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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등짝 스매싱을 견디며 대파구이 만드는 방법

by Hoon

본문을 시작하기 전에 이 레시피의 원전은 저명하신 ‘집밥’ 백종원 선생에게 있음을 밝힌다. 같은 이름의 TV 프로그램을 우연히 시청하게 되었다. 심드렁하게 보고 있다가 저건 한 번 만들어 먹어 봐야겠다, 마음이 동했다. 백 선생이 만들어놓은 대파구이를 MC 김국진 씨가 받아먹었다. 한 번 썰지도 않은 긴 대파를 손가락으로 잡아 높이 든다. 턱을 쳐들고 입을 크게 벌린다. 세단기가 종이를 삼키듯 저작운동에 맞춰 대파 밑단이 뭉텅뭉텅 없어졌다.


대파구이, 있어 보이는 스페인 요리 이름으로는 ‘칼솟타다(Calcotada)’라고 부른다. 어디쯤 붙어있는 동네 인지도 모르지만 스페인 카탈루냐 지역 사람들이 즐겨 먹는단다. 평소 서양요리 이름은 잘 외지 못한다. 대파를 굽다, 태우다, ‘타다’의 묘한 연상 작용으로 요 음식 이름만큼은 두뇌회로에 안전하게 저장하고 있다.


마트부터 다녀오자. 기왕이면 깔끔하게 씻어 나온 것 말고 뿌리째 있는 흙 대파를 카트에 담는다. 우리 집에 없을 만한 소스 재료도 좀 사야 한다. 소스에 찍어 먹는 요리다. 대파만 덜렁 구워서 먹으면 그걸 어디 요리라고 하겠는가. 노랗고 빨간 파프리카 두어 개가 필요하다. 견과류도 있어야 한다. 치즈도 들어가는데, 먹어서 거부감 없었던 치즈면 아무거나 다 좋다. 올리브유는 집 찬장에서 본 것 같다. 슬쩍 곁들여 먹을 맥주도 집어 든다. 오늘은 라거 말고 밀맥주로.


먼저, 소스를 만들자. 소스 이름은 ‘로메스코 소스’라고 백 선생님이 알려주셨다. 이 이름은 도통 외워지지 않는다. 파프리카, 견과류, 치즈, 다진 마늘, 올리브유, 후추, 소금이 재료가 된다. 얼추 있어야 할 건 다 있다 싶으면 한쪽에 잘 두고 노란색과 빨간색 파프리카를 꺼낸다.


파프리카를 홀라당 태워야 한다. 이렇게 태워도 되나 싶을 정도로 태운다. 손잡이 있는 석쇠가 있으면 편하다. 가스레인지 화구에 경쾌하게 불을 댕긴다. 긴 젓가락이나 집게로 파프리카를 요리조리 굴려가며 골고루 태운다. 아내의 등짝 스매싱은 이 시점에 작렬할 확률이 높다. 아무리 조심해가며 파프리카를 구워도 재 가루가 날릴 수 있다. 재 가루가 우아하게 위로 위로 올라갈수록 등짝 스매싱 강도도 올라간다. 까맣게 탄 파프리카 껍질을 싱크대에서 씻어낸다. 자칫 껍질이 수챗구멍을 막으면 물이 안 내려간다. 2차 등짝 스매싱을 경계하라.


견과류가 있어야 된다고 했다. 백 선생은 아몬드를 기름 없이 팬에 볶던데 난 오늘 지금 현재 시방 몹시 귀찮다. 그리고 난 아몬드를 좋아하지 않는다. 난 땅콩. 지난번에 안주로 먹다 남긴 볶음땅콩이 생각났다. 오예, 볶을 필요도 없다.


