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벌이 아내와 김치전, 도토리묵무침 만드는 방법
맞벌이하는 아내와 우연히 퇴근길 전철에서 만났다. 낮에 별 연락 없다가도 퇴근 때 되면 서로 위치 이동에 대해 자진 신고한다. 12년 전에는 “나 지금 퇴근해. 집에서 봐.”, “응, 나도 곧 나갈 거야. 저녁 뭐 먹을까?”하는 메신저 대화가 오갔다. 지금은 그마저도 에너지가 쓰인다고 여긴다. “ㅌㄱ”, “ㅇㅇ ㄴㄷ" 이런 식이다. ‘퇴근, 응 나도’의 초성만 따온다. 다 뜻이 통한다. 전철을 타고 가는데 익숙한 실루엣이 차에 오른다. 그쪽은 나를 못 봤다. 살금살금 다가가서 어깨를 툭 친다. 집에서는 볼 수 없는 환대의 표정이다.
작은 데시벨로 저녁 메뉴를 의논한다. 몇 줄기 빗방울이 전철 창문을 긁는다. 아내가 김치전에 막걸리를 제안한다. 오, 굿 아이디어. 동시에 도토리묵무침의 아는 맛이 귀 밑을 간질인다. 각자 스마트 폰으로 배달 어플을 검색한다. 김치전은 간혹 메뉴에 있는데 도토리묵무침은 없다. 아무래도 후자는 배달앱 이용세대의 선호 식단이 아닌가 보다. 입맛에서도 세대차를 체감한다. 가는 길에 동네 마트 들르자. 김치랑 부침가루는 냉장고에서 본 듯하다. 도토리묵은 마트에서 팔라나. 다행히 신선식품 코너 두부 옆에 수줍게 두 덩이가 남았다. 도토리묵과 버무릴 상추, 오이, 쑥갓을 조금씩 산다. 양파랑 당근은 집 냉장고 채소 칸에 있을 것이다. 막걸리를 빠뜨릴 뻔했다. 아내와 나 둘 다 단 걸 안 좋아한다. 요사이는 지평 막걸리에 꽂혔다.
집으로 가서 낮 동안 딸아이를 돌봐주시는 모친을 보내드린다. 본가에 계신 아부지 저녁밥 차려드려야 한다며 부리나케 가신다. 아이는 할머니가 해주는 밥을 방금 전에 먹었다. 아이에게 엄마 아빠랑 김치전에 도토리묵무침 먹을 거냐고 묻는다. 아니, 안 먹어. 도토리묵무침이 뭐냐고 물어온다. 아, 먹어본 적 없나? 신속하게 씻고 옷을 갈아입는다. 오늘 저녁은 팀워크다. 내가 도토리묵무침, 아내가 김치전을 맡는다. 특히 뭐든 써는 건 자신 있는 아내가 채소 손질을 책임진다.
아내의 김치전을 따라가 보자. 냉동실 문 안쪽 선반에서 부침 가루와 튀김 가루를 내린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우리 집의 모든 분말은 찬장이 아니라 냉동실에 있다. 냉장실에선 장모님이 넣어 주신 김치 통을 들어낸다. 아래쪽 채소 칸에서 양파와 당근을 꺼낸다. 아내가 우선 채소를 손질한다. 새로 사 온 오이는 어슷썰기 해서 길쭉한 반달 모양으로 썬다. 억센 당근은 채썰기 한다. 당근처럼 막대기 같이 생긴 채소를 채썰기 할 때는 먼저 얇게 어슷썰기 한다. 그런 다음 타원형으로 썰어진 채소를 포개어 세로 긴 방향으로 썰어내면 된다. 이걸 몰라서 그동안 내가 썬 당근 채가 짜리몽땅했다.
전이나 튀김 요리를 할 때 차가운 맥주를 쓰면 좋다고 어디서 들었다. 아내가 김치전 반죽에 섞으려고 냉장고에서 찬물을 꺼내는 찰나, 내가 냉장고 깊숙한 안쪽에 무알콜 맥주 남았다고 귀띔한다. 맥주 없으면 냉수인데 무알콜 맥주는 그 둘 다이니 더 좋을 것 같다. 스테인리스 양푼에 부침가루 2, 튀김가루 1 비율로 붓는다. 얼마 전까지 어중간하던 김치가 그새 신김치가 됐다. 아내에게 양파도 조금 넣어달라고 했다. 무알콜 맥주를 살살 부어가며 농도를 조절한다. 반죽 색깔이 화이트 핑크다. 우린 강렬한 비비드 핑크를 원한다. 역시나 냉동실에 자고 있던 고운 고춧가루를 내려 조금 섞는다. 비닐 랩을 씌워서 냉장고에서 잠시 숙성시킨다.
