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위로할 수 있는 건 오직 사람뿐

by Hoon

까마득한 옛날 중학교 1학년 겨울이었다. 기억도 나지 않는 이유로 같은 반 단짝 친구 녀석과 다투었다. 치고받고 몸으로 싸운 것보다 더 마음이 쓰렸다. 그날 이후 둘 사이 일절 말이 오가지 않았다. 답답하고 괴로웠다. 그러다가 문득 분하고 억울했다. 더 지나니 기운이 없고 기분이 축축하게 젖는다. 먼저 손 내밀 마음은 없었다. 사과에는 용기가 필요했고 난 용감하지 못했다.


중학생의 우울감이었다. 인간의 방어기제는 아주 일찍부터 작동한다. 친구 녀석 생각하면 싫다. 생각하지 말자. 아니 다른 생각하자. 괜찮은 생각거리가 있다. 가지고 싶었던 16비트 게임기. 오락실 험악한 고등학생 형들 틈에서 힘들게 도전했던 게임을 집에서 마음껏 한다. 지난 설날부터 차곡차곡 용돈을 모았다. 조금만 더 보태면 살 수 있다. 우리 집 거실에 놓일 게임기 생각으로 친구를 지웠다.


디데이가 왔다. 오늘 저녁 나는 게임기를 사러 간다. 묵직한 상자를 품에 안고 집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때는 없던 말이지만 이른바 ‘언박싱’의 쾌감을 맛볼 터이다. 수업을 마치고 내 방 책상 서랍 깊숙한 데 숨겨놓은 봉투를 꺼낸다. 동네 아이들의 아지트, 게임숍으로 향한다. 몇 달을 눈독 들인 게임기 상자가 드디어 판매대 높은 자리에서 내려온다.


처음 TV와 연결하여 몇 판 해본 날만 즐거웠을까. 금세 심드렁해진다. 이건 내가 기대한 만족감이 아니다. 게임기만 손에 넣으면 영원히 행복할 줄 알았다. 친구와 다툰 이후로 생긴 마음속 동굴이 매끄럽게 채워질 것 같았다. 토요일 방과 후 집으로 가는데 친구 녀석 생각이 동굴에서 기어 나온다. 우리 집 거실에서 녀석과 같이 하면 얼마나 재미있을까. 다시 말하지만 그때의 나는 사과와 용서, 화해의 기술을 알지 못했다. 그 겨울 끝내 친구와 관계를 돌려놓지 못한다. 녀석과 나는 2학년이 되었고 각자 다른 반에 속했다.


삼십 년쯤 지나 지금의 나로 돌아온다. 몇 달 전 꺼내어 풀어놓을 수 없는 이유로 불안과 강박을 겪었다. 중년의 우울감일 지도. 그때 날 음습한 그곳, 감정의 응달에서 꺼내어 준 건 바로 사람이었다. 소수의 가까운 친구, 형 동생, 동료 선후배였다. 가깝다는 건 말 그대로 밀접한 마음의 거리다. 특이하다 못해 기이하고 예민한 데다 모나기까지 한 나를 그것 자체로 인정하고 지지해준 사람들. 대단히 드물고 귀한 멸종위기의 존재들이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 당신일 수도 있다.


좋은 집이나 비싼 자동차, 화려한 옷가지가 잠깐의 쾌감을 제공해 줄 수는 있다. 그러나, 절대로 위로를 주지는 못한다. 물질, 재화의 역할은 딱 거기까지다. 빨간색 슈퍼카를 타고 시속 삼백 킬로미터로 공기를 가른다 한들 어느 중학생의 게임기와 다를 바 없다. 달리는 자동차가 당신의 외로운 손을 잡아줄 수는 없다. 난 어차피 많이 가지지도 못했다. 아내와 연애할 때부터 함께 타던 낡은 자동차, 지은 지 15년쯤 된 구식 아파트, 그마저도 한참을 갚아야 할 대출금, 그저 그런 월급쟁이의 복색이 내가 가진 전부다. 내가 마음 기댈 곳은 오직 사람뿐이다.


나도 위로를 주는 사람이고 싶다. 외롭고 아픈 이에게 너 아프냐, 나도 아프다 말하는 사람 말이다. 만나서 술 한 잔 부딪치며 살아가는 얘기 나누면 위안이 되는 사람, 나만 아픈 거 아니었구나 깨닫게 해주는 역할을 나는 희구한다. 진심을 담은 나의 음성이 지치고 고단한 마음을 잠시라도 보듬을 수 있으면 좋겠다. 만나지 못하는 이에겐 말의 기록, 부족한 글로서 위로가 되고 싶다.


물질은 절대로 사람을 위로하지 못한다. 사랑하는 이의 마음이 담긴 특별한 것들과 말 못 하는 생명 약간을 빼면 모두가 그렇다. 사람을 진정으로 위로할 수 있는 건 오직 사람뿐이다. 사람이 만들었지만 만질 수 없는 것들, 말과 글, 그림과 음악 같은 것까지만 인정한다. 공연히 센티해지는 저녁이다. 부끄럽지만, 나 가을 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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