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원악기상가는 가을과 참 맞춤하다. 요즘처럼 인디언 서머(Indian summer) 말고 예년 같은 만추(晩秋). 이렇게 얘기하면 낙원상가에 입점한 수많은 악기점 사장님들 속 긁는 소리일까. 가뜩이나 장사 시들한데 연중 한 철만 벌이 하라고? 계곡 앞 닭백숙마냥? 그런 서운한 이야기일 리가. 운치가 그렇다는 말씀이다. 어둑한 하늘. 낙엽 쌓인 거리. 세월이 묻은 잿빛 건물. 악기 가방을 멘 행인. 가을날 낙원상가는 내게 한 장의 엽서 같은 이미지로 남는다.
지금도 가끔 낙원상가에 간다. 산책 삼아서. 회사 구내식당에서 얼른 점심을 때운다. 그러고 나와서 전철 1호선 종각역 사거리까지 간다. 보신각을 오른편에 두고 종로 3가 방향으로 곧장 걷는다. 예전 지○다노 있던 건물까지 가면 된다. 지금은 ‘다 있소’ 생활용품점이 생겼다. 대각 맞은편에 탑골공원이 보인다. 인사동 거리 방향으로 횡단보도를 건넌다. 금○제화는 아직 영업 중이다. 표구사, 화랑 많은 왼쪽 골목으로 들어가지 말고 차도로 붙어 조금 더 걸어간다. 거기 낙원상가가 있다.
밖으로 난 계단으로 상가 2층에 오른다. 둔중한 유리문을 연다. 이중으로 된 출입문은 차폐 효과가 크다. 문을 열자마자 온갖 악기 소리가 섞인다. 출입구 근처 작은 가게부터 안쪽에 번듯한 대리점 규모인 곳까지. 점포가 늘비하다. 쇼윈도 진열 상태를 손보는 사장님, 초급자용 기타를 찾는 손님, 그를 맞이하는 점원, 상자를 수레에 실어 나르는 배달기사, 신상 악기를 손수 연주해보는 은둔 고수. 수다 삼매경인 단골손님과 주인장. 모두 분주한 듯 여유롭다. 아, 초행인 분들은 방향을 잘 살피셔야 한다. 원체 미로 같은 공간이라 길 잃기 십상이다. 방문 이력이 쌓여야 온전히 용무를 마치고 탈출할 수 있다.
오륙 년 전쯤일까. 회사 다니기가 유난히도 끔찍하던 때였다. 지금보다 더 깊은 가을 어느 날이었을 게다. 퇴근하고 집에 가려다 방향을 틀었다. 낙원상가로. 얼마 전부터 문득 기타가 다시 치고 싶어졌다. 진저리 나는 회사 생활, 술로 달래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그래 봐야 내 몸 축내는 내 손해 같았다. 뭘 할까. 뭘 하면 작은 안식을 얻을까. 그러다 생각난 것이 통기타였다. 그래, 음악 좋지. 기타 다시 해보자. 학창 시절 치던 어쿠스틱 기타.
내 손으로 기타 사는 건 처음이었다. 어릴 때 치던 기타는 부모님께 선물 받은 거였다. 낙원상가로 향하며 짐짓 긴장이 됐다. 그냥 인터넷으로 살 걸 그랬나. 뜨내기손님이라고 바가지 씌우면 어떡하지. 악성 재고 처리하는 거 아냐? 안 좋은 생각이 꼬리를 문다. 어릴 적 휴대용 카세트 플레이어 사러 갔던 용산 전자상가가 떠올랐다. 어른 돼서 전철 2호선 강변역 테○○마트 가서 휴대폰 처음 샀던 기억도 난다. 학생 뭐 찾아? 가격만 듣고 가! 여기저기 부르는 소리. 위협에 가까운 호객. 점원 형님들의 험악한 인상. 흥정인지 강매인지 어지러운 거래. 눈 뜨고 코 베일까 경계해야 하는 극도의 심리적 긴장까지. 집으로 돌아오면서도 내내 찜찜한 기분이었다. 잘 사긴 한 건가.