파프리카와 나머지 재료를 믹서기에 간다. 믹서기가 있어야 된다는 말이다. 모든 재료가 다 준비됐는데 이 기계가 없다? 애석하지만 배송일 기준 내일이나 모레 해 드셔야 한다. 파프리카는 갈리기 좋게 칼이나 가위로 조각내서 넣는다. 땅콩 한 움큼. 다진 마늘도 크게 한 숟가락. 올리브유는 휘휘 두어 바퀴 두른다. 치즈는 본인 입에 맞는 거면 다 된다고 했다. 우리 집 냉장고 신선 칸엔 아이가 먹다 남긴 체다치즈 두 장이 있다. 갑자기 찾으면 어떡하지, 일단 믹서기에 투입. 어쩌긴 뭘 어째, 또 사 오면 되지. 후추 톡톡, 소금 한두 꼬집으로 마무리한다. 아직 야심한 시간은 아니다. 자신 있게 믹서기 버튼을 누른다.


이제 본 게임, 대파를 구워보자. 3차 등짝 스매싱은 견디고 버텨라. 인내는 쓰고 열매는 달다. 정확하게는 파란 이파리가 아니라 뿌리 부분을 굽는다. 뿌리 수염은 미리 잘라내라. 아내의 꾸중을 조금이라도 피하고, 최소한의 성의를 보이려면 국물용으로 따로 챙겨두는 것도 방법이다. 석쇠 위에서 열정적으로 굽는다. 마찬가지로 이렇게 태워도 되나 싶을 정도로. 이파리가 너무 길면 조금 잘라내도 괜찮다. 어차피 우리는 하얀 뿌리를 먹을 거니까. 이파리도 버리면 안 된다. 라면이나 찌개에 넣어 먹자. 부인, 이런 내가 알뜰하지 않소.


이 시간을 얼마나 기다려왔던가. 먹자, 먹어. 바싹 그을린 대파의 바깥 껍질을 벗겨내면 촉촉하고 뽀얗고 뜨끈한 속살이 나온다. 소스를 듬뿍 찍자. 이렇게 많이 찍어도 되나 싶을 정도로. 김국진 씨가 보여준 액션을 참고해서 바른 동작으로 섭식하자. 입 언저리와 손가락에 검댕이가 묻었지만 대수일 쏘냐. 아, 냉장고에서 냉찜질 중인 캔 맥주를 잊을 뻔했다. 찰칵, 한 손과 집게손가락으로 유려하게 마개를 따낸다. 대파 일발 장전, 꿀렁꿀렁 크게 한 모금 삼킨다. 시간의 유격을 두어선 곤란하다. 바로 대파구이 입장!


기상천외한 맛이다. 대파가 달구나. 매운 맛은 완전히 휘발되고 달큰하게 기분 좋은 자연의 단맛만 남았다. 소스는 또 어떻고. 익힌 파프리카 과육의 단맛은 대파와는 또 다른 풍미다. 땅콩의 고소함, 마늘의 알싸함, 치즈의 꼬릿한 향, 올리브유가 도와준 적당한 농도가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 맥주도 맥주인데 레드 와인과 먹으면 분위기 내기에 그만이겠다. 이 좋은 걸 지구 반대편 스페인 사람들만 먹고 있었다고? 이제라도 알게 된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아내와 아이가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았다. 눈빛으로 ‘저러고 싶을까’라고 말한다. 이러고 싶은 걸. 두 사람에게 권했다. 아내는 약하게 끄덕이며 먹을 만하네, 한다. 아이는 대파 안 먹어, 내뺐다.


사실, 일반 가정집에서 만들어 먹기에는 조금은 마음을 먹어야 하는 요리다. 재료가 비싸거나 구하기 어려워서, 혹은 조리법이 까다로워서가 아니다. 단지 가수 장범준 노래처럼 흩날리는 재 가루 속에서 너의 대파 향이 느껴진 것이기 때문에. 캠핑에 입문도 했겠다, 조만간 캠핑장을 찾으면 그곳에서 당당하게 해 먹으련다. 아우, 저거 저거 믹서기, 석쇠, 가스레인지, 싱크대 언제 치워. 마지막 등짝 스매싱을 잽싸게 피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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