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가 불러달라고 부탁을 받았다. 이 나이에 그런 거 해도 되나. 중년 아저씨가 주책이라고 욕먹지나 않을까. 나는 됐고 결혼식에 폐 끼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신랑 신부만 괜찮다면 OK. 아, 놔 간만에 목 좀 풀어야 쓰겄네. 노래는 뭐가 좋을지 물었다. 세 곡 중에 고르란다. 그럼 난 「사랑하게 될 줄 알았어」. 전미도 배우 말고 신효범 가수 버전. 나는 오리지날이 좋더라.
축가를 열댓 번쯤은 한 것 같다. 결혼식 사회도 스무 번은 넘는다. 남의 잔치에 엄중한 책임을 안고 갈 때마다 자신했다. 나 정도로 타인을 위해 봉사하면 이다음에 반드시 천국에 갈 거라고. 내 결혼식에서도 자축가를 불렀다. 지금 생각해도 민망한 일인데 뭐에 홀린 듯 해치웠다. 신부의 로망이라니 눈 딱 감고 한 번만 하기로 했다. 내 인생에 두 번의 자축가는 없다.
축가에 얽힌 훈훈한 사연 하나. 모교 한 학번 아래 친한 후배가 축가를 부탁했다. 간곡한 요청이 아니라 맡긴 돈 찾아가듯 당당하다. 내가 대학교 2학년, 자기가 신입생일 때 어느 밤 술자리에서 계약이 있었단다. 나중에 저 장가가면 형이 축가 불러주기로. 듣고 보니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위약금 물어내고 싶지 않았다. 그때의 축가는 유독 잘 빠졌다. 아주 흡족.
축가에 얽힌 슬픈 사연도 하나. 위 후배의 친구 녀석도 축가를 부탁해왔다. 자기는 아끼는 동생 아니냔다. 계약은 없었지만 불러주기로. 신부가 가곡 「시월에 어느 멋진 날에」를 고르셨다. 10월에 열리는 결혼식은 이 노래가 불문율인가 보다. 내게 익숙한 스타일은 아니다. 아니나 다를까 사고가 일어났다. 2절을 부르다 가사를 헷갈렸다. 힙합씬에서 하는 말로 심하게 ‘절었다’. 다행히 신랑 신부가 모른다. 하객들도 눈치 못 챈 듯하다. 나만 아는 실수가 됐지만 영 찜찜했다. 일 년이 채 못 지났을까. 다른 경로를 통해 후배가 이혼했다고 들었다. 내가 축가를 잘못 불러 그런 사달이 난 것 같다. 그때 이후로 나는 더욱더 축가 요청을 수락하는 데 신중하다. 부르기로 마음먹으면 조금의 실수도 없이 정성을 다해 부른다. 진심으로 신랑 신부의 행복을 기원한다.
그러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진정한 축가는 없을까. 우리 사회가 부르는 축가는 진짜 축가가 아니다. 가까운 제삼자의 입장에서 앞에 선 커플을 향해 두 사람의 출발을 축하하는 노래가 아니다. 노랫말을 잘 들어 보시라. 그냥 내가 사랑하는 당신한테 부르는 노래다. “그대를 만나고 그대의 머릿결을 만질 수가 있어서..” 신랑 친구가 어인 일로 신부의 머리털을 만지는가. 그랬다면 엄청난 추문이고 불륜이다. 이건 그냥 ‘대리 세레나데’다. 명창의 입을 빌어 사랑을 속삭인다 해도 엄밀히 말해 진정 축하하는 노래는 못 된다. 내 사랑을 왜 남이 실행하는가. 우리에게 필요한 건 대신 부르는 사랑가가 아니라 말 그대로 축하의 노래다.
장기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이 땅에 없는 노래라면 내가 직접 만들리라. 노랫말엔 마땅히 이런 내용이 들어가야 할 것이다. 사랑하는 친구야, 나보다 몇 곱절의 사랑을 너에게 줄 유일한 사람을 만났구나. 오늘 그 사람과 드디어 이루어지는 날이구나. 너의 결혼이지만 마치 내 일처럼 기쁘다. 무작정 행복하냐, 아니면 조금 두렵냐. 너무 큰 걱정은 하지 마라 너는 네 영혼의 단짝과 잘 헤쳐 나갈 거다. 서로 진정으로 사랑하고 아껴라. 여기 가장 숭고한 사랑이 존재함을 세상에 증명해 보여라. 부족한 노래지만 다시 한번 진심으로 축하한다. 오래도록 행복해라, 사랑하는 나의 친구야.
멜로디는 밝은 장조에 너무 느리지 않은 미디엄 템포였으면 좋겠다. 도입부, 벌스(verse)는 엄숙하거나 장중하지 않고 부드럽고 경쾌하게 시작한다. 오늘의 기쁨을 되새기는 노랫말과 더불어 노래도 점차 고조된다. 어쩌면 두 사람의 인생에 뜻밖에 시련이 닥쳐올 수도 있다는 부분은 곡의 브리지(bridge)가 된다. 그러나 마침내 둘이 함께 아름답게 극복할 것이라는 노랫말 부분에서 곡조도 절정을 맞는다. 축하하고 행복하라는 후렴 말미는 잔잔한 감동과 여운을 줄 수 있어야 한다.
늦은 가을로 예정된 결혼식에서 내가 만든 진짜 축가가 공개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다만 기성곡이라 해도 진심으로 축하하는 마음을 담아 정성껏 부를 것이다. “사랑하게 될 줄 알았어. 우리 처음 만난 그날에. 시간 속에 희미해지는 사랑에 그대가 흔들린 대도 그땐 내가 잡을 게요, 그대처럼.” 이 노랫말 부분에선 울컥 목이 멜까 걱정이다. 그런 기대도 있다. 그날 나는 어쩌면 12년 전의 나와 아내를 볼지도 모른다. 새로 시작하는 신랑 신부의 모습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