세상 쓸 데 없는 걱정이었다. 제법 진열된 기타가 다양한 점포로 들어갔다. 쭈뼛쭈뼛거렸더니 주인장이 어떤 기타를 찾느냐 묻는다. 정말 오랜만에 기타 다시 사려는 건데 뭐라고 부르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땅콩처럼 생긴 아담한 몸통에 한쪽 귀퉁이가 움푹 팬 기타를 찾는다고 말했다. 이것저것 꺼내서 보여주신다. 음색은 좋은데 내 체구에 비해 악기가 버겁다. 망설이고 있으려니 주인장 말씀하신다. 아마 찾으시는 게 우리 가게엔 없고 저쪽엔 있을 겁니다. 가서 ‘OM 바디’나 ‘팔러 바디’를 찾는다고 하시고 ‘컷 어웨이’ 모델을 보여 달라고 하면 됩니다. 그러더니 아니지, 손가락을 퉁기더니 간이 영수증을 뒤집어 또박또박 적어서 주신다. 얼떨결에 쪽지를 받아 들고 주인장 손가락 끝이 향하는 다른 악기점으로 건너갔다.
뜻밖에 두 번째 점포로 들어선다. 이런 걸 찾는데요, 종이를 내밀었다. 몇 가지 모델이 있는데 맘에 드는 것으로 고르란다. 이십여 년 전 이식되어 손가락이 기억하는 가락 몇 마디를 튕겨보았다. 악기와 주인의 운명적 만남이랄까. 그중에 마음에 쏙 드는 기타가 있다. 음색도 좋고 몸에 착 붙는 느낌도 그만이다. 겨우 몇 개 기억하는 코드를 잡아보는데 금방 길거리 버스킹이라도 가능할 것 같다. 이걸로 주세요, 가격은 얼마..? 그랬더니 주인장인지 점원인지 자기 핸드폰 화면을 스윽 보여준다. 인터넷에서 사면 젤 싼 게 이 가격인데요, 저희는 이만큼만 받을 게요. 인터넷보다 싸다. 호객도 없고 흥정도 필요 없다. 내가 팔지도 못하는 손님인데 굳이 다른 가게로 안내해준다. 딱 봐도 얼뜨기인 손님인 것을 속이려 들지 않는다. 그래도 남는 몫이 있으니까 파는 거겠지만 그 시절 용산이나 강변과는 격조가 다르다. 새로 산 기타를 등에 지고 나온다. 회사 스트레스가 벌써 날아가고 없다.
억지스러운 추측이겠지만 그런 것 때문이려니 싶다. 예술의 순수성. 경험적으로도 안다. 음악 좋아하는 사람 치고 나쁜 사람 보지 못했다. 음악을 현실의 것으로 구현하는 게 바로 악기다. 악기를 취급한다. 음악이 좋아서, 악기가 좋아서 낙원상가에 발을 들인 사람들이 서로 악기를 사고판다. 표독한 장삿속이 침범하지 못하는 이유일 것이다. 여느 공산품과는 다르다. 고가의 가전제품, 첨단 기능으로 무장한 스마트 기기를 거래하는 현장과는 차별된다. 꼭 사고파는 용무가 아니어도 낙원상가에 자연스레 모여든다. 말하자면 음악 하는 사람들의 큰 사랑방, 순수의 세계로 향하는 터미널 대합실이다. 프로페셔널이 아니어도 좋다. 소싯적 통기타 한 번 잡아본 사람이면 누구나 프리패스다. 그런 이유로 낙원상가는 여전히 순수하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는다.
그때 구입한 기타를 지금도 이따금 연주한다. 레퍼토리도 늘어서 악보 안 보고도 예닐곱 곡은 칠 수 있다. 가수 장필순 씨의 <나의 외로움이 너를 부를 때>란 곡을 가장 좋아한다. 아르페지오 주법으로 시작하는 노래의 도입부가 이 가을과 무척이나 잘 어울린다. 부족한 실력이나마 여러분께도 들려드릴 수 있으면 좋으련만.
낙원상가로 향하는 나의 점심 산책이 오래 이어지길 빈다. 그러려면 나도 나지만 낙원상가가 건재해야 한다. 요즘 장사하는 분들 사정이 다 그럴진대 악기 파는 사장님들은 특히나 더 마음 쓰인다. 욕심 같아선 기타 한 대 더 팔아드리고 싶지만 내 주머니 형편도 위태롭다. 조만간 단골 가게에 들러 기타 닦는 레몬오일, 예비 스트링이라도 사 와야겠다. 낙원상가의 가을이 넉넉한 수확의 계절이길 진심으로 바란다. 아울러 당신에게 권한다. 이 가을, 종로 낙원상가 한 번쯤 들르시라고. 다룰 줄 아는 악기 없으셔도 전혀 무방하고. 순수한 영혼들이 머물고 오가는 곳, 오래된 그곳의 향기를 맡아보시라고.거기 당신이 찾던 낙원이 있을지모른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