이제는 내 도토리묵무침을 지켜보시라. 먼저 양념장을 준비해야 한다. 모를 땐 뭐? 검색창에 ‘백종원 도토리묵무침 양념장’을 입력하라. 고춧가루 3큰술, 진간장 2큰술, 참치액젓 1큰술, 매실액 1큰술, 설탕 1 작은술, 참기름 2큰술, 소금 1작은술이 완전체다. 주방 찬장에 액젓 빼고 마침 다 있다. 난 어차피 액젓 안 좋아한다. 없어도 무방하다. 이런 게 정신승리?!
도토리묵을 데친다. 포장지 뚜껑을 벗기는데 두부와는 달리 물이 많이 안 들어있다. 두부 포장지 뜯을 때면 매번 한쪽 귀퉁이로 물부터 찍 발사되는 게 성가셨다. 아기 엉덩이처럼 찰랑거리는 도토리묵을 끓는 물에 5분만 데친다. 깨질 새라 조심스럽게 찬물에 헹군다. 이제 썰어야 한다. 도마 위에 엎는다. 반 자르고 또 반 잘라가며 먹기 좋은 크기를 가늠한다. 나는 점보 지우개 크기가 딱 좋다.
아내가 냉장고에 넣어둔 김치전 반죽을 빼온다. 가장 큰 프라이팬에 식용유를 두른다. 식용유가 부족하다. 아내가 지난 설날 받아온 선물 상자 안에 카놀라유가 있다. 대세에 지장 있을쏘냐. 쏘맥처럼 섞인 기름을 넉넉히 두르고 김치전을 보름달처럼 붙여낸다. 가장자리 바싹 익혀서 소위 ‘크리스피 한’ 식감이 좋다. 아내에게 살짝 태우다시피 부쳐 달라고 주문한다. “네가 해!”라고 얼른 반말이 돌아온다. 감정을 섞어 김치전을 뒤집는다. 기름이 내 쪽으로만 튄다. 아 뜨거!
나도 하던 거 마저 한다. 양푼을 하나 더 꺼낸다. 도토리묵을 우르르 쏟아 넣고 채소, 양념장과 섞는다. 쑥갓을 손으로 툭툭 뜯어서 넣었다. 깻잎의 까끌거리는 식감이 싫어서 대신 쑥갓이다. 숟가락으로 싹싹 긁어 양념장을 붓는다. 도토리묵이 깨지지 않게 조심해서 섞는다. 점점 향과 비주얼이 살아난다. 평소 파스타 해 먹을 때 쓰는 널찍한 접시에 옮겨 담는다. 마침 조미료 통 구석에 통깨가 눈에 들어온다. 한식은 모름지기 마무리로 깨를 뿌려야지. 제법 그럴듯하다.
거실에 틀어둔 TV에서 예능 프로그램 <유 퀴즈 온 더 블럭> 타이틀이 흐른다. 저거 보면서 먹어야지. 재빠른 동작으로 거실 테이블 위를 치운다. 식탁보 두 장을 잽싸게 얹는다. 중국음식 시켜 먹고 빠뜨린 짬뽕국물 그릇 하나와 아이가 쓰는 밥공기를 올린다. 막걸리 잔 대신이다. ‘다 있다’는 생활용품점에 가서 양은 막걸리 잔 사 온다는 걸 만날 잊어먹는다. 와인 잔도 써봤는데 영 운치가 없다. 잔 벽에 허연 앙금이 남아서 보기에 좋지 않다.
부인 빨리 와 먹자 배고프다! 숙제하러 방으로 들어간 딸아이에게 마지막으로 맛 안 볼 거냐고 묻는다. 빼꼼하게 열린 문 틈 사이로 “안 먹어!” 목소리만 새어 나온다. 음식 다 세팅됐고 이제 착석! 빨리빨리 한 잔 따르고 퉁! 첫 잔은 원 샷. 허기진 뱃속으로 막걸리가 시원하게 다이빙한다. 크으! 아내는 도토리묵무침으로 나는 김치전으로 젓가락이 먼저 간다. 예의다. 오, 맛있다. 내가 만든 도토리묵무침도 먹어본다. 이걸 내가 만들었다고? 벅찬 성취감이 차오른다.
사는 게 별건가. 이러려고 힘들게 직장 다니고 싫은 소리 참는 거지. 부부는 또 뭐 있나. 이렇게 소박한 음식 함께 차려서 오순도순 나눠 먹으면 그게 부부애지. 거기다 맛난 술까지? 지금은 나라님도 안 부럽다. 오늘 우리 집 자급자족 식단이 하나 더 생겼다. 앞으로 김치전에 도토리묵무침 먹고 싶을 때에는 ‘배달하는 부족’, ‘저기요’ 찾지 않고 부인! 크로스! 외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