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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on Sep 24. 2021

슬램덩크 세대 아저씨가 몰래 농구화 사는 방법

 오늘은 스크롤의 압박을 미리 경고해드린다. 쥐뿔도 모르면서 철학적 사고라도 하는  쓰는 글은 스스로 벅차다. 저 좋다고 하는 얘기는 술술 나온다. 적당히 눈치 챙기면서 최대한 이해가 가능한 방향으로 모시겠다. 지루하지 않게. 여러분을.    

 

만화 슬램덩크의 주인공 강백호(우)와 서태웅(좌)

  슬램덩크 세대부터 정의하자. 90년대 초중반 남자 중고생들로부터 폭발적인 인기를 얻은 동명 만화다. 아쉽게도 메이드 인 재팬. ‘이노우에 타케히코’라는 일본 만화가가 그렸다. 강백호나 서태웅이라는 만화 주인공 이름을 어디서 들어본 것 같다면 당신은 슬램덩크 세대의 주변인이다. 2021년 현재 30대 후반에서 40대 후반 정도 아저씨들이 바로 그 세대다. 그들이 중고딩 때에는 우리나라 농구대잔치, 미국 NBA 할 것 없이 농구가 가장 핫한 스포츠였다. 지금은 예능인이 된 서장훈, 허재 씨가 현역 농구선수로 뛰던 시절이다. 농구의 신, 리빙 레전드 마이클 조던의 덩크슛을 AFKN(주한 미군 방송망) 2번 채널에서 위성 생중계로 봤다면 당신이 바로 슬램덩크 세대다.     


  슬램덩크 세대 중 일부가 운동화에 환장한 사람들, 즉 스니커 마니아로 성장했다. 서구권에서는 스니커 헤드(Sneaker-head)로 통칭한다. 나도 그중 한 사람이 되었다. 시작은 그랬다. 중학교 3학년 봄 동네 상가에 입점한 스포츠 용품 N사 매장에 미국 농구스타 마이클 조던이 직접 착용한다는 농구화가 진열됐다. 당시 최고가 98,000원. 같은 제조사 일반 운동화가 사오만 원 했으니 거의 두 켤레 값이다. 방과 후 매장에 들렀다가 완전히 매료되었다. 이건 사야 돼. 그때처럼 학교 시험공부에 전력을 다한 적이 없다. 성공했고 획득했다. 매년 새 모델이 나오는데 고3 때까지는 어떻게든 손에 넣었다. 아니 발에 신었다. 대학 가서 술 쳐 먹기 시작하면서 멀어졌다.     


소장 중인 중3 봄에 구입한 첫 농구화 복각판

  몇 해 전 퇴근길 전철 안에서였다. 인터넷 서핑 중에 학창 시절 신었던 농구화가 복각판으로 재발매된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건 사야 돼. 술자리를 줄이고 용돈을 모았다. 마침내 발매 날이 되었는데 대학원 수업과 겹쳤다. 맞아 죽을 각오를 하고 아내에게 부탁했다. 의외로 뺨이 아니라 긍정의 대답이 돌아온다. 철없는 남편을 대신해 아내가 몇 시간 줄을 서서 그놈의 농구화를 사다 주었다. 세상에 이런 반려자는 없다! 집에 와서 얼른 끈을 묶어 신어보았다. 전신 거울 안에 중학생이 있었다.     


  그게 두 번째 시작이었다. 한 켤레에서 그칠 수 없었다. 그래, 중고등학교 때 신었던 것들만 복각판으로 모아보자. 중고거래 사이트를 뒤졌다. 중고품이 아니라 신지 않은 신품으로 어렵게 구했다. 자극은 더 큰 자극을 견인한다. 10켤레만 채우자. 거기서 만족하지도 못했다. 마이클 조던 선수가 현역 때 직접 신었던 모델들만 모으자. 그러던 것이 그가 은퇴한 후에 출시한 제품까지 탐내게 되었다. 어느덧 70켤레가 넘었다. 미쳤다.     


소장 중인 농구화 수집 2막의 기폭제

  당신만은 어설픈 스니커 헤드가 되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발매 정보는 어디에서 얻는지 공유한다. N포털 사이트에 ‘N사 매니아’라는 커뮤니티가 있다. 그곳에 가입하면 국내와 해외 신제품 발매 정보를 일목요연하게 확인할 수 있다. 발매 정보를 자진해서 올려주는 박애적 구성원들이 많다. 끝 간데없는 이타심의 발현이다. 최근에는 작은 소동도 있었다. 그곳 카페가 N포털 계열의 운동화 중고거래 서비스 플랫폼에 팔렸다. 자본주의는 뒷골목 클럽에도 마수를 뻗친다. 분연히 일어나 마땅히 행동하는 이들이 그래서 존재한다. 대기업의 시장 지배를 염려하는 사람들이 새로운 커뮤니티로 이동하여 둥지를 틀었다. 필자도 그곳 ‘S하우스’로 얼른 이주했다.     


