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사고 같은 눈물이었다. 토요일 저녁 가족들과 저녁을 지어먹으며 TV를 켰다. 예능 프로그램 <놀면 뭐하니>에 드라마 <오징어 게임>으로 핫한 오영수 배우가 출연했다. 극 중 위험하기 짝이 없는 세기말적 게임을 창시한 떼부자 노인으로 분한다. 유쾌한 주말 저녁을 위해 작은 소품처럼 틀어놓은 오락 프로그램을 보다가 뜻밖에 눈물을 보였다. 아내는 아예 눈물이 줄기를 이루어 턱 끝에 맺히는 지경이다.
뉴스 대담 형식을 빌린 인터뷰다. 진행자 유재석 씨와 가수 이미주 씨가 오 배우 앞에 앉았다. 유재석 씨가 묻는다. 요즘 어떻게 지내시느냐. 오 배우는 붕 뜬 기분이다, 스스로를 정리하면서 자제심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하는 중이라고 답한다. 다른 경로를 통해 얻은 후문으로 오 배우는 근래의 광고 출연 제안을 모두 거절했다고 한다. 작품에 누를 끼칠까 봐서. 수고한 모든 사람에게 해가 될까 싶어서. 끝 간 데 없는 자제심이다. 일생을 무명의 배우로 살다 뒤늦은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됐다. 물질적 보상이 바로 손 닿을 거리인데 뻗치지 않는다. 오래 고생한 가족들을 생각하면 더 못 그럴 것 같다. 배우의 결심에 동의해준 가족들이 그래서 더 대단하다.
‘열정’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오 배우가 말한다. 나이가 들면 열정이 사라진다, 열정 넘치는 후배들과 함께 하다 보니 덩달아 젊은 척을 하게 됐단다. 극 중에 등장하는 전통 놀이를 하다가 현장의 배우들이 하나같이 동심으로 돌아가는 경험을 했더란다. 여기서부터 오늘의 인터뷰가 심상치 않을 것임을 직감했다. 나이가 들면 열정이 사라진다니. 노배우가 내어 놓는 솔직하고 담담한 고백이다. 그렇다면 내 열정은 이제 어느 정도 눈금일까. 열정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아직 내 안에 남아있기는 한 건가 자문한다. 작품의 완성도를 보아도 촬영 현장에서 오 배우가 까마득한 후배들과 어떻게 소통했을지 보인다. 오 배우가 유행시킨 낱말이 ‘꼰대’가 아니라 ‘깐부’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오 배우는 오늘날 세태에 대해서도 온화하게 비틀었다. “우리 사회가 1등 아니면 안 될 것처럼 흘러간다. 그런데 2등은 3등에게는 이긴 것 아닌가. 우리 모두가 승자다.”라고 말한다. 여기부터는 얼굴이 달아오른다. 모르는 사실이 아닌데도 오 배우의 목소리로 들으니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밥을 오물거리면서 스스로 남과 비교하며 좌절하고 낙담했던 수많은 순간들을 삼킨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애써서 하면서 어느 경지에 이르려고 노력하는 사람, 그가 승자라는 오 배우의 말에 의문부호가 붙는다. 나는 내 일을 애써서 하고 있나, 경지에 이르려는 의지가 있는가.
인생에 대한 오 배우의 은유가 인터뷰의 백미다. “산속에 꽃이 있으면 젊을 때는 꺾어가지만 내 나이쯤 되면 그냥 놓고 오죠. 그리고 다시 가서 보는 거죠. 있는 그대로 놔두는 것, 그게 인생과 마찬가지죠.” 이 대목에서 젊은 이미주 가수가 눈물을 쏟는다. 고백하자면 나도. 옆에 아내를 흘끔 보니 콧물까지 흐르는 듯하다. 오 배우가 말하는 인생을 나는 ‘자연(自然)’으로 해석한다. 본디 그렇게 두는 것. 억지로 거스르지 않고 저절로 흘러가게 두는 것이 인생임을 언제쯤 온전히 수긍하게 될까. 나이 드는 것은 곧 욕심을 버리는 과정이라는 통찰을 오 배우는 꽃을 보는 마음으로 빗댔다.
오 배우가 ‘아름다움’에 대한 소회를 밝힐 때는 거의 오열이었다. 오 배우는 우리말 중에서 아름다움이라는 말을 가장 좋아한단다. 오늘 아름다운 공간에서, 아름다운 두 분을 만나고, 아름다운 시간을 가졌다며 끝으로 만인에게 당부한다. “여러분 아름다운 삶을 사시길 바랍니다.” 가장 따뜻한 덕담이다. 오 배우의 느리고 나지막한 음성에는 무언지 모를 주술적 기운도 있을 것 같다. 말하는 대로 이루어질 지어다. 이건 뭐, 목이 메서 밥술을 못 뜨겠다. 지금 밥이 문제가 아니다. 잘 사는 게 뭔지,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건지 늘 골몰했었다. 아름다운 공간에서 아름다운 사람들과 아름다운 시간을 보내는 것. 그것이 잘 사는 인생이라고 오 배우가 결론지었다. 물론 그것이 꼭 돈 많이 드는 무엇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도 이심전심으로 안다.
오 배우처럼 나이 들고 싶다. 사랑하는 가족들과 소박한 행복을 누리며 소명으로 아는 직업에 오래도록 종사하는 삶. 그 아름다운 여정이 노배우의 깊은 주름을 타고 흐른다. 프로그램 끝나고 나오는 타이틀이 유달리 새롭다. 놀면 뭐하니. 그래, 가만히 있을 수 없다. 아름다운 삶을 위해 작고 예쁜 마음을 먹어봐야 쓰겠다. 일단, 고약한 성질머리부터 죽이자.