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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on Jul 28. 2020

불꽃

  오랜 작은 로망을 실현했다. 지난 주말 잠깐 장맛비가 그쳤다. 그 틈에 하룻밤 가족들과 집에서 가장 가까운 캠핑장에 다녀왔다. 의식주와 관련한 필요 물품들을 하나씩 구입했다. 그것만으로 무척 설렜다.

     

  나이 들면 사람이 변한다. 고등학생 때였나. 어느 저녁 부모님이 KBS <가요무대>를 보고 계셨다. 두 분께 무얼 그런 칙칙한 프로그램을 보시느냐 물었다. “너도 나이 들어봐라, 이런 게 좋아질 때가 와. 나도 내가 이렇게 될 줄 몰랐어.” 답하신다. 그때 처음 우리 엄마 아빠가 늙는구나, 깨달았다.     


  나도 변했다. 거창하게 여행이라고 하지 않아도 난 돌아다니는 걸 무척 좋아한다. 그런데도 유독 캠핑, 백패킹 같은 유형은 선호하지 않았다. 여행의 피로는 모름지기 쾌적한 시설에서 풀어야 하는 것. 헌데, 언젠가부터 야영에 대한 욕망이 움튼다. 왜일까 자문해 봤다. 이삼십 대엔 내가 푸르름 자체이니 굳이 산야에 눈길 줄 일이 없었겠고 이제 청춘이 바래지니 자연이 그리워지는 건 아닐까. 애늙은이 같은 소리.     


  ‘불멍’이라고 들어보셨는가. 캠핑족들이 야밤에 불을 피워놓고 그윽하다 못해 멍한 시선으로 그 불을 바라보며 나름대로의 사색을 즐기는 걸 그렇게 부른단다. 로망을 이루는 김에 그것까지 시도해보았다. 이걸 왜들 그렇게 좋아하는 거야, 의문을 품고 장작에 불을 지폈다. 직관적으로 답이 얻어진다. 빛과 열 때문이다. 도심보다 더 깊은 어둠이 찾아오는 캠핑장에서 작은 장작불은 그야말로 빛과 같은 존재가 되어준다. LED 전등 같은 신문물도 있지만 그것으로 우리의 감성을 충만하게 하지 못한다. 불빛에 시선을 드리울 때 포근한 온기가 몸을 감싼다. 장작불의 복사열을 쬐고 있노라면 스르르 마음의 빗장이 열린다. 의지할 수 있는 대상으로부터 따뜻하게 보호받는다는 느낌, 잊고 지내던 무언가가 체감된다.     


  술도 한 잔 마셨겠다, ‘불멍’ 중에 괜스레 철학적 사유도 해본다. 불꽃같은 삶, 하면 여러분은 어떤 이가 퍼뜩 떠오르시는지. 난 단연코 고 이태석 신부다. 모두 불태우고 하얗게 재만 남긴 것, 이태석 신부의 삶이 꼭 그랬다. 그의 생명은 너무 짧게 잠깐 타올랐지만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 이름이 되었다. 아프리카에서도, 이곳 대한민국에서도 이태석은 영원히 존재한다. 불멍 중에 불멸을 떠올린다.     


  소변이 마려워 장작불 곁을 떠나 넓은 곳으로 나왔다. 여기저기 형형색색의 텐트와 그늘막이 보인다. 일찌감치 저녁을 지어먹고 커피를 마시는 중년 부부, 배고프다는 아이를 달래며 부랴부랴 불을 지피는 젊은 아빠, 커다란 수박을 숭덩숭덩 썰어놓고 이야기꽃을 피우는 연인, 과자와 마른안주를 곁들여 캔맥주를 부딪치는 친구들, 캠핑장의 정경은 싱그러운 자연으로만 완성되지 않는다. 문득 저렇게 각자의 모습으로 사랑하고 연대하는 사람들 하나하나가 또한 세상의 불꽃은 아닌지 사유한다.     


  따뜻한 사람이 되어야지. 그 밤 누군가 나에게 어떻게 살 거냐고 물었다면 그렇게 답했을 것이다. 며칠 전 집 소파에서 조던 피터슨 교수가 쓴 책 「12가지 인생의 법칙」을 읽고 있었다. 딸아이가 흘끔 책 제목을 보더니 “아빠, 나이가 얼만데 아직도 인생의 법칙을 몰라?” 묻는다. 예상치 못한 물음에 당황하여 “어버버” 얼버무렸다. 별 뜻 없는 말이었겠으나 나는 적이 뜨끔했다. 딸아, 아직도 어떻게 인생을 살아내야 하는지 몰라서 겨우 책에서 답을 구하는 못난 아빠를 용서해다오. 그리하여 불멍의 그 밤, 나는 따뜻한 사람이 되겠노라 다짐했다.     


  볼일을 보고 자리로 돌아왔다. 불꽃이 약해지고 있어서 얼른 장작 몇 개를 더 넣어주었다. 이태석 신부 제자 50여 명이 의사가 되었다지, 얼마 전 본 뉴스도 뒤이어 생각났다. 내가 기여한 건 아무것도 없는데 마음이 넉넉하고 뿌듯하다. 이태석 신부가 피운 불꽃 하나가 자그마치 50개의 불꽃으로 옮겨 붙었다. 이제 그들의 고향으로 돌아가서 그곳 사람들에게 빛과 온기를 전해주리라.     


  마지막 장작의 불씨가 다해가는 것까지 보고 텐트에 몸을 숙여 넣었다. 캠핑장에선 ‘11시 매너 타임’이란 것이 불문율이다. 이제 고요한 밤 시간만 남았다. 두꺼운 매트리스를 깔았는데도 울퉁불퉁한 바닥이 등판을 찌른다. 이런 불편도 다 낭만이고 추억이지, 변해가는 나 자신을 다시 한번 자각하며 단잠에 빠진다. 오늘 밤에는 진짜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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