  발매 정보를 알았다고 아무 때나 아무데서나 사지 못한다. 먼저 오프라인, 즉 매장 현지에서 구매하는 방법을 알아본다. 매장 앞에 길게 줄을 지어서 기다렸다가 구매하는 것, 그것을 마니아들은 ‘캠핑’이라고 부른다. 발매 당일도 아니고 전날부터 밤새 매장 앞에서 기다렸다가 운동화를 사 가니, 말 그대로 야영의 의미에서 그런 명칭이 붙은 듯하다. 어떤 제품은 이삼일 전부터 대기 줄이 있기도 다. 대개 캠핑은 매장 앞에 가장 먼저 줄을 선, 이른바 ‘1번’이 대기 줄의 통제권을 가진다. 스니커 헤드들 사이에서 불문율이다. 매장 직원이 입장 통제를 관장하기는 하지만 대기 상태에선 1번이 왕이다. 애꿎은 직원이 함께 밤을 새울 수도 없는 노릇이다. 1번에게 이름과 전화번호를 말해두면 일정 구역 내에서 자유롭게 대기할 수 있다. 그러다가 1번이 한두 시간마다 한 번씩 출석을 부른다. 자기 순서에 대답하지 못하면 자동 탈락이다. 캠핑 유형 중에 ‘리얼 캠핑’이란 것도 있다. 개점 시간까지 실제로 대기 줄을 만들어 기다리는 경우다. 진짜 캠핑이라는 뜻으로 그렇게 부른다. 인기가 극도로 많은 일부 운동화 모델은 1번의 판단과 구매 대기자들의 동의를 통해 리얼 캠핑으로 진행한다. 나도 딱 한 번 해봤는데 사람 할 짓이 못된다.     


소장 중인 중고등학생 시절 추억 어린 농구화 시리즈

  온라인으로 사는 방법도 있다. 코로나 시국인 지금은 오프라인보다 더 흔하다. 온라인 발매는 대체로 추첨을 통해 이루어진다. 마니아들은 ‘래플(raffle : 제비뽑기)’이라고 부른다. 발매에 앞서 인터넷 응모를 접수한다. 이름과 전화번호, 원하는 사이즈를 앙케트 양식으로 적어내면 발매 시간에 결과를 알려준다. 당첨은 기대하지 마시라. 내 경우 거의 매일 응모한다고 가정했을 때 1년에 한두 번 될까 말 까다. 가족과 친지, 친구나 지인 찬스를 총동원해 여러 계정으로 응모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들과의 경쟁까지 고려하면 확률은 제로에 수렴한다. 인터넷 홈페이지에서 선착순으로 발매하기도 한다. 그것 역시 희망은 금물이다. NASA(미항공우주국)에서 제공하는 슈퍼컴퓨터라도 쓰는지 오픈과 동시에 품절이다. 젊은 친구들 말로 ‘1초 컷’ 아니 ‘0.1초 컷’이다. 이러나저러나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여기서 더 가혹한 조건이 붙기도 한다. 일명 ‘드레스 코드’다. 대기 줄의 혼잡을 줄이기 위해 매장에서 취하는 나름의 묘안이다. 어떤 신제품은 구매하려면 특정 브랜드의 운동화나 옷을 챙겨 입고 매장으로 와야 한다. 오프라인 캠핑에 드레스 코드가 붙으면 그야말로 진풍경이다. 운동화 박물관이 따로 없다. 온라인 래플에 당첨됐다고 해도 드레스 코드에 맞춰 제품을 사러 가야 한다. 요구하는 운동화나 옷가지가 없다? 아쉽지만 꽝 다음 기회에. 전에 발매했던 그 모델이 있어야 다음 시리즈를 살 수 있는데 지난번에 탈락했다면? 빈익빈 부익부다.     


