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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on Sep 14. 2021

2천 원의 양심

  머리카락 자르는 데 비싼 돈 들이는 게 아깝다. 미용실인데 클럽이라고 이름 붙인 곳을 다닌다. 집에서 걸어서 칠팔 분 거리다. 일반 컷은 만 천 원, 디자인 컷은 만 삼천 원이다. 일반 컷은 가위보다 이발기를 많이 쓴다. 남자 중고생들이 많이 하는 상고머리나 스포츠 스타일에 해당한다. 디자인 컷은 말 그대로 미용사 선생님이 디자인에 더 신경을 써서 자르는 컷이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매번 디자인 컷 값을 치른다. 선생님, 제 머리는 디자인 신경 안 써주셔도 되는데요.    

 

  일요일 오후 두 시에 미용실 문을 열었다. 기다리는 손님이 많다. 미용사 선생님이 오후 늦게 다시 오시는 게 어떠냐고 권한다. 집으로 돌아가 시간을 더 보냈다. 오후 네 시 반에 두 번째로 미용실 문을 열었다. 여전히 손님이 많다. 이번엔 돌아가지 않겠다. 사십 분을 기다려 푹신한 미용 의자에 올랐다. “많이 기다리셨죠? 추석 전이라 미리 머리 손질하려는 분들이 많은가 봐요.” 선생님 말씀이다.     


  내 머리가 디자인 컷이긴 한가보다. 앞 손님들보다 시간이 조금 더 걸린다. 선생님이 가위질도 많이 하신다. 인정. 상반신을 두른 하얀 천을 거두며 수고하셨습니다,라고 듣는다. 저야 가만히 앉아 있었고 수고는 선생님이 하셨죠.  샴푸실로 가서 직접 머리를 감는다. 샴푸에 박하 성분이 있는지 머리통이 시원하다. 선반 아래쪽으로 뚫린 구멍에서 수건 한 장을 힘껏 뽑는다. 머리를 털어 물기를 없앤다. 드라이어로 미지근한 바람을 불어 말린다.     


  카운터로 가서 신용카드를 내민다. 미용실 문을 열고 나서는데 바깥공기가 유난히 상쾌하다. 조금 전에 받아 든 신용카드 영수증을 무심결에 펼쳐 본다. 그런데 웬걸? 영수 금액이 만 천 원이다. 일반 컷이라기에는 미용사 선생님이 오늘도 디자인에 신경을 많이 쓰셨다. 오류다.     


  솔직하게 고백한다. 살짝 기분 좋았다. 오예, 이천 원 세이브. 일반 컷 비용을 들여 디자인 컷을 받았다. 미용실에서도 이미 많이 걸어왔다. 이대로 조금 더 가면 홈 스위트 홈이다. 그러다가 얼른 마음을 고쳐먹었다. 내가 지금 무슨 치사한 생각을 하는 거냐. 결정적으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 양심이 고작 이천 원짜리일 수 없다. 이천 원 아끼겠다고 귀중한 양심의 눈을 가릴 순 없었다.     


  이미 오늘 두 번이나 간 미용실에 세 번째로 간다. 문을 여는데 미용사 선생님과 손님들 시선이 일제히 나에게 꽂힌다. 저 아저씨 왜 다시 왔지? 눈빛이 말한다. 카운터로 가서 아까 계산이 틀리셨다 말했다. 만 삼천 원 내야 하는데 만 천 원만 결제하셨다고 일렀다. 이천 원 더 긁어달라고 청했다. 선생님이 무척 고마워하신다. 이것 때문에 일부러 가던 길 돌아오셨느냐 물으신다. 나는 겸연쩍어하며 신용카드를 받아 든다.     


  미용실을 돌아 나오는데 아까보다 바깥공기가 더 달콤하다. 나는 이천 원에 양심을 팔지 않은 사람이다. 그 돈 이천 원이 미용실 매출에 티끌만큼의 영향도 없을 줄 안다. 어쩌면 계산 틀린 것 자체를 모를 수도 있다. 그래도 나는 단골손님으로서의 의리를 지켰다. 앞으로 이만 원, 이십만 원, 이백만 원에도 양심을 팔지 않을 다. 물론 그 이상도.     


  멀끔해진 머리와 더불어 일요일 저녁이 평화롭다. 왠지 썩 괜찮은 사람이 된 기분이다. 나는 앞으로도 꾸준히 ‘파란 클럽’에 다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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