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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on Oct 09. 2021

구워 먹는 고기가 지겨울 때 ‘수비드’ 요리하는 방법

부제 : 수비드 조리법이 알려준 관계의 적정 온도

  구워 먹는 고기가 지겹다. 숯불 붙이고 석쇠에 올려서 구워 먹는 것 말이다. 팬에 기름 둘러서 굽는 맛도 빤하다. 가족 캠핑 저녁 메뉴는 늘 바비큐였다. 소고기 아니면 돼지고기 정도의 변주다. 처음엔 맛있다고 먹었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다. 익숙한 건 권태롭다. 맛의 변화가 필요하다. 같은 고기라도 좀 색다르게, 더 맛있게 먹는 방법 없을까.     


  ‘수비드(Sous vide)’ 조리법이라는 세계를 알았다. 진공 상태라는 뜻의 프랑스어다. 주로 고기 종류의 식재료를 비닐 팩에 밀봉한다. 그걸 미지근한 물에 담가 오래 익히는 조리법이다. 18세기 말 물리학자 벤자민 톰슨이 처음 고안했다. 이 양반 이력이 참 이채롭다. 미국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활동하다 프랑스에서 돌아가셨다. 과학자가 어쩌다 요리까지 관심을 가지셨을까. 요즘 말인 ‘요섹남’의 조상이시다.     


수비드 조리법을 만든 벤자민 톰슨

  

비닐 팩을 진공 상태로 만들어주는 밀봉기

  수비드는 돈이 든다. 장비빨이 필요하다. 일단 수비드 기계가 있어야 한다. 수비드 기계는 50에서 90도 사이로 맞춘 물을 계속 회전시켜 온도를 유지한다. 예전에는 전자레인지만 한 크기에 가격도 수백만 원이었다고 들었다. 지금은 기술이 발전해서 마늘 빻는 절구 방아 정도 크기다. 초보자용은 인터넷 쇼핑몰에서 10만 원 내외면 살 수 있다. 밀봉기도 있어야 한다. 밀봉기는 비닐 팩 안의 공기를 빨아들여 진공 상태로 만들어준다. 뜨거운 열선이 있어서 비닐 팩 끝을 밀봉시킨다. 역시 10만 원 수준이다. 전용 비닐 팩도 함께 주문해야 한다. 밀봉기가 없다면 일반 지퍼 달린 비닐 팩을 쓸 수도 있는데 진공 상태가 아니어서 물에 뜬다. 전용 수조도 있으면 좋다. 전용 수조는 수비드 기계를 옆에 달고도 뚜껑을 덮을 수 있다. 냄비나 들통을 쓰면 뚜껑을 못 덮는다. 증기가 날아가기 때문에 물을 자꾸 보충해야 한다. 전용 수조도 이삼만 원은 한다.     


  마침 엊그제 고기를 좀 사 와서 수비드 조리를 했다. 소고기 돼지고기를 같이 사 왔다. 한우는 언감생심이고 미국산 등심이다. 돼지고기는 통삼겹으로 가져왔다. 먼저 키친타월로 고기 핏물을 닦는다. 마침 지난 캠핑 때 쓴 바비큐 시즈닝이 남았다. 고기 겉에 솔솔 뿌려주고 고르게 편다. 비닐 팩에 한 덩이씩 담는다. 덩어리 버터를 칼로 잘라 한 조각씩 비닐 팩에 넣는다. 유튜브 고수들 보면 로즈마리 허브도 한 줄기씩 넣던데 난 없다. 마트 가서 사 온다는 걸 갈 때마다 빠뜨린다. 밀봉기를 꺼내 전원을 연결한다. 밀봉기에 비닐 팩을 하나씩 물린다. 버튼을 누르면 공기를 빨아들인다. 고기 둘레로 비닐이 쪽 오그라든다. 수조에 물을 는다. 수조 한쪽 벽에 수비드 기계를 달아준다. 56도 온도로 두 시간 설정. 고기 담은 비닐 팩을 수조에 담근다. 뚜껑까지 덮으면 끝. 수조 안에 물이 잘 도는지 확인한다.


수비드 조리 준비를 마친 소고기 & 돼지고기

  수비드 요리의 가장 큰 장점은 재료를 부드럽게 만들어준다는 거다. 오랜 시간 미지근한 온도로 익히는 동안 고기 육질이 부드러워진다. 과학적 원리로는 식재료 속 단백질이 질겨지는 온도를 제어하기 때문이란다. 자세한 건 벤자민 박사님에게 물어보시는 걸로. 잘은 몰라도 너무 뜨겁지 않아서 그런 것 같다. 고기를 놀라게 하지 않고 조심스럽게 익힌다. 살살 달래 가며 아주 조금씩 밖에서 안으로 열기를 보낸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사르르 녹는 육질이 된다. 센 불에 구워 먹는 고기가 쉬 질리는 까닭이 있었다. 까딱하면 질겨져서 아주 버린다.     


  사람 사이도 그렇다. 열정은 한 때의 치기다. 너무 뜨거워도 좋지 않다. 뜨겁기만 한 사랑은 부드럽지 못하다. 불꽃같은 만남은 금방 타올랐다 금세 식는다. 거칠고 질기다. 풍미가 없는 관계다. 비단, 남과 여의 애정이 아니어도 다르지 않다. 단시간에 거침없이 다가오는 사람은 거북스럽다. 조금씩 천천히 사이를 좁혀와야 무리가 없다. 서로의 온기를 오랫동안 주고받아야 충격이 일지 않는다. 모르는 사이 곰비임비 깊어져야 제대로 맛이 벤다. 우리 만난 지 얼마나 됐지? 오메, 언제 그렇게 됐대. 임자랑 보낸 것이 어느덧 한 세월이구먼. 오랜 시간 뭉근히 익힌 사랑은 한없이 부드럽고 연하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 그것에도 품질이 있다면 단연 최상위 등급이다.

  

전용 수조에 설치한 수비드 기계


수비드 조리 중인 수조

  수비드는 사실 만능 조리법이 아니다. 재료의 상태를 파악하여 어울리는 것에만 적용해야 한다. 두툼한 고기를 익히는 데 적당하다. 얇은 것은 차라리 직화로 금방 구워 먹는 게 더 낫다. 사람도 그렇지 않은가. 아무한테나 아까운 시간을 무한정 할애할 수 없다. 어떤 만남은 인스턴트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만났다 헤어진다. 그런 것은 그런대로 둔다. 갈수록 얄팍한 만남이 많아지는 것, 단지 그게 아쉬울 뿐이다.     


  수비드 기계가 신호음을 뿜는다. 지난한 익힘의 시간이 끝났다. 이제 이 고기를 돌아오는 어떤 날 사랑하는 사람들과 먹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숯불에 올리거나 기름 두른 팬에 올린다. 아주 잠깐 겉만 바싹 익혀 맛을 더하면 된다. 이른바 ‘겉바속촉’의 완성이다. 그날 우리들의 만남은 그 잠깐의 불꽃이 될 것이다. 맛있게 먹어주면 좋겠다. 인생 뭐 있나, 맛있게 먹고 재미나게 노는 거지. 우린 그래도 된다. 오랜 시간 각자 일상에서 애썼으니까. 세상 속에서 ‘수비드’ 되어 왔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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