소장 중인 만화 슬램덩크 주인공 강백호가 신은 농구화

  도대체 왜들 이런 수고를 감당할까. 수요가 공급을 훨씬 초과하기 때문이다. 수요와 공급 곡선이 만나는 지점이 자꾸만 올라간다. 정식 매장 발매를 통해 사지 못하면 웃돈을 치러야 한다. 프리미엄이 붙는다. 그게 싫어 캠핑을 하는데 그것 때문에 철야를 각오하는 사람도 많다. 글로벌 스포츠 용품 회사 N사의 생산 능력이 모자라서가 아니다. 회사는 당장의 매출보다 브랜드 가치의 영속에 무게 중심을 두는 모양이다. 헌데 최근엔 마니아들 사이에서 낭보도 있다. 인기 댄스그룹 가수 G 씨는 알아주는 N사 마니아다. 그가 어떤 운동화를 신고 무대를 누비면 그 길로 중고 가격이 미친 듯 치솟는다. 시쳇말로 ‘떡상’ 한다. 그런데 그가 요즈음 그토록 아끼던 농구화 시리즈에 심드렁한 눈치다. 그가 신지 않으니 프리미엄이 안 생긴다. 수집이 목적인 사람들에겐 더 없는 호재다. G 씨는 재작년 본인 이름을 전면에 걸고 N사와 협업 제품을 출시하더니 올 겨울엔 오리지널 모델을 준비 중이다. 엄청난 프리미엄을 예상한다.     


  프리미엄의 어두운 단면도 목격했다. 캠핑 대기 줄에 섰는데 연로하신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여럿 섞여 계신다. 멋모르고 봤을 때는 대단히 ‘힙’한 취향의 어르신들인가 싶었다. 헌데 아무리 봐도 농구화와 영 인연이 없으실 복색이었다. 제품을 사서 나가시더니 으슥한 골목으로 들어가신다. 그곳에서 중년의 남자에게 봉투를 받으시고 운동화가 들어있는 상자를 내주신다. 남자의 뒤에 세워 놓은 작은 트럭에 상자가 그득하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인데 재판매가 주업인 리셀러(Reseller), ‘업자’라고 들었다. 심지어 드레스 코드가 있는 날에도 보았다. 재판매 업자가 노인들에게 낡은 운동화를 나눠주기까지 한다. 마니아 입장에서 참담한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소장 중인 농구화 A모델 1탄 시리즈

  음습한 얘기는 여기서 줄이자. 그렇다면 2021년 지금은 어떤 모델이 가장 인기가 있는가. 단연 살아있는 전설 마이클 조던 선수를 위해 N사가 처음 제공한 A모델 시리즈 1탄이다. 무려 35년 전, 그러니까 1985년 탄생한 이 모델이 오늘날까지 엄청난 각광을 받는 이유가 무엇일까. 과거에 대한 향수, 복고 열풍, 즉 레트로(retro)의 유행에 기인한다. 아이러니 한 건 조던 선수 자신은 이 농구화를 처음 받아 보았을 때 마치 광대가 된 기분이었다고 소회했다. 당시로선 파격적인 화려한 컬러의 조합 때문에.(당시 미국 NBA 선수들은 단색의 농구화를 주로 착용했다.)     


  콜라보, 협업 제품도 인기다. 슈프O, 사카O, 프라그먼O, 유니O, 언디O 등 해외 유명 스트릿 웨어나 디자인 전문 회사, 편집 숍과 공동 작업한 모델이 대단한 각광을 받는다. 프리미엄도 막강하다. 래플 당첨은 차라리 기적에 가깝다. 특히 N사는 전통적으로 스포츠 스타들과만 제휴해 왔는데 근래 오랜 전통을 바꿨다. 힙합 가수 같은 대중 예술인, 즉 연예인과의 협업도 활발히 진행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G 가수도 이런 흐름과 궤를 같이 한다.     


소장 중인 G가수와 N사 콜라보 운동화

 멀리 돌아왔다. 이제 필자의 비법을 공개한다. 슬램덩크 세대 아저씨가 몰래, 정확히는 아내 모르게 한정판 운동화를 구매하는 방법! 빠밤!!     


