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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on Jul 28. 2020

피똥 싼다

  “너 그러다 피똥싼다.”

 2005년에 개봉한 영화 <싸움의 기술>에서 백윤식 배우가 남긴 명대사다. 영화의 주인공은 총각 시절의 나만큼이나 깡말랐던 배우 재희이다. 작중 백윤식 배우는 어두운 주먹 세계에서 은퇴한 은둔 고수, 방랑 협객쯤으로 동네 최약체 재희의 싸움 스승이 된다. 위의 대사는 백윤식 고수가 도발해오는 상대에게 회심의 일격을 날리기 전 최후통첩의 뜻으로 내뱉는 말이다. 지금은 잘 쓰지 않는 고어가 됐지만 당시엔 보통 사람들도 우스갯소리에 섞어 종종 쓰던 표현이다.

    

  생각해보면 굉장히 무서운 말이다. 사람은 어지간한 일로 피똥을 싸지 않는다. 인터넷에 피똥을 검색하면 무슨무슨 암으로 끝나는 무서운 질병의 대표적 증상으로 검색된다. 영화의 대사를 풀어 쓰면 “당신이 그런 행동을 계속 일삼는다면 언제고 심각한, 자칫 죽을 수도 있는 병의 증상을 겪고 말 것이다.”가 된다. 그냥 죽으라는 말도 아니고 죽을병의 고통을 겪게 되고, 그렇게 불안에 떨다 필경 죽고 말 거라니, 저주도 아주 정성스러운 저주다.


  며칠 전, 건강검진 결과를 메일로 받았다. 작년에도 “Hoon 님은 진료가 필요한 과목이 없습니다.”였으니 별 것 있겠나 하는 마음으로 첨부파일을 열었다.

 “대장 잠혈 반응 : 양성, 추가 검진이 필요합니다.”

라니? 그게 뭔데? 미간에 힘을 준 채로 재빨리 인터넷을 검색했다. 몇 해 전부터인가 회사에서 시켜주는 건강검진 세부 과목 중에 초등학생 시절 양호실에 제출했던 채변 검사 같은 게 추가됐다. 옛날처럼 뱃속에 기생충이라도 있나 들여다보는 건가, 싶었는데 가당찮은 소리. ‘대장 장혈 반응 검사’란 분변 속에 육안으로 확인할 수 없는 혈액, 그러니까 숨어 있는 피 잠혈의 존재 유무, 양의 정도를 파악하여 대장과 관련한 암의 초기증상을 진단하고, 확실한 소견을 얻을 수 있는 대장내시경의 시행 여부를 판단하기 위한 임상 검사를 말한단다. 한 마디로, 피똥을 싸면 장 내부에 출혈이 있다는 뜻이고 그렇다는 건 대장암, 직장암 등에 걸려 있을 수 있다는 뜻인데 그걸 알아보기 위한 기초 검사에서 내가 불합격했다는 뜻이었다.     


  그토록 떨쳐내고 싶던 불안이 다시 슬그머니 어깨동무를 걸어왔다. 사실, 난 몇 해 전 ‘크론병’이라는 장과 관련한 질병을 진단 받았다. 당시엔 병세가 위중해서 차가운 메스를 대야만 하는 큰 수술 후에 병원에 길게 입원도 했었다. 초등생 시절 겨울방학 때 돈가스 사준다는 엄마의 거짓말에 속아 치러냈던 중요한(?) 외과 수술 이후 두 번째였다. 아무튼, 그 병이 도진 건가, 싶어 나쁜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일주일 다섯 번의 퇴근길 중 한두 번 공장 바깥 사람들(우리 방송사 외의 인맥을 두고 전 직장 선배들은 그렇게 불렀는데 내 입에도 착 붙어 요즘도 종종 그렇게 부른다.)과 저녁 자리, 정확히는 술자리도 피하게 됐다. 큰 병도 뭣도 아니기만 하면, 성당도 다시 잘 나가볼게요, 하고 오랜만에 하나님께 부탁 같은 기도도 드려본다. 일상의 붕괴, 평범한 하루가 깨어진다는 건 얼마나 비통한 일이던가. 본래 다니던 대학 병원 주치의 교수님께 진료를 받으려고 전화를 걸었더니 가을쯤에나 진료가 가능하단다. 기다려볼까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이 여름 전체를 망칠 것 같았다. 아쉬운 대로 회사 근처 내과 병원에 내시경 검사 예약을 부랴부랴 잡았다.     


  그렇게 일주일을 기다려 오늘 아침 내시경 검사를 받았다. 검사 자체가 아니라 준비 과정이 고역이다. 장 속부터 깨끗이 비워야 한다. 그렇게 해주는 약을 장정결제라고 하는데 이게 문제다. 어릴 때부터 물약으로 된 해열제도 그렇고 제약회사들은 왜들 그런 방식으로 약을 만드는지. 차라리 아무 맛도 없었으면 좋았을 것을 소름끼치는 레몬 맛이 나는 용액을 2리터나 마셔야 한다. 한 번에 다는 아니고 여러 번에 나누어 마시게 되는데, 1리터쯤 먹었을 때부터 화장실에 중뿔나게 드나들게 된다. 사람이 이걸로도 추진력을 얻어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겠구나 싶을 때쯤 뱃속이 깨끗해진다. 검사 준비가 된 거다. 그런 검사를 오늘 아침에 받았다.     


  결과는 OK. 크론병도 아니고 암 같은 죽을병도 역시나 ‘아니올시다’ 이다. 보호자로서 동행했던 아내가 거봐, 내가 별거 아니랬지, 하며 어깨를 툭 친다. 다행이지 암만. 속담 중에 변소 갈 때 마음, 올 때 마음 다르다는 말은 오늘부터 바꾸는 게 맞다. 병원 갈 때 마음, 나올 때 마음 다르다. 사고를 짓누르던 불안이 말끔히 가시고 다시 일상의 달콤함에 코를 킁킁 거린다. 오늘 당장, 이따 퇴근하고 통닭에 관자노리 뻐근할 정도로 시원한 생맥주나 때려 마셔볼까. 하늘에 계신 높은 분께, 당신의 집에도 다시 나가겠노라 했는데, 당장 이번 주는 곤란할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     


  ‘피똥싼다’가 무시무시한 저주였던 만큼, 색다른 축복의 말을 제안한다.

 “네 똥 굵다.”

  포털 사이트에서 대장암, 직장암의 초기 증상을 찾으면 평소와 달리 변의 굵기가 얇아진다는 얘기가 나온다. 그러므로 똥이 굵다는 말은 평소와 다름없이 대단히 건강하다는 말이다. 네 똥 굵다는 말에는 넌 죽을병과는 거리가 말게 무던히도 건강하고 튼튼하구나, 라는 칭찬과 축복의 뜻이 담긴다. 나를 아끼고 내가 더 아끼는 사람들 모두 당신들 똥 굵었으면 좋겠습니다.     


  덧말) 내 양성반응의 원인은 가벼운 ‘치열’이었다. 그래서 넌 무엇 때문이었냐는 의문을 품는 분들이 계실까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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