱한 기분이 아니다. 자식이 겪을 기쁨이 부모에게로 와 몇 배로 증폭된다. 무엇보다 한 번의 실패 뒤에 얻은 딸아이의 작은 성취여서 더없이 마음이 부풀었다.     


  퇴근길 발걸음이 둥둥 뜬다. 문을 열자마자

- 이열~, 딸 대단한데! 엄마 아빠한테 말도 안 하고. 이번엔 어떻게 뽑혔대?

- 응. 방법을 바꿨어. 친구들한테 진지하게 말고 재미나게 말했더니 된 거 같아.

  지난 1학기 때는 출마의 변에 그렇게 얘기했단다. 약간 의젓하게. 내가 반장이 되면 코로나 시대에 멀어질 수 있는 친구 사이를 가깝게 좁히는 반장이 되겠노라. 이번엔 처음부터 깨방정을 부렸단다. “저의 밝고 넘치는 에너지로 즐겁지만 안전한 우리 반이 되도록 노력할게요! 그런 의미에서 내 이름으로 삼행시를!” 뒤에 삼행시가 빵 터졌단다. 기호 5번 나 아무개를 꼭 찍어 달라, 대충 그런 내용이었단다.     


  그럴듯하다. 패인 분석도 잘 됐고 전략 수정도 훌륭하다. 지난번엔 의도는 나쁘지 않았으나 접근 방법이 빗나갔다. 진지하고 심각한 분위기로는 친구들 공감을 사기 어렵다. 바꾼다. 일단 재미있고 친근하게 다가간다. 친구들이 원하는 건 선생님 같은 반장이 아니다. 나랑 같이 놀아줄 재밌는 친구다. 나는 친구들과 사이좋고 재미난 반장이 될 것이다. 영화 <동막골>의 촌장 어르신도 그러셨다. “뭘 좀 멕여이지..” 부락민들의 전폭적 지지, 오랜 태평성대, 위대한 영도력의 비결을 묻는 인민군 장교에게 촌장은 그들이 원하는 것을 줄 수 있어야 한다고 답했다. 딸아이 반 친구들이 원하는 건 ‘재미’다.     


  딸아이에게 반장 되니까 뭐가 가장 기쁘냐고 물었다. 인싸 중의 인싸 ‘핵인싸’가 돼서 좋단다. 거기다 대고 못난 아빠가 또 잔소리를 했다. “딸, 너만 인싸 되지 말고 ‘아싸’인 친구들도 잘 챙겨줘.” 아이가 진절머리 친다. “아, 내가 알아서 한다고!” 모쪼록 감투가 아니라 공복(公僕), 그것이 선출직 대표의 길임을 일찍이 깨우치길 바라는 건 아빠의 욕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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