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포터 시리즈를 좋아한다. 군대 말년 병장 때였을 게다. 휴가 나갔던 내무반 후임병이 장안의 화제라는 책을 한 권 들고 왔다. 표지를 보니까 딱 애들 보는 책 같다. 왼쪽 팔에 노란 완장을 차면 그날은 밤새는 날이다. 당직 사관 근무. 부대 선임 병사 중에 일부 인원이 당직 사령이라고 부르는 간부를 도와 밤새 지휘통제실을 지킨다. 어느 밤 졸음을 쫓고 무료함을 지우려고 그 책을 주워 왔다. 이게 뭐가 그렇게 인기라는 거야, 막 양장본 표지를 넘긴 듯한데 날이 밝는다. 그 책이 해리포터 시리즈 1권, ‘마법사의 돌’이다.
재작년 여름 아내, 딸아이와 영국 런던 근교에 있는 해리포터 스튜디오를 찾았다. 내 오랜 위시리스트의 실현이다. 핀란드 헬싱키 현지에서 대학원 해외 과정 학기를 마치고 귀국하는 여정이었다. 런던을 경유하며 5일 정도 지냈다. 아내가 야심 차게 끼워 넣은 일정이다. 아이가 아니라 다 큰 어른, 남편을 위한 기획이다. 아내는 나의 팬심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다. 영화 채널에서 해리포터를 방영하면 절대로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오빠, 그거 또 봐? 어, 안 지겨워.
잊지 못할 해프닝도 있었다. 단 얼마라도 아끼겠다고 아내는 스튜디오 입장권을 출국 전부터 예약해서 구매해두었다. 런던 숙소에서 출발해서 기차며 버스를 갈아탔다. 그야말로 산 넘고 물 건너 스튜디오 입구에 도착했다. 입장권을 보여주고 들어가려는데 직원이 “저스트 어 세컨드!” 한다. 관람 날짜가 다르단다. 유 가이즈(You guys)는 예스터데이(yesterday)에 컴(come)했어야 한단다. 청천벽력이다. 아내가 한국과 영국 현지 날짜를 헷갈린 모양이다. 여기까지 와서 빈손으로 아니 빈 눈으로 돌아갈 순 없다. 헌데 입장권을 다시 사려고 해도 문제다. 하루 입장 인원 제한이 있어 당일 구매는 불가능하다. 가장 굴종적인 표현을 찾아가며 사정사정했다. 원래 안 되는 건데 특별히 유 가이즈들만 재구매를 허락하겠단다. 결국 두 배의 요금을 치르고 어렵사리 입장했다. 어제 왔었다면 어른 둘, 아이 하나에 한국 돈 이십만 원이다. 아, 나는 아내에게 한 마디 싫은 소리도 안 했다.
해리포터 시리즈에 ‘호크룩스’라는 것이 나온다. 설명하려면 주인공 해리포터의 숙적 볼드모트부터 거론해야 한다. 볼드모트는 어둠의 마법사다. 힘들게 익힌 마법을 큰일에 쓰지 못하고 저 하나 챙기는 데 급하다. 급기야 불멸을 꿈꾼다. 굳이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불사의 몸을 얻으려면 영혼을 쪼개어 특정한 사물에 담아야 한다. 볼드모트의 영혼이 깃든 물건이나 생명체가 바로 호크룩스다. 해리포터 자신도 호크룩스 가운데 하나다. 악당의 영혼 한 조각을 속에 품은 주인공이 부활을 꿈꾸는 악당과 싸운다. 이 얼마나 매력적인 플롯인가.
며칠 전엔 치과에 갔다. 지금 사는 곳이나 회사 근처로 가지 못하고 장가들기 전까지 살던 옛 동네 치과엘 다닌다. 꼬꼬마 시절부터 내 입속을 살펴주시던 원장 선생님 손이 편하다. 까까머리 중학생이 불혹을 넘었고 중년의 선생님은 은발이 되었다. 병원을 나서며 옛날 아파트 전경을 사진으로 남겼다. 고등학교 친구들 톡방에 슬쩍 올린다. 그중 통화한 지 한참 된 친구 녀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로 연결되지 못하고 문자가 수신된다. 회의 중입니다, 곧 연락드리겠습니다. 바쁘구나.
차를 몰아 집으로 향하는데 전화가 들어온다. 핸즈프리 모드로 받는다.
- 어, Hoon아 일 하느라 못 받았다.
- 그래, 잘 지냈냐?
- 뭐 그럭저럭. 톡방에 사진 봤다. 동네 갔었냐? 오랜만이네.
시시콜콜 사는 얘기가 잠시 오간다. 늦장가 간 녀석의 딸아이가 이제 막 18개월 됐단다. 제수씨는 육아휴직을 끝내고 복직했단다. 부모님 안부를 물으니 아버지가 얼마 전에 병이 나셨다 회복하셨단다. 나에게도 부모님 건강 살펴드리라고 당부한다. 추석 때 어디 가느냐 묻는다. 같은 질문을 두고 서로 번갈아 대답을 내놓는다. 잘 지내라, 또 연락하자. 전파를 꾸어 쓴 찰나의 해후가 끝난다.
통화를 마치는데 불현듯 해리포터 시리즈의 호크룩스가 생각난다. 불멸을 위해 내 영혼을 쪼개서 담아놓은 물건이나 생명체. 유레카, 오랜 친구 녀석들이 바로 내 호크룩스구나! 철부지 시절 친구들을 만나면 뭐 때문에 그렇게 좋은지 확실히 알았다. 만나서 먹고 마시는 게 다가 아니다. 녀석들과 한창 싸돌아다니던 시절, 그때의 나와 만나기 때문이다. 어린 날의 내 영혼을 쪼개어 녀석들 얼굴에, 목소리에 담았다. 방금 나는 몇 조각의 호크룩스 중 하나와 오랜만에 연결되었다.
호크룩스의 특성 중에 그런 것도 있다. 모든 호크룩스가 파괴되면 그 주인 역시 사라진다. 친구들이 나의 호크룩스임을 알아버린 이상 나는 어쩔 수 없이 녀석들의 안녕을 빌어줄 수밖에 없다. 너희가 건강해야 내가 오래 산다. 부디 아프지 말고 굳건히 버텨다오, 내 젊은 영혼의 조각들아.
호크룩스가 모두 모이면 마침내 불사의 몸으로 부활한다. 언제쯤이면 내 호크룩스들을 한 자리에 모을 수 있을까. 백신 주사 맞으면 여섯 명까지 모일 수 있다는데 그렇게라도 가능할까. 돌아올 연말이면 될지 다시 내년을 기약해야 할지 알 수 없지만 그날을 그린다. 그때 우리들의 어린 영혼과 모두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모르고 있겠지만 나 역시 녀석들의 호크룩스이므로. 마법 같은 재회의 순간을 기다린다. 적어도 우린 악동이었지 악당은 아니었으니까. 볼드모트는 아니지만 호크룩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