  앞서 소개한 방법으로 어렵게 운동화를 구매했다고 치자. 산 게 다가 아니다. 집으로 가지고 들어가야 한다. 그때 진짜 내 꺼가 된다. 먼저 온라인 구매의 경우를 보자. 가장 안전한 것은 길 건너 본가, 부모님 댁으로 배송시키는 것이다. 모친에게 미리 오늘 오후 택배가 하나 도착할 것이라고 이른다. 엄마는 으레 “너 또 운동화 샀지?” 반응한다. 자세한 얘기 없이 퇴근길에 찾아가겠노라 응답한다. 만약 배송지 바꾸는 걸 깜빡했다? 비상이다. 아내보다 무조건 빨리 아파트 현관에 도착해야 한다. 경비실도 믿을 수 없다. 일전에 경비 아저씨는 귀가하는 아내를 불러 내 택배를 안겨주었다. 그날의 악몽이 되살아난다. 필사적으로 뛴다. 택배 상자를 손에 넣었다고 안심해선 안 된다. 말하지 않았는가, 집 문을 통과해야 진짜 내 것으로 귀속된다고. 아내가 없음을 확인하고 얼른 화장실 옆 다용도실, 안방 옷장, 작은 방 옷걸이 밑, 베란다 창고 등 은닉을 위한 공간을 탐색한다. 시간이 얼마 없다. 서둘러라. 아뿔싸! 학원 다녀온 딸아이가 외할머니와 함께 있었다. 훨씬 더 자연스럽게 행동해야 한다. 아이는 눈치 백 단이다. 지난번엔 비밀을 지키겠다고 해놓고 엄마에게 밀고했다. “엄마, 아빠 운동화 또 샀어!” 맨입으로 부탁한 내 실수다. 뭐라도 대가를 약속했어야 했다. 젤리, 액체 괴물, 초밥, 아무거나 구미가 당기는 걸로 걸어라.     


  오프라인 발매는 정말이지 쉽지 않다. 행운과 용기가 모두 필요하다. 퇴근과 발매 시간이 일치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밤샘 캠핑은 겨우 한두 번 성공했다. 아내가 곤히 잠든 새벽, 자객과 같은 동작으로 옷을 챙겨 입는다. 집을 나서며 현관문을 열었다 닫는데 ‘띠리리’ 신호음이 울린다. 심정지가 오는 줄 알았다. 앞서 소개한 1번의 도움으로 구매에 성공했다. 아침부터 어디 갔냐고 아내 전화가 온다. 마트에 먹을 거 사러 왔다고 둘러댄다. 거짓말은 아니다. 난 진짜로 집에 가는 길에 마트에 들를 것이다. 들르면 된다.     


포화 상태인 소장 운동화

  자동차 트렁크도 중간거점으로 요긴하다.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구매까지는 했는데 입장이 불가능하다? 후퇴도 작전이다. 무리하지 마라. 모든 것을 망치는 수가 있다. 순간의 오판이 아내의 토네이도 잔소리를 부른다. 자동차 트렁크에 임시 피난처를 마련하자. 그러기 위해 상시 자동차 키를 휴대하는 습관을 가지자. 키가 집에 있다? 잠깐 들어갔다 자연스럽게 가지고 나와야 한다. 어디 가냐고 묻거든 편의점 간다고 해라. 거짓말이 아니다. 난 진짜로 편의점에 들를 것이다. 들르면 된다. 소중한 운동화가 몇 날 며칠 집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차가운 자동차 트렁크에 갇히는 게 안쓰러울 수 있다. 조급해하면 안 된다. 가장 완벽한 한 번의 타이밍을 노려라.     


  절체절명의 위기를 극복하고 운동화를 집안으로 가지고 왔다. 언박싱도 나중으로 미루는 게 좋다. 아내는 자정 전에 취침에 들 것이다. 자다가 중간에 나오는 것은 위험하다. 차라리 거실에서 늦게까지 TV를 봐라. 안방을 열어 아내의 새근새근 숨소리를 확인한다. 이제 됐다. 조심스럽게 상자를 꺼내 운동화를 살피고 만져라. 유려한 곡선, 절묘한 색 배치, 부드러운 촉감을 누릴 시간이다. 무엇보다 전설이 품은 스토리텔링 자체를 감상하는 거다.     


눈으로 맛보는 가장 맛있는 안주

  이러고 산다. 아저씨의 취미 생활은 녹록하지 않다. 그렇더라도 이 땅의 슬램덩크 세대들에게 감히 제언한다. 단 하나의 취미를 가지라고. 수집, 감상, 연주, 활동, 큰돈 드는 것만 아니라면 무엇이든 좋다고. 어디 가만히 마음 둘 데가 있어야 우리도 산다고.     


  불금의 밤 퇴근하고 아내와 집에서 한 잔 부딪쳤다. 오늘 문득 당기는 농구화 한 켤레를 꺼내 노란 조명 밑에 둔다. 자린고비 굴비 보듯 술 한 잔 꺾고 농구화 한 번 본다. 징그러운 외계 생명체를 발견한 표정의 아내가 묻는다. 저게 그렇게 좋아? 응, 좋아. 내 푸른 날의 보물이야. 아내가 다시 말한다. 거기까지만 사라고. 지금 몇 켤레 있는지 재고 파악 다 해두었다고. 여차하면 팔아 치우는 수가 있다고. 부처님 손바닥 안이라지만 이런 협박은 좀 심한 거 아닌가. 슬램덩크 세대들이여, 분연히 일어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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