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참 별 볼 일 없이 산다. 도심의 잔광은 그 여리고 귀한 빛을 무자비하게 지워버린다. 나에겐 어릴 적 친구들 다 있던 시골집이 없었다. 우리 외할머니는 서울에 사셨다. 부모님 손에 이끌려 산이나 바닷가에 가는 때에만 겨우 별빛을 볼 수 있었다. 정확히 어디였는지는 기억에 없지만 그 찬란한 밤하늘은 여전히 선명하다. 매일 밤 하릴없이 뜨고 지는 별 입장에서야 그저 지겹게 반복하는 일과였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 잠깐은 내게 오래도록 잊을 수 없는 생의 선물이 되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단다. 오매불망 별을 그리던 이가 그 별과 만났다. 요 며칠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는 이야기가 있다. 사연은 이렇다. 배우 오정세 씨를 좋아하는 지적 장애를 가진 오랜 팬이 있다. 오정세 배우는 근래 드라마에 지적 장애를 가진 인물로 출연 중이다. 팬의 여동생이 어려운 과정을 거쳐 오 배우에게 오빠를 만나줄 수 있는지 묻는다. 오 배우는 그러겠노라 답하고 약속 장소에 나온다. 배우 오정세 말고 극 중 인물이 되어서. 분장과 의상, 말투와 몸짓 그대로. 그저 밥 한 끼 나누고 헤어지는 게 아니라 놀이공원에서 온전히 하루를 보냈다. 그날 팬과 여동생이 느꼈을 감동은 긴 말 없이도 알 것 같다.
나는 배우의 세계를 모르지만 그건 정말 어려운 일일 듯싶다. 몇 가지만 이유를 들어보자. 먼저, 그냥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된다. 아무도 손가락질할 사람이 없다. 만나 달라 부탁하는 쪽에서도 거절을 더 쉽게 예상했을 것이다. 바쁜 연예인이 한가하게 청을 받아주는 게 도리어 이상하다. 그리고 얼굴이 팔린다. 아니, 그는 이미 얼굴이 너무 많이 알려졌다. 드라마에서 봤던 옷과 분장을 하고 촬영도 아닌데 돌아다닌다? 상상하기 어렵다. 의아해하는 대중의 시선을 견뎌야 한다. 얘기한 대로 작중 인물을 촬영장이 아닌 공간에서 재현해야 한다. 프로 직업인으로서 쉬 마음 내킬 일이 아니다. 가수가 무대 밖에서 무반주로 노래하는 것과 같다. 화가가 화구도 없이 그림 그리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생업을 넘어 예술적 성취를 위해서만 하는 행위를 아무것도 없는 광장에서 구현해야 한다니, 임파서블 미션이다. 소속사와 복잡한 문제가 불거질 수도 있다. 꼬박 하루를 사람이 붐비는 곳에서 치르는 비수익 활동이다.
그는 왜 그렇게 했을까. 누리꾼들은 개인적 추측을 ‘뇌피셜’이라고 부른다. 이건 내 뇌피셜이다. 그는 공감 능력이 큰 사람이다. 연민이 있고 측은지심을 안다. 아파본 사람만 고통을 온전히 이해한다. 어쩌면 무명배우로서 오래 겪었던 힘든 시간이 그런 마음을 만들었는지 모른다. 게다가 배우 본인이 팬이 가진 병을 직접 연기하고 있다. 차마 단칼에 뿌리치기 어려웠을 것이다. 다음, 그는 의지가 무척 강한 사람인 듯하다. 연민과 측은지심이 있어도 누구나 다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다. 각오와 결심, 실행력 같은 굳건한 마음을 나타내는 낱말이 그가 가진 기질일 것이다. 또 본인이 연기한 인물을 대하는 진심 어린 태도가 결심의 바탕이 됐을 수도 있다. ‘메서드 연기’가 흔한 말이 됐지만 이런 경우야말로 그것의 완성이라고 보겠다. 덧붙여 그는 뭇사람들의 시선을 그다지 의식하지 않는 것도 같다. 누가 보든 말든 하고 싶은 걸 그때 한다.
팬과 가족은 살면서 가장 행복한 하루를 보냈을 것이다. 말 그대로 꿈만 같은 시간이다. 유명한 연예인을 본 게 아니라 우화 속 주인공을 실제로 만났다. 그가 나와, 내 오빠와, 내 아들과 같은 마음의 병을 가졌다. 위로와 치유는 언어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정세 배우 스스로도 어떤 화제작에 출연한 것보다 더 큰 마음의 만족을 얻었을 것이다. 이따금 배우라는 직업은 그가 연기한 인물 때문에 자아의 분열을 겪는다고 들었다. 오 배우는 지극히 이타적인 방법으로 그 해답을 얻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이언맨, 캡틴 아메리카, 스파이더맨 같은 슈퍼 히어로를 연기한 헐리웃 빅스타들이 소아 병동을 찾아 어린 환자들을 위로해줬다는 미담 기사를 종종 접했다. 오정세 배우보다는 한결 수월했으리라. 아이언맨 슈트는 생긴 것 자체가 미래지향적이다. 캡틴 아메리카도 군복과 비슷한 모양이니 거리낄 것 없다. 스파이더맨 정도는 쫄쫄이 옷이니까 불편과 민망함을 인정한다. 내 눈에는 오 배우의 더벅머리 분장, 평상복이라기에는 조금 더 후줄근한 줄무늬 반팔티, 펑퍼짐한 면바지가 그 어느 슈퍼히어로의 갑옷보다 근사하고 멋있어 보인다. 당신은 그 날 그와 그의 가족들, 아니 우리들에게 가장 가깝게 